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대체 왜 눈치를 볼까 -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 원하는 삶을 사는 법 ㅣ 나는 도대체
케리 올리치.켈리 권터 지음, 김잔디 옮김 / 북플레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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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눈치는 원래 나쁜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섬세한 사회적 감각이다. 문제는 이 감각이 방향을 잃을 때 생긴다. 타인의 기대를 읽는 데만 온 신경을 쏟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진다. 부모의 기대, 배우자의 시선,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 이런 것들에 맞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삶과 남들이 기대하는 삶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케리가 심리학 박사 학위를 꿈꾸면서도 오랫동안 지원을 미뤘던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이 만들어낸 안전한 선택지에 안주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눈치가 지나치면 그것은 더 이상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책의 목차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저자들이 눈치 문화를 개인의 소심함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 시스템의 문제로 다룬다는 것이었다. 부모, 종교, 성 역할, 출신과 배경, 결혼, 직업, 우리가 눈치를 보는 대상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오래된 것들이다. 나 역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선택을 망설일 때 그 뒤에는 늘 특정한 얼굴들이 있었다. "그 나이에 아직도?", "안정적인 직장을 두고 왜?"라는 상상 속의 질문들. 그것들은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던진 말이 아니라, 내가 미리 상상하고 두려워한 반응일 때가 더 많았다. 결국 내가 눈치를 보는 대상은 특정한 타인이라기보다, 내면화된 기대의 총합이었던 셈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가둔 것이 세상 전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난 두려움이라면, 적어도 그 두려움과는 협상해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남았던 대목은 "자기 확신은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자신감이란 어느 순간 완성되어 평생 유지되는 상태라고 착각해왔다. 그래서 스스로 흔들릴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자존감이 낮을까"라는 자책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삶의 굴곡마다 자기 신뢰가 흔들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관점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뒤에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자기비판을 과학자처럼 다루라는 조언도 실용적이었다. 근거 없는 자기 의심에 빠질 때,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그동안 이뤄낸 것들을 데이터처럼 하나씩 나열해보는 것. 이는 눈치라는 감정적 반응에 이성적인 제동장치를 다는 방법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내가 가장 눈치를 많이 봤던 영역은 진로와 관계였다. 남들이 인정할 만한 직업, 남들이 이해할 만한 선택을 좇느라, 정작 내가 흥미를 느끼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인터뷰 속 켈리가 테니스를 사랑하지만 프로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이 자기 확신을 꺾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좋은 균형점을 보여준다. 자기 신뢰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인식한 채로도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다. 이것이야말로 눈치 문화에서 벗어나는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남들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는 대신, 나 자신의 데이터로 나를 이해하는 것.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배우는 태도,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 곁에 머무는 것, 그리고 내가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잊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눈치가 아닌 자기 확신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연습이다.


눈치를 완전히 버리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관계 속에서 조율하는 감각은 여전히 소중하다. 다만 그 감각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내 안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이 글을 통해 다시 느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시도하지 않아서 영영 알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 붙잡아도, 오늘의 작은 용기 하나쯤은 낼 수 있을 것 같다. 완벽하게 눈치 보지 않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눈치와 나 자신의 목소리 사이에서 더 자주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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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종말 - 우리 세대는 어떻게 노력의 의미를 잃게 되었는가
올리비에 바보 지음, 이나래 옮김 / 더웨이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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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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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바보(Olivier Babeau)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이상하게도 반박하고 싶은 마음보다 먼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지적하는 "노력의 상실"이라는 진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하루하루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스크롤 한 번으로 웃음을 얻고,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영상으로 시간을 채우고, 선택이 어려우면 후기와 별점에 판단을 맡기는 삶. 그것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채은 불편할 만큼 명료하게 보여준다.


바보가 인류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강조하는 것은 단순하다. 인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력 없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 생존을 위해서든,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든,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기술 문명은 그 오래된 방정식을 깨뜨렸다. 사냥 없이 포만감을 얻고, 구애 없이 쾌락을 얻고, 공동체의 의례를 거치지 않고도 소속감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보상들이 가짜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애초에 "노력 후에 오는 보상"이라는 회로로 설계되어 있었다는 데 있다. 노력 없는 보상은 뇌에게는 낯선 신호이고, 그 낯선 신호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우리는 서서히 노력할 이유 자체를 망각해간다. 내 스스로의 소비 습관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사기 전에 후기를 열 개쯤 읽고, 인플루언서의 추천을 확인하고서야 지갑을 연다. 겉보기엔 신중한 소비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스로 판단하는 수고를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에 가깝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누군가에게 영향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일이다. 나는 내 취향, 내 기준, 내 실패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얼마나 잃어버렸는가. 선택지가 무한히 늘어난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근육을 잃어가고 있다.


이 진단이 개인의 습관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글은 이것이 사회 전체의 현상임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학업을 쉽게 포기하는 학생들, 하향 평준화된 학교 교육, 예의와 인내심의 퇴조, 감정과 즉흥적 반응이 이성적 숙고를 대체해버린 공적 담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물질적 풍요가 역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젊은 세대의 행복감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는 통계였다. 안전과 행복이 반비례한다는 이 역설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발전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더해지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학생이 제출한 과제가 더 이상 그 학생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 역시 글을 쓰거나 정보를 찾을 때 도구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도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편리함에 기대어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결과물은 얻되 그 과정에서 마땅히 형성되었어야 할 사고력과 인내심을 잃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처럼 평생을 관찰하고 고쳐 쓰는 대신, 완성된 답을 즉시 손에 쥐는 세대가 과연 무엇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보의 논의가 단순한 세대 비판이나 향수 어린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안도했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과거가 더 나았던 것이 아니다. 노예제, 신분의 굴레, 짧은 수명, 끝없는 육체노동 속에서 살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예전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노력과 보상 사이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어떻게 의식적으로 되살릴 것인가에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태도의 문제다. 노력을 찬양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이들을 단죄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노력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에는 분명 운과 시대적 조건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 운을 붙잡을 준비, 즉 스스로를 갈고닦는 일만큼은 오롯이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 복권을 사지 않고는 당첨을 바랄 수 없듯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는 기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방향의 문제다. 노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방향 없는 노력은 소진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 글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지점, 즉 자신만의 열정과 규율, 스스로 세운 목표에서 노력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나에게 노력이란 결국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행위다. 그 거리를 인정하고 견디는 일이야말로, 즉각적인 만족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을 만들어낸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정말로 "애써서" 이룬 것이 있었는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손쉬운 자극과 편리한 대체물로 채우며 흘려보냈는가. 솔직히 답하기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내 안 어딘가에 노력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게으름의 시대"라는 진단은 무섭지만, 동시에 하나의 초대장이기도 하다. 편리함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에 잠식되지 않을 나만의 영역을 지키자는 초대.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스크롤 대신 책을, 즉답 대신 스스로의 사유를 선택하는 일. 그 작은 저항에서부터, 잃어버렸던 노력의 감각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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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야? 파이썬 데이터 모델링 & 머신러닝 - 동영상 강의로 배우는 실전 데이터 분석법(핵심노트+오픈채팅+유튜브)
윤영빈.오환.이용희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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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자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할지 몰라 헤매던 처지에서, 최소한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도를 얻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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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 인간 - 그들의 다크 심리를 무력화하는 7가지 심리 전략
리앤 텐 브링크 지음, 김효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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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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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특정한 얼굴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들이었다. 분명 상처를 받았는데도 "내가 예민한 건가" 하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순간, 분명히 무례한 말을 들었는데 상대는 여전히 웃고 있어서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던 순간들. 레안 텐 브링크는 그런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 준다. 심리학은 이런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언어가 아니라, 정신병질성, 나르시시즘, 마키아벨리즘, 가학성이라는 네 가지 특성이 겹쳐진 "다크 테트라드"라는 좀 더 차갑고 분석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특성들이 소수의 특별한 괴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 안에 조금씩 있다는 설명은 가장 먼저 나를 멈춰 세운 대목이었다.


나는 그동안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누군가를 단정 짓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이 특성들이 외향성이나 개방성처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는 성향이라는 설명을 읽으니,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더 정교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고 끝내는 대신, 그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얼마나 일관되게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것. 그것이 감정을 앞세운 판단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을 이 글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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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첫인상과 진짜 성격 사이의 시간차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르시시즘이 높은 사람일수록 처음 만났을 때는 유독 자신감 있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는, 왜 우리가 그렇게 자주 속는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확신에 찬 태도를 실제 능력과 혼동한다. 취업 면접에서든 연애의 초반이든, 스스로를 확신 있게 포장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저 사람은 뭔가를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쉽게 믿어 버린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가 존경했던 몇몇 사람들을 다시 떠올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실은 자기 확신만 강할 뿐 다른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경험. 그때 나는 그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뒤늦게 제대로 보게 된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크게 다가온 개념은 단연 "트리클다운 다크니스", 즉 한 사람의 어두운 성향이 조직과 가정으로 흘러내려 가는 현상이었다. 정신병질성이 높은 상사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안고 퇴근해서, 정작 아무 잘못도 없는 배우자와 아이에게 짜증을 낸다는 설명은 단순한 통계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사람의 나쁜 행동은 그 사람과 직접 부딪힌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번져 간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성격이 얼마나 넓은 반경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동시에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던지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지금 어떤 스트레스를, 누구에게, 왜 흘려보내고 있는가. 그 스트레스의 진짜 근원은 어디인가.


현실적으로 다가온 조언은 "그 사람을 사랑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텐 브링크는 이것을 "너의 문제이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한다. 다크 테트라드 성향이 높은 사람은 대개 자신의 행동으로 원하는 것을 이미 얻고 있기 때문에, 굳이 변화할 동기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냉정하게 들리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 나는 관계가 어긋날 때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참고 이해해 주면 저 사람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붙잡고 있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 변화의 동기는 결국 상대방 안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내 인내심의 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를 끝내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죄책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남은 것은 특정 인물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자신감과 능력을 혼동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의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나와 무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어떤 관계에서, 매몰 비용 때문에 이미 답이 나온 결정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텐 브링크의 말대로, 이런 사람들을 알아보는 일은 결국 그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잘 아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첫인상에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패턴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함께 빌려 오는 것. 그것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오래갈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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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만든 천재들 - 광기와 창조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마리오 데 라 피에드라 월터 지음, 성소희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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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리가 오랫동안 '천재'라는 단어에 얼마나 낭만적인 안개를 씌워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뇌전증, 반 고흐의 정신질환, 칸딘스키의 공감각, 실비아 플라스의 우울증. 이런 이름들을 나열하면 자연스럽게 '광기와 천재성은 한 뿌리에서 자란다'는 오래된 통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신화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들의 천재성은 질병 '덕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질병에도 '불구하고' 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구분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축이라고 느껴졌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어떤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고통받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소비할 때, 그 고통 자체를 미화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정신병을 앓았기에 그런 걸작이 나왔다'는 식의 서사는 듣는 사람에게는 매혹적이지만, 실제로 그 고통을 살아낸 당사자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이 책은 계속 상기시킨다. 신경학자인 저자가 임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것이 '거의 뇌졸중 환자들'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예술사 속 인물들이 실험실의 표본이 아니라 실제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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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부분은 안톤 레더샤이트와 오토 딕스처럼 편측무시(반측 공간 무시) 증후군을 겪은 화가들의 이야기였다. 뇌졸중으로 인해 세계의 절반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사람이,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예술이 단순히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구성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뇌가 인식하는 현실이 왜곡되었을 때, 그 왜곡된 현실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증언이 된다. 예술이 현실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드러낸다는 저자의 관점은, 뇌과학과 미학을 잇는 가장 설득력 있는 다리였다.


마틴 라미레스의 이야기 또한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정신병원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어떤 미술 교육도 받지 못한 채로, 오직 표현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충동만으로 방대한 작품을 남긴 사람. 그는 멕시코 예술의 전통에도, 미국 예술계의 어떤 흐름에도 속하지 못한 채 홀로 존재했다. 이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개념을 접하면서 나는 예술을 평가하는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제도와 계보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라미레스의 그림은 어떤 미술사조에도 속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순수하게 '인간이 표현하려는 원초적 욕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저자가 강조하듯, 이런 주변부의 예술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신경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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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와 기억, 망각에 대한 장 역시 깊은 여운을 남겼다. 실명이라는 절망 앞에서 그는 오히려 기억과 시어(詩語)로 도피하지 않고 맞섰다. 그에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심지어 굴욕과 불행조차 예술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는 태도는 단순한 긍정주의가 아니라, 한계를 다루는 하나의 방법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흔히 한계를 극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만, 보르헤스는 한계를 '재료'로 바라보았다. 이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이 책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LLM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과 창의성에 관한 논의도 개인적으로 가장 시의적절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인공지능이 예술가를 대체하기보다는 그 존재만으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고 본다. 콜링우드의 미학 이론, 즉 창작이란 감정을 명료하게 하고 형태를 부여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용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언어로 묘사하는 행위만으로는 진정한 발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곱씹을 만하다. 인간과 도구의 경계가 비교적 명확했던 과거와 달리,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는 그 경계가 흐려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위협이 아니라 하나의 '틈'으로 본다. 사진의 발명이 회화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회화를 재현의 의무에서 해방시켰듯, 인공지능도 예술가들에게 기계가 다다를 수 없는 영역, 즉 신체화된 고통과 결핍, 구체적인 생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으로 더 깊이 파고들 여지를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결핍'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결핍을 채워야 할 구멍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그 구멍을 메우려 하기보다, 그 구멍의 모양 자체를 작품의 형식으로 삼았다. 뇌전증이 만들어낸 도스토옙스키의 숭고함에 대한 감각, 공감각이 만들어낸 칸딘스키의 색채 언어, 편측무시가 만들어낸 딕스의 왜곡된 구도. 이들은 모두 자신의 뇌가 세상을 인식하는 고유한 방식을 부정하지 않고, 그 방식을 그대로 언어화했다. 정신질환은 낭만화될 대상이 아니라 이해받고 치료받아야 할 고통이며, 동시에 그 사람이 세상을 지각하는 고유한 방식은 존중받아야 할 다양성이라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니는 균형 감각이야말로 신경다양성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나 역시 앞으로 누군가의 '다름'을 마주할 때, 그것을 결함으로 재단하기 전에 그 사람만이 가진 지각의 결을 먼저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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