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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궁극적 귀결점이지만, 현대 사회는 그것을 직면하기보다 은폐하고 미루는 경향이 있다. 장례라는 의례는 죽음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공적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이 있다. 책은 죽음을 둘러싼 노동의 세계와 현대 사회의 애도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관계와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조금은 무거운 주제의 책이다.
장례는 더 이상 가문의 의례가 아닌 가족 행사로 변모했다. "장례의 성격이 가문의 의례에서 가족 행사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주요한 이유일 테다. 사람들은 장법을 잘 아는 호상을 필요로 하기보다 가족 행사를 매끄럽게 진행해줄 '플래너'를 원했다." 이러한 변화는 장례 산업의 전문화와 상품화를 가속화했고, '웨딩 플래너'처럼 '엔딩 플래너'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장례 문화가 더욱 축소되고 간소화되었다. "작은 빈소, 적은 문상객, 간소한 절차는 더는 불효로 상징되거나 초라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장례식장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고, 가족장에 맞는 작은 빈소와 무빈소 상품이 새롭게 등장했다. 장례업은 점차 산업화되어가며 서비스 노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장례지도사들은 특별한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고객과 눈을 맞출 때는 활짝 웃어서는 안 된다. 무표정도 안 된다. 여기는 슬픈 곳이니 슬픈 표정은 더욱 안 된다. 장례식장과 서비스직, 그 경계에 표정과 몸짓과 눈빛을 놓아야 한다." 이들은 사별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장례 노동은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이다. 장례지도사들은 시신을 씻기고, 입관하고, 운구하는 과정에서 육체적 노동을 직접 수행한다. 특히 시신을 복원하는 작업은 세심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사라진 눈을 만들고, 부서진 코를 세우고, 눈썹마저 한 올 한 올 새로 그렸다." 시신을 대하는 노동은 또한 죽음의 물리적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시신은 당연하게도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이럴 때 시신을 물로 씻으려고 하면 피부가 다 쓸려나간다. 탈지면으로 온몸을 감싸고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죽음의 육체적 측면을 다루는 전문적 기술이다. 장례 노동의 성별화 역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관을 드는 거리는 입관실에서 장례식장 앞에 세워진 운구 버스까지이다. 그 짧은 거리마저 남성만이 관에 손을 댄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이 죽음을 다루는 노동에도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중요하다. "나는 사람이 시체로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늙은 몸으로 등장한 데 더 놀랐다. 나이 듦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벗은 몸. 나는 나이 듦도 모른 채 죽음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이다." 노인들의 몸은 삶을 살아낸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살아내는 데 연료로 써버린 듯 근육과 살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러한 묘사는 노화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삶의 여정을 담은 기록임을 보여준다. 죽음의 공간은 종종 산 자의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다. "묘지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와 갈등을 빚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죽은 자의 땅 묘지와 산 자의 땅 도시의 긴장 관계는 산 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묘지는 이장되거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선다. 부산 아미동의 사례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복잡한 공존을 보여준다.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단단한 벽과 바닥이 되어주었고, 유골함이 자리했던 광중은 아궁이 역할을 했다." 이는 생존의 필요가 죽은 자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예시이다.
모든 죽음이 동등하게 애도받지 않는다는 현실은 사회적 불평등의 또 다른 표현이다. "누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공적 지원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도 통치의 기술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도 권력이 행하는 일이다." 사회는 애도의 위계를 만든다. "사회가 애도(의 비용)를 감수하지 않는 죽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이의 죽음, 시설에서 사는 이의 죽음, 사회가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 몸을 지닌 이들의 죽음, 그리고 연고 없는 자의 죽음." 이러한 불평등은 누구의 삶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지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반영한다. 변희수 하사의 사례는 애도의 정치학을 보여준다. "애도(받을 자)의 자격을 묻는 세상에서,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애도의 위치에 놓은 것은 타인들이 보내는 안부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애도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과 장례를 둘러싼 노동, 의례,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애도의 윤리'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구의 죽음이 애도받을 만한가가 아니라, 모든 이의 죽음을 어떻게 존엄하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장례 노동자들은 이 과정의 중요한 매개자이다. 그들은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화장장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뒤편에서 도구와 시설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같이 울어주고 손을 맞잡아주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일이다. 장례 절차가 삐걱거릴수록 사별자들은 더 많은 눈물을 쏟는다." 죽음이라는 보편적 경험 앞에서 우리는 결국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죽음에 관해 아는 유일한 한 가지는, 혼자 죽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깨달음은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남겨진 이들이 애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죽음과 애도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은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모든 이의 삶과 죽음이 존중받는 사회, 죽음 앞에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의 윤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