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 - 더 아름다운 삶을 위한 예술의 뇌과학
수전 매그새먼.아이비 로스 지음, 허형은 옮김 / 윌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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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미술관의 고요한 공간에서 한 작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콘서트홀에서 현의 떨림이 가슴을 울리는 순간, 혹은 책 한 페이지가 갑자기 온몸을 사로잡았던 그 순간을.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건너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초대장이다. 우리는 왜 예술에 이끌리는 것일까? 어떤 이유로 특정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특정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특정 구절에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단순한 취향이나 감상의 차원을 넘어, 우리 뇌의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 경이로운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번에 예술의 뇌과학이라는 접근 방법으로 설명하는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수전 매그새먼과 아이비 로스 공저의 <뇌가 힘들땐 미술관에 가는 게 좋다>얐다. 미술관에 가길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책인 것 같다. ^.^

    현대 사회는 효율과 생산성을 우선시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보를 소비하고,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소통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뇌는 과부하 상태에 빠지기 쉽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업무 시간 내내 이메일과 메시지에 대응하며, 퇴근 후에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잠시도 쉬지 않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뇌는 점점 더 지쳐간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현대인들이 번아웃, 불안, 우울, 무감각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다. 짧은 영상, 끊임없는 알림, 즉각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콘텐츠들이 우리의 주의력을 더욱 분산시키고, 뇌의 자연스러운 회복 능력을 방해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은 더 강한 자극이나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있을지 모른다. 천천히 걸으며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조용히 앉아 음악을 듣는 것, 한 권의 책에 몰입하는 것,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 - 이러한 예술적 경험들이 지친 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신경미학은 예술 경험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최근 들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분야는 예술 감상이 주관적 경험을 넘어, 뇌의 신경 회로와 화학적 반응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할 때 우리 뇌의 보상 체계가 활성화되어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는 초콜릿을 먹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경험하는 기쁨과 유사한 신경학적 반응이다. 또한 예술 감상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를 낮추고, 면역 체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술이 뇌의 신경 가소성을 촉진한다는 사실이다. 신경 가소성이란 뇌가 새로운 경험과 학습을 통해 구조적, 기능적으로 변화하는 능력을 말한다. 예술 활동은 이러한 뇌의 변화를 촉진하여, 새로운 신경 연결을 형성하고 기존의 회로를 강화한다. 이는 노화로 인한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고, 뇌 손상 후 회복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경미학 연구는 예술이 인간의 건강과 웰빙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보여준다. 예술은 우리의 감정을 정화하고, 인지 기능을 향상시키며, 사회적 연결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직업적 실패, 자연재해, 폭력, 질병 등 다양한 트라우마가 우리의 심신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러한 상처는 단순한 기억을 넘어, 뇌의 구조와 기능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의 뇌에서는 공포와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영역인 편도체가 과활성화되고, 인지적 통제와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기능이 저하된다. 이로 인해 불안, 우울, 과각성, 회피 행동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예술 치료는 이러한 트라우마로부터의 회복을 돕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그림 그리기, 음악 연주, 춤, 연극, 글쓰기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경험을 안전하게 탐색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예술 활동은 트라우마로 인해 단절된 몸과 마음의 연결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는 단순한 행위는 우리의 감각과 운동 체계를 활성화하고, 현재 순간에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이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경험을 강화한다. 또한 예술은 트라우마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동적인 피해자에서 능동적인 창조자로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기 효능감과 통제감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술은 삶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참여를 의미한다. 예술적 삶이란 창작자이든 관람자이든, 매 순간을 감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로 경험하고, 그 경험에서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뇌의 건강과 웰빙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인간 경험으로 이어진다. 미술관을 방문하거나 음악회에 가는 것,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 - 이 모든 행위들은 단순한 취미나 여가 활동이 아니라, 우리의 뇌와 마음, 그리고 영혼을 돌보는 필수적인 영양소다. 그러므로 일상에 예술을 통합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건강하고 충만한 삶을 위한 필수 요소인 것이다. 뇌가 힘들 땐, 미술관에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 더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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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생은 불안하다 - 불안을 용기로 바꾸는 하버드 심리학 수업
루아나 마르케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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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불안은 피할 수 없는 동반자가 되었다. 우리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니라 불안에 대응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스트레스, 우울함 같은 불편한 감정이 사라지면 삶이 즉시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 뇌는 위협을 감지하면 편도체(amygdala)가 활성화되어 위험에서 도망치거나 피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생물학적 반응은 원시 시대에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메커니즘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사회적 압박이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회피하게 만든다. 회피는 단기적으로 불안을 줄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악화시킨다. 일례로 우리가 직장에서 급여 인상을 요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의 업무 역량이 완벽하지 않다고 자기 의심에 빠지고, 이로 인한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회피할수록 그 생각은 더 강하게 돌아와 부정적인 감정과 결과의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불안은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이번에 이러한 불안을 이겨내는 방안ㅇ 대해서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루아나 마르케스의 <모든 인생은 불안하다>였다. 불안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을 이겨내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저가 하버드 심리학에서 제안하는 '불안을 용기로 바꾸는 3단계 전략'은 불안과 관련된 뇌의 자동 반응에서 벗어나 삶을 변화시키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제시한다. 이 전략은 심리적 안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기술일 것 같다. 첫 번째 단계는 '전환(Shift)'으로, 불안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예측 기계처럼 작동하지만, 때로는 세상을 왜곡된 렌즈로 바라보게 한다. 이 낡은 렌즈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과정이 바로 전환이다. 전환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글쓰기다. 자신의 생각-감정-행동(TEB) 주기를 글로 작성하면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어 감정적인 반응에서 이성적인 사고로 넘어갈 수 있다. 이는 두뇌 속 스위치를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전환은 불안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바꾸는 과정이다. 왜곡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긍정적인 신념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상황을 회피하는 대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면 두뇌의 예측 기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접근(Approach)'으로,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시도하는 것dl다. 불안이 강렬할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감정적인 충동과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는 '반대 행동(opposite action)'을 통해 불편한 감정에 다가설 수 있다. 반대 행동은 변증법적 행동치료에서 활용되는 강력한 정서조절 기술이다. 이는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훈련을 통해 가능해진다. 불안을 느낄 때 오히려 그 상황에 조금씩 다가가는 작은 행동들이 모여 결국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접근 전략은 불편한 감정을 제어하면서 감정을 더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말과 행동으로 발산될 때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조절하는 행동 교정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단계는 '정렬(Align)'로, 핵심 가치와 삶의 방향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나침반인 가치를 외면하고 회피를 선택한다. 저자의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가치 대신 감정, 목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강한 회피의 감정은 생각도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하여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므로, 스스로 만든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자신만의 가치를 정의하고 그에 따라 일관성 있게 행동하면, 어떤 고통 속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찾아갈 수 있다. 정렬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가치관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용기를 내어 행동하는 것이다. 남의 기대에 맞추어 살거나 불안을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에 정렬된 삶을 살 때 진정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바위처럼 단단하게 버티지 말고 물처럼 흐르듯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감정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찾으라는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시도가 계속해서 실패로 끝난다. 물은 장애물을 만나도 그 주위를 흘러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생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완고하게 저항하기보다는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훈련'이라는 말의 의미다. 인생에서 문제와 고난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듯 고난은 어떻게든 우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회피라는 적을 항상 잘 지켜보고, 불안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 불안을 용기로 바꾸는 여정은 쉽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버티며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물처럼 흐르며 감정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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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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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궁극적 귀결점이지만, 현대 사회는 그것을 직면하기보다 은폐하고 미루는 경향이 있다. 장례라는 의례는 죽음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공적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이 있다. 책은 죽음을 둘러싼 노동의 세계와 현대 사회의 애도 방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관계와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조금은 무거운 주제의 책이다.

​장례는 더 이상 가문의 의례가 아닌 가족 행사로 변모했다. "장례의 성격이 가문의 의례에서 가족 행사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주요한 이유일 테다. 사람들은 장법을 잘 아는 호상을 필요로 하기보다 가족 행사를 매끄럽게 진행해줄 '플래너'를 원했다." 이러한 변화는 장례 산업의 전문화와 상품화를 가속화했고, '웨딩 플래너'처럼 '엔딩 플래너'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장례 문화가 더욱 축소되고 간소화되었다. "작은 빈소, 적은 문상객, 간소한 절차는 더는 불효로 상징되거나 초라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는 장례식장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고, 가족장에 맞는 작은 빈소와 무빈소 상품이 새롭게 등장했다. 장례업은 점차 산업화되어가며 서비스 노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장례지도사들은 특별한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고객과 눈을 맞출 때는 활짝 웃어서는 안 된다. 무표정도 안 된다. 여기는 슬픈 곳이니 슬픈 표정은 더욱 안 된다. 장례식장과 서비스직, 그 경계에 표정과 몸짓과 눈빛을 놓아야 한다." 이들은 사별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장례 노동은 육체적으로도 고된 일이다. 장례지도사들은 시신을 씻기고, 입관하고, 운구하는 과정에서 육체적 노동을 직접 수행한다. 특히 시신을 복원하는 작업은 세심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사라진 눈을 만들고, 부서진 코를 세우고, 눈썹마저 한 올 한 올 새로 그렸다." 시신을 대하는 노동은 또한 죽음의 물리적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시신은 당연하게도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이럴 때 시신을 물로 씻으려고 하면 피부가 다 쓸려나간다. 탈지면으로 온몸을 감싸고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죽음의 육체적 측면을 다루는 전문적 기술이다. 장례 노동의 성별화 역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관을 드는 거리는 입관실에서 장례식장 앞에 세워진 운구 버스까지이다. 그 짧은 거리마저 남성만이 관에 손을 댄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이 죽음을 다루는 노동에도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중요하다. "나는 사람이 시체로 나타났다는 사실보다 늙은 몸으로 등장한 데 더 놀랐다. 나이 듦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벗은 몸. 나는 나이 듦도 모른 채 죽음에 대해 알고자 했던 것이다." 노인들의 몸은 삶을 살아낸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살아내는 데 연료로 써버린 듯 근육과 살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러한 묘사는 노화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삶의 여정을 담은 기록임을 보여준다. 죽음의 공간은 종종 산 자의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다. "묘지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와 갈등을 빚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국에서 죽은 자의 땅 묘지와 산 자의 땅 도시의 긴장 관계는 산 자의 승리로 귀결된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묘지는 이장되거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선다. 부산 아미동의 사례는 죽은 자와 산 자의 복잡한 공존을 보여준다.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단단한 벽과 바닥이 되어주었고, 유골함이 자리했던 광중은 아궁이 역할을 했다." 이는 생존의 필요가 죽은 자를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예시이다.

모든 죽음이 동등하게 애도받지 않는다는 현실은 사회적 불평등의 또 다른 표현이다. "누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공적 지원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도 통치의 기술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도 권력이 행하는 일이다." 사회는 애도의 위계를 만든다. "사회가 애도(의 비용)를 감수하지 않는 죽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이의 죽음, 시설에서 사는 이의 죽음, 사회가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 몸을 지닌 이들의 죽음, 그리고 연고 없는 자의 죽음." 이러한 불평등은 누구의 삶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지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반영한다. 변희수 하사의 사례는 애도의 정치학을 보여준다. "애도(받을 자)의 자격을 묻는 세상에서,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애도의 위치에 놓은 것은 타인들이 보내는 안부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애도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과 장례를 둘러싼 노동, 의례,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애도의 윤리'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누구의 죽음이 애도받을 만한가가 아니라, 모든 이의 죽음을 어떻게 존엄하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장례 노동자들은 이 과정의 중요한 매개자이다. 그들은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화장장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뒤편에서 도구와 시설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같이 울어주고 손을 맞잡아주는 것만큼이나 필요한 일이다. 장례 절차가 삐걱거릴수록 사별자들은 더 많은 눈물을 쏟는다." 죽음이라는 보편적 경험 앞에서 우리는 결국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죽음에 관해 아는 유일한 한 가지는, 혼자 죽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 깨달음은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남겨진 이들이 애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국 죽음과 애도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은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모든 이의 삶과 죽음이 존중받는 사회, 죽음 앞에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의 윤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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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란 무엇인가 - 생계형 의사 양성관의 유쾌한 분투기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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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의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 편의 전쟁터를 떠올리곤 했다. 칼과 총 대신 청진기와 주사기를 들고,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매 순간 분투하는 이름 없는 전사들. <의사란 무엇인가<를 펼쳤을 때, 내 안에 무겁게 자리 잡은 이 이미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러나 양성관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무엇보다 인간적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되었다. 의사는 병만을 고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의 삶을 함께 짊어지고, 때로는 패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안내자라는 것을. 의사는 힐러이자 파이터, 설득자이자 경청자, 그리고 무엇보다 끝없이 흔들리는 인간이었다.

'하루에 80명의 환자.' 이 숫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당 고작 몇 분. 출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양성관 저자는 이상적인 진료를 꿈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치의로서 깊이 살피고, 병명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진료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그런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의료 시스템은 속도를 강요했다. 더 많은 환자, 더 빠른 진료, 더 많은 서류. 그리고 그 뒤에 묻혀버린, '사람'이라는 존재. 저자가 토로하는 현실은 뼈아팠다. 나 역시 진료실에 앉아 짧은 대화를 나누고, 처방전을 받아들고 황급히 나오면서 느꼈던 허무함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제대로 된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책 속 한 장면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던 할머니가, 교수님의 한마디와 한 번의 포옹에 눈물짓고 웃던 순간. 그 장면은 마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기적 같았다. 의사가 다루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의학적 시술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진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종종 의사를, 차가운 전문 지식의 집합체로만 본다. 병명과 치료법을 알려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기능인처럼.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몸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가진 존재다. 아픔은 신체를 넘어 영혼까지 스며든다. 진정한 의사는, 그 영혼까지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저자는 그 사실을 아프도록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좌절과 고민이 생생히 전해졌다. 실패한 삽관, 환자와의 다툼, 목숨을 구하지 못한 무력감. 의사라고 해서 늘 냉정하고 완벽할 것이라는 환상이 무너졌다. 오히려 저자는, 매일 흔들리며, 때로는 깊이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인간이었다. 특히, 실패한 시술 장면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반성하고,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왜 실패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과정. 그 과정이 있었기에, 그는 조금씩 더 나은 의사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는 더욱 빛났다.

<의사란 무엇인가>는 단지 한 개인의 성장 이야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 의료 시스템의 맨얼굴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낮은 수가, 짧은 진료시간, 필수과 붕괴, 응급실 뺑뺑이, 그리고 골든아워를 놓치는 수많은 환자들. 저자는 개인의 노력이 제도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잔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담담히 기록했다. 특히, 지혈 튜브를 건드리는 것조차 위험부담이 되어버린 현실, 환자를 살피는 것이 오히려 의사의 리스크가 되어버리는 모순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누가 헐값에 자기 목숨을 걸겠는가?'라는 절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한 사람을 살리려는 의지마저 꺾이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면, 그 시스템 자체가 변해야 하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 장면은 조용하고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 의사는 때로는 생명을 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운다.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이들의 마음을 위해서. '나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겠지.'라는 저자의 고백은 무척 인간적이었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싸우고, 때로는 비극을 함께 받아들이는 동행자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세상에는 완벽한 답이 없는 싸움도 있다는 것을, 어떤 싸움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좋은 의사는 뭘까?'라는 질문은,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실력, 친절, 공감, 사회적 시야. 저자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말했지만, 결국 그는 솔직히 고백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중이다'라고. 나는 그 겸손함에 깊이 감동했다. 완벽한 의사란 없다. 매일 흔들리고, 실수하고, 다시 다짐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 이것은 단지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다짐했다.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나도 매일 흔들리면서, 끝내 사람을 선택하는 삶을 살겠다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이 책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리고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걸, 가만히 속삭여 주었다.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인간을, 그리고 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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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천문학자들 - 천문학에 한 획을 그은 여성 과학자들
쇼히니 고스 지음, 박성래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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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실제 과학 역사에서 뛰어날 실력을 가진 여성 과학자는 많았다. 이번에 이렇게 뛰어난 결과와 업적을 남겼으나, 사회적 편견과 관습으로 알려지지 낳은 여성들의 활약상을 알아볼 수 있는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쇼히니 고스의 <지워진 천문학자들>이었다. 천문학 역사 뿐만아니라 원자력 분야 들에서 활약한 여성들의 인생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별과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여성 과학자들의 고독하고 찬란한 여정을 알 수 있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우주에 압도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도 규칙을 찾아내고,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세워 별들을 이해해왔다. 인간은 무한한 것에 이름을 붙이며 이해를 시도하는 존재다. 그 노력의 한복판에는 자주 조명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천문학과 물리학, 방사선 연구에 깊은 흔적을 남겼지만, 긴 시간 동안 잊혀져야 했던 여성 과학자들. 그들은 캄캄한 시대를 뚫고 별처럼 빛났다.

애니 점프 캐넌(Annie Jump Cannon) – 별들에게 질서를 부여한 여성이다. 천문학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익히 들었을 것이다. 애니 점프 캐넌은 1863년 미국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청각을 점점 잃어가는 불편 속에서도 하버드 대학 천문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별 분류 체계를 완성한 천문학자였다. 19세기 말, 천문학계는 별의 스펙트럼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관측 자료는 방대했지만, 이를 통합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니는 하버드 천문대장 에드워드 찰스 피커링 아래서 '하버드 컴퓨터'라 불리던 여성 보조요원 팀에 합류한다. 그녀의 동료로는 윌리어미나 플레밍, 안토니아 모리 등이 있었지만, 캐넌은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는 존재였다. 캐넌은 수십만 장에 달하는 사진 건판 속 별들의 스펙트럼을 하나하나 분류하며, O, B, A, F, G, K, M이라는 별의 분류 체계를 만들어냈다. O형 별이 가장 뜨겁고 푸르며, M형 별은 가장 차갑고 붉다. 이 체계는 “Oh, Be A Fine Girl, Kiss Me”라는 문구로 외우는 것이 전통이 될 정도로, 오늘날까지 천문학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단순히 분류만 한 것이 아니다. 캐넌은 별빛을 통해 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오만 건이 넘는 별을 손수 분류했고, 300,000개가 넘는 별들의 스펙트럼을 기록했다. 그 노력은 결국 "헨리 드레이퍼 목록(Henry Draper Catalogue)"이라는, 천문학계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업적으로 완성되었다

리에타 스완 레빗(Henrietta Swan Leavitt) – 우주의 거리 자를 만들어낸 여성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천문학자이기도 하다. 헨리에타 레빗은 어려서부터 학구열이 뛰어났던 그녀는 라드클리프 칼리지에서 천문학을 공부했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별이다. 레빗은 수백 개의 변광성을 관측하면서 놀라운 패턴을 발견한다. 바로, 변광성의 밝기가 클수록 그 밝고 어두운 변동 주기가 길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이 '주기-광도 관계'는 천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우리는 별빛만 보고 별까지의 거리를 알 수 없었지만, 세페이드 변광성 덕분에 처음으로 "표준 촉광(standard candle)"을 얻게 되었다. 거리 모를 외부 은하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발견하면, 그 주기만 측정해 실제 밝기를 알 수 있고, 그로부터 거리를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발견은 에드윈 허블에게 결정적 도구를 제공했다. 허블은 이 방법을 이용해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 은하와는 별개의 독립된 은하임을 증명해냈고, 결국 '우주는 팽창한다'는 대발견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 발견의 출발점은 바로 레빗의 조용하고 집요한 관찰 덕분이었다.

마리 퀴리(Marie Curie) –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파헤친 과학의 성녀다. 마리 퀴리, 원래 이름은 마리아 스쿼도프스카(Maria Sklodowska). 그녀는 우라늄 광석에서 미지의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그 이름을 폴로늄(Polonium), 그리고 또 다른 원소를 라듐(Radium)이라 명명했다. 이는 당시 원자 구조에 대한 모든 개념을 뒤흔드는 발견이었다. 그녀는 1903년, 남편 피에르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과학의 역사에는 늘 이름이 남는다.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 허블. 하지만 수많은 여성 과학자들의 이름은 그 뒤편에 묻혀 있었다. 그들은 천문학을 정리했고, 우주의 크기를 잴 수 있게 했고, 보이지 않는 방사선을 밝혔고, 생명의 설계도를 새롭게 썼지만, 역사는 그들의 공로를 지우거나, 축소하거나, 다른 이들의 그림자에 가리게 했다. 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되찾아야 하는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과학은 진리의 탐구다. 그리고 진리에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애니 캐넌이 별의 노래를 정리했을 때, 헨리에타 레빗이 변광성에 숨겨진 수학적 규칙을 풀어냈을 때, 마리 퀴리가 보이지 않는 방사능을 측정했을 때, 커털린 커리코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mRNA 메시지를 해독했을 때, 비브하 초우두리가 입자 우주의 새로운 지도를 그렸을 때 —그들은 모두 인류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과학은 단 한 사람의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수한 보이지 않는 이들의 손길, 집요한 관찰, 견뎌낸 고독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세상이 기억하기를 거부했던 여성들이었다. 별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그 빛을 보려면, 우리는 더 이상 눈을 감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업적을, 그들의 고독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과학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공정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강연 마무리가 생각난다. (Occasionally, Brillant Astronomers Fuel Growing Kid's M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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