오퍼레이팅 시어터 - 어느 의사의 영화 해부
박지욱 지음 / 사람in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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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삶은 때때로 하나의 수술실 같다. 어둡고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과 연약함이 드러나며, 그 중심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생과 사, 그 너머의 의미를 응시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 영화란 그런 수술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스크린의 빛 속에서 인간은 해부되고, 그의 고통과 환상, 병과 치유는 조명 위에 펼쳐진 진실처럼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장면들 앞에서 나는 관객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의사’로서,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병들며, 왜 상처 입고, 또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언제부턴가 인간을 해부하는 영화에 더 깊이 이끌리기 시작했다. 액션도, 멜로도 아닌, 사람의 마음과 뇌와 영혼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 ‘정상’이란 무엇이며, 병든 정신은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그런 물음들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건, 단연코 『뷰티풀 마인드』를 본 그날이었다.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삶은, 단지 조현병이라는 질병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오해와 내면의 균열, 이성과 감정의 다툼 속에서도 ‘사랑’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끝내 버티어낸 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마 그 침묵은, 고요한 수술실에서 메스를 든 의사의 마음과도 닮아 있었으리라.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오퍼레이팅 시어터>. 의사가 쓴 책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의학적 지식을 풀어놓는 보고서가 아니었다. 그 책은 마치 스크린 위의 카메라처럼, 인간의 삶을 촬영하고 조명하며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책 속의 장면들은 하나의 수술이자 하나의 영화였고, 나는 읽는 동안 내내 진료실과 병실과 수술실과 영화관 사이를 오갔다. 의사가 바라보는 영화란 과연 어떤 풍경일까. 그는 인간의 신체를 넘어서 정신과 감정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리고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그는 인간의 어떤 진실을 해부하려 했던 걸까. 의학은 늘 과학이라는 단단한 기둥 위에 세워진 학문이라 생각해왔다. 숫자와 데이터, 생화학적 기전과 치료의 성공률로 구성된 객관적 영역.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이 무채색의 세계 속에서도 따뜻한 숨결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의 동기와도 닮아 있었고, 매일 병상 앞에 서서 환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의사인 동생과의 대화 속에서 순간의 미묘한 감정과도 통했다. 저자는 영화를 통해 질병과 의학,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질병을, 혹은 환자를, '증상'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퍼레이팅 시어터>는 전혀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한 편의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를 의사의 시선으로 천천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 숨겨진 고통과 사랑, 역사와 윤리, 제도와 인간의 기억을 조명한다. 이를테면 <뷰티풀 마인드>에서 조현병을 앓는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이야기는 병리학적 해설이 아닌, 냉전 시대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질병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지를 다루는 철학적 성찰로 이어진다. 의사이자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은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병은 곧 고통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인가?" 그 가운데 조현병 치료를 위한 의학적 치료제의 역사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사랑의 기적>에서는 뇌염 환자들에게 투여된 신약이 잠시나마 그들을 "깨어나게" 했던 기적 같은 순간이 다뤄진다. 의학적으로는 일시적 도파민 작용의 결과였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짧은 각성의 순간이 얼마나 깊은 감정과 희망을 안겨주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어 지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돌아오는 환자를 볼 때마다 이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의사는 때로는 존재의 경계에 선 자들을 깨우는 사람이다. 눈을 뜨는 짧은 순간이 주는 경이로움, 말 한 마디 없는 응시에 담긴 말 못할 감정의 무게. 영화는 그것을 시각적 시詩로, 우리는 임상적 기록으로 남긴다. 의약품의 역사도 그 영화 속에서 빛을 발한다. 엘-도파는 실제로도 1960년대 말부터 파킨슨병 치료에 사용되었으며, 그 개발 과정은 의약품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인간의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드라마였다. 책은 단지 영화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한 의약품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임상에서 어떤 희망과 절망을 안겼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의 진보는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환자의 눈물, 보호자의 간절함, 연구자의 집념이 하나로 얽혀 우리는 '치료'라는 희망을 한 뼘씩 확장해왔다.

이 책이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라는 감성의 매체를 통해 의학의 세계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통해 진료실 밖의 더 넓은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셔터 아일랜드>의 경우, 정신과적 치료의 역사, 특히 전두엽절제수술과 같은 폭력적인 기술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우리가 의료적 개입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무엇이 치료이고, 무엇이 통제인가? 누군가의 고통을 없앤다는 명목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침묵시켜왔는가?

영화는 때때로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인간을 그려낸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뇌과학적 조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영화는 정치와 과학, 의학이 어떻게 얽힐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책은 이 영화가 음모론만이 아니라, 의학이 가진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경고임을 밝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전 읽었던 신경정신 전문의의 책이 떠올랐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는 환자에게 약물 치료만이 최선인 것처럼 설명했던 자신의 모습을, 이제는 너무 성급하고 단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하던 그가 생각났다. 그때의 그는 의사였지만, 충분히 인간이 되지 못했던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의사도 한명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책은 영화라는 렌즈를 통해 의학의 무게를 감정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 번역은, 때로는 진료실에서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큼 강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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