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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종말 - 우리 세대는 어떻게 노력의 의미를 잃게 되었는가
올리비에 바보 지음, 이나래 옮김 / 더웨이브 / 2026년 7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올리비에 바보(Olivier Babeau)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이상하게도 반박하고 싶은 마음보다 먼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지적하는 "노력의 상실"이라는 진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하루하루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스크롤 한 번으로 웃음을 얻고,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영상으로 시간을 채우고, 선택이 어려우면 후기와 별점에 판단을 맡기는 삶. 그것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채은 불편할 만큼 명료하게 보여준다.
바보가 인류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강조하는 것은 단순하다. 인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력 없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 생존을 위해서든,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든,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기술 문명은 그 오래된 방정식을 깨뜨렸다. 사냥 없이 포만감을 얻고, 구애 없이 쾌락을 얻고, 공동체의 의례를 거치지 않고도 소속감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보상들이 가짜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애초에 "노력 후에 오는 보상"이라는 회로로 설계되어 있었다는 데 있다. 노력 없는 보상은 뇌에게는 낯선 신호이고, 그 낯선 신호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우리는 서서히 노력할 이유 자체를 망각해간다. 내 스스로의 소비 습관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사기 전에 후기를 열 개쯤 읽고, 인플루언서의 추천을 확인하고서야 지갑을 연다. 겉보기엔 신중한 소비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스로 판단하는 수고를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에 가깝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누군가에게 영향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일이다. 나는 내 취향, 내 기준, 내 실패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얼마나 잃어버렸는가. 선택지가 무한히 늘어난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근육을 잃어가고 있다.
이 진단이 개인의 습관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글은 이것이 사회 전체의 현상임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학업을 쉽게 포기하는 학생들, 하향 평준화된 학교 교육, 예의와 인내심의 퇴조, 감정과 즉흥적 반응이 이성적 숙고를 대체해버린 공적 담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물질적 풍요가 역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젊은 세대의 행복감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는 통계였다. 안전과 행복이 반비례한다는 이 역설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발전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더해지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학생이 제출한 과제가 더 이상 그 학생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 역시 글을 쓰거나 정보를 찾을 때 도구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도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편리함에 기대어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결과물은 얻되 그 과정에서 마땅히 형성되었어야 할 사고력과 인내심을 잃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처럼 평생을 관찰하고 고쳐 쓰는 대신, 완성된 답을 즉시 손에 쥐는 세대가 과연 무엇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보의 논의가 단순한 세대 비판이나 향수 어린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안도했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과거가 더 나았던 것이 아니다. 노예제, 신분의 굴레, 짧은 수명, 끝없는 육체노동 속에서 살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예전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노력과 보상 사이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어떻게 의식적으로 되살릴 것인가에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태도의 문제다. 노력을 찬양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이들을 단죄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노력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에는 분명 운과 시대적 조건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 운을 붙잡을 준비, 즉 스스로를 갈고닦는 일만큼은 오롯이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 복권을 사지 않고는 당첨을 바랄 수 없듯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는 기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방향의 문제다. 노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방향 없는 노력은 소진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 글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지점, 즉 자신만의 열정과 규율, 스스로 세운 목표에서 노력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나에게 노력이란 결국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행위다. 그 거리를 인정하고 견디는 일이야말로, 즉각적인 만족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을 만들어낸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정말로 "애써서" 이룬 것이 있었는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손쉬운 자극과 편리한 대체물로 채우며 흘려보냈는가. 솔직히 답하기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내 안 어딘가에 노력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게으름의 시대"라는 진단은 무섭지만, 동시에 하나의 초대장이기도 하다. 편리함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에 잠식되지 않을 나만의 영역을 지키자는 초대.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스크롤 대신 책을, 즉답 대신 스스로의 사유를 선택하는 일. 그 작은 저항에서부터, 잃어버렸던 노력의 감각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