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
페마 초드론 지음, 신동숙 옮김 / 윌마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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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늘 확실한 것을 원한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언제 끝날지 미리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페마 초드론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반대의 태도, 즉 불확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오히려 진짜 평온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가 자신의 생각, 감정, 문제를 지나치게 견고한 실체로 여긴다는 지적이었다. 명상 중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하나를 붙잡아 이야기로 엮다 보면, 어느새 그 이야기가 곧 '나'라고 믿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 생각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조차 명확히 짚어낼 수 없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는 순간을 정확히 집어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흐름에 이름을 붙이고 '이것이 나의 고통이다', '이것이 나의 문제다'라고 굳혀버린다. 이 굳히는 습관이야말로 괴로움을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책은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세 가지 독, 즉 갈망과 혐오, 그리고 무지로 설명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 무언가를 밀어내려는 마음, 그리고 그 둘 다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넘어가는 마음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가지를 없애려고 애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오히려 그 감정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 우리의 지혜와 자비가 깨어날 씨앗이 있다고 한다. 힘든 감정을 피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 그것이 이른바 전사(戰士)의 마음, 즉 보디사트바의 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마음에 남은 개념은 '고독을 대하는 여섯 가지 태도'였다. 우리는 흔히 외로움을 적으로 여기고 그것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책은 그 외로움 안에 가만히 머무르는 법을 이야기한다. 무언가로 기분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 도피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불필요한 자극을 좇지 않는 것, 매 순간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것, 있는 그대로의 상황과 직접 마주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대화의 동반자를 더 이상 찾지 않는 것. 이 여섯 가지를 읽으며 나는 스마트폰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잠깐의 정적도 견디지 못하고 무언가로 그 틈을 메우려 했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고독을 적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날씨처럼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자유로워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축은 '보디치타', 즉 깨어난 자비의 마음이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본래 있는 마음이라고 한다. 다만 우리가 두려움과 방어 때문에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통렌 수행, 즉 고통을 들이쉬고 안도감을 내쉬는 훈련은 이 자비의 마음을 실제로 연습하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결국 타인의 아픔을 밀어내지 않고 나의 아픔처럼 받아들이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매우 인간적인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힘든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런데 통렌은 그 반대의 방향, 즉 오히려 그 아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라고 말한다.


모든 가르침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삶이 원래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우리는 대개 확실함을 손에 넣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책은 그 반대를 이야기한다. 불확실함과 싸우는 대신 그것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는 체념이나 포기와는 다르다. 오히려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유연함과 용기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태도에 가깝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거창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힘든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곧바로 밀어내거나 이야기로 굳히기보다,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보려는 작은 시도를 하게 되었다.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내 감정과 생각을 조금 더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결국 이 가르침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창한 초월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불확실함과 조금씩 화해해나가는 아주 소박하고 꾸준한 연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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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대체 왜 눈치를 볼까 -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 원하는 삶을 사는 법 ㅣ 나는 도대체
케리 올리치.켈리 권터 지음, 김잔디 옮김 / 북플레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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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눈치는 원래 나쁜 것이 아니었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섬세한 사회적 감각이다. 문제는 이 감각이 방향을 잃을 때 생긴다. 타인의 기대를 읽는 데만 온 신경을 쏟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진다. 부모의 기대, 배우자의 시선,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 이런 것들에 맞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삶과 남들이 기대하는 삶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케리가 심리학 박사 학위를 꿈꾸면서도 오랫동안 지원을 미뤘던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이 만들어낸 안전한 선택지에 안주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눈치가 지나치면 그것은 더 이상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책의 목차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저자들이 눈치 문화를 개인의 소심함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 시스템의 문제로 다룬다는 것이었다. 부모, 종교, 성 역할, 출신과 배경, 결혼, 직업, 우리가 눈치를 보는 대상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오래된 것들이다. 나 역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선택을 망설일 때 그 뒤에는 늘 특정한 얼굴들이 있었다. "그 나이에 아직도?", "안정적인 직장을 두고 왜?"라는 상상 속의 질문들. 그것들은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던진 말이 아니라, 내가 미리 상상하고 두려워한 반응일 때가 더 많았다. 결국 내가 눈치를 보는 대상은 특정한 타인이라기보다, 내면화된 기대의 총합이었던 셈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가둔 것이 세상 전체가 아니라, 내 안에서 자라난 두려움이라면, 적어도 그 두려움과는 협상해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남았던 대목은 "자기 확신은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자신감이란 어느 순간 완성되어 평생 유지되는 상태라고 착각해왔다. 그래서 스스로 흔들릴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자존감이 낮을까"라는 자책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삶의 굴곡마다 자기 신뢰가 흔들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관점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뒤에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자기비판을 과학자처럼 다루라는 조언도 실용적이었다. 근거 없는 자기 의심에 빠질 때,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그동안 이뤄낸 것들을 데이터처럼 하나씩 나열해보는 것. 이는 눈치라는 감정적 반응에 이성적인 제동장치를 다는 방법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내가 가장 눈치를 많이 봤던 영역은 진로와 관계였다. 남들이 인정할 만한 직업, 남들이 이해할 만한 선택을 좇느라, 정작 내가 흥미를 느끼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인터뷰 속 켈리가 테니스를 사랑하지만 프로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이 자기 확신을 꺾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좋은 균형점을 보여준다. 자기 신뢰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인식한 채로도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다. 이것이야말로 눈치 문화에서 벗어나는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남들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는 대신, 나 자신의 데이터로 나를 이해하는 것.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배우는 태도,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 곁에 머무는 것, 그리고 내가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잊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눈치가 아닌 자기 확신으로 삶의 방향을 정하는 연습이다.


눈치를 완전히 버리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관계 속에서 조율하는 감각은 여전히 소중하다. 다만 그 감각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내 안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이 글을 통해 다시 느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시도하지 않아서 영영 알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 붙잡아도, 오늘의 작은 용기 하나쯤은 낼 수 있을 것 같다. 완벽하게 눈치 보지 않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눈치와 나 자신의 목소리 사이에서 더 자주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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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종말 - 우리 세대는 어떻게 노력의 의미를 잃게 되었는가
올리비에 바보 지음, 이나래 옮김 / 더웨이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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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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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바보(Olivier Babeau)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이상하게도 반박하고 싶은 마음보다 먼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지적하는 "노력의 상실"이라는 진단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하루하루의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스크롤 한 번으로 웃음을 얻고,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영상으로 시간을 채우고, 선택이 어려우면 후기와 별점에 판단을 맡기는 삶. 그것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채은 불편할 만큼 명료하게 보여준다.


바보가 인류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강조하는 것은 단순하다. 인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력 없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 생존을 위해서든,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든,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기술 문명은 그 오래된 방정식을 깨뜨렸다. 사냥 없이 포만감을 얻고, 구애 없이 쾌락을 얻고, 공동체의 의례를 거치지 않고도 소속감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보상들이 가짜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애초에 "노력 후에 오는 보상"이라는 회로로 설계되어 있었다는 데 있다. 노력 없는 보상은 뇌에게는 낯선 신호이고, 그 낯선 신호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우리는 서서히 노력할 이유 자체를 망각해간다. 내 스스로의 소비 습관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사기 전에 후기를 열 개쯤 읽고, 인플루언서의 추천을 확인하고서야 지갑을 연다. 겉보기엔 신중한 소비처럼 보이지만, 실은 스스로 판단하는 수고를 남에게 떠넘기는 행위에 가깝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누군가에게 영향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일이다. 나는 내 취향, 내 기준, 내 실패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얼마나 잃어버렸는가. 선택지가 무한히 늘어난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는 근육을 잃어가고 있다.


이 진단이 개인의 습관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글은 이것이 사회 전체의 현상임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학업을 쉽게 포기하는 학생들, 하향 평준화된 학교 교육, 예의와 인내심의 퇴조, 감정과 즉흥적 반응이 이성적 숙고를 대체해버린 공적 담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물질적 풍요가 역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젊은 세대의 행복감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는 통계였다. 안전과 행복이 반비례한다는 이 역설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발전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균열을 낸다. 여기에 인공지능이 더해지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학생이 제출한 과제가 더 이상 그 학생의 사유의 산물이 아니게 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 역시 글을 쓰거나 정보를 찾을 때 도구의 도움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도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편리함에 기대어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결과물은 얻되 그 과정에서 마땅히 형성되었어야 할 사고력과 인내심을 잃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처럼 평생을 관찰하고 고쳐 쓰는 대신, 완성된 답을 즉시 손에 쥐는 세대가 과연 무엇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보의 논의가 단순한 세대 비판이나 향수 어린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 안도했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과거가 더 나았던 것이 아니다. 노예제, 신분의 굴레, 짧은 수명, 끝없는 육체노동 속에서 살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예전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노력과 보상 사이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어떻게 의식적으로 되살릴 것인가에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태도의 문제다. 노력을 찬양하는 것이 노력하지 않는 이들을 단죄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노력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노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에는 분명 운과 시대적 조건이 작용한다. 하지만 그 운을 붙잡을 준비, 즉 스스로를 갈고닦는 일만큼은 오롯이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 복권을 사지 않고는 당첨을 바랄 수 없듯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는 기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방향의 문제다. 노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방향 없는 노력은 소진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 글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지점, 즉 자신만의 열정과 규율, 스스로 세운 목표에서 노력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조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나에게 노력이란 결국 "지금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행위다. 그 거리를 인정하고 견디는 일이야말로, 즉각적인 만족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을 만들어낸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정말로 "애써서" 이룬 것이 있었는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손쉬운 자극과 편리한 대체물로 채우며 흘려보냈는가. 솔직히 답하기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내 안 어딘가에 노력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게으름의 시대"라는 진단은 무섭지만, 동시에 하나의 초대장이기도 하다. 편리함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에 잠식되지 않을 나만의 영역을 지키자는 초대.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스크롤 대신 책을, 즉답 대신 스스로의 사유를 선택하는 일. 그 작은 저항에서부터, 잃어버렸던 노력의 감각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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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야? 파이썬 데이터 모델링 & 머신러닝 - 동영상 강의로 배우는 실전 데이터 분석법(핵심노트+오픈채팅+유튜브)
윤영빈.오환.이용희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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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자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을 먼저 공부해야 할지 몰라 헤매던 처지에서, 최소한 ‘지금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도를 얻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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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 인간 - 그들의 다크 심리를 무력화하는 7가지 심리 전략
리앤 텐 브링크 지음, 김효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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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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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특정한 얼굴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들이었다. 분명 상처를 받았는데도 "내가 예민한 건가" 하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순간, 분명히 무례한 말을 들었는데 상대는 여전히 웃고 있어서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던 순간들. 레안 텐 브링크는 그런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 준다. 심리학은 이런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언어가 아니라, 정신병질성, 나르시시즘, 마키아벨리즘, 가학성이라는 네 가지 특성이 겹쳐진 "다크 테트라드"라는 좀 더 차갑고 분석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특성들이 소수의 특별한 괴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 안에 조금씩 있다는 설명은 가장 먼저 나를 멈춰 세운 대목이었다.


나는 그동안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누군가를 단정 짓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이 특성들이 외향성이나 개방성처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는 성향이라는 설명을 읽으니,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더 정교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고 끝내는 대신, 그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다양한 상황에서, 얼마나 일관되게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것. 그것이 감정을 앞세운 판단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사실을 이 글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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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첫인상과 진짜 성격 사이의 시간차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르시시즘이 높은 사람일수록 처음 만났을 때는 유독 자신감 있고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는, 왜 우리가 그렇게 자주 속는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확신에 찬 태도를 실제 능력과 혼동한다. 취업 면접에서든 연애의 초반이든, 스스로를 확신 있게 포장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저 사람은 뭔가를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쉽게 믿어 버린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가 존경했던 몇몇 사람들을 다시 떠올렸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실은 자기 확신만 강할 뿐 다른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경험. 그때 나는 그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뒤늦게 제대로 보게 된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크게 다가온 개념은 단연 "트리클다운 다크니스", 즉 한 사람의 어두운 성향이 조직과 가정으로 흘러내려 가는 현상이었다. 정신병질성이 높은 상사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안고 퇴근해서, 정작 아무 잘못도 없는 배우자와 아이에게 짜증을 낸다는 설명은 단순한 통계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사람의 나쁜 행동은 그 사람과 직접 부딪힌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번져 간다는 사실은, 한 사람의 성격이 얼마나 넓은 반경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동시에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던지는 질문이 되었다. 나는 지금 어떤 스트레스를, 누구에게, 왜 흘려보내고 있는가. 그 스트레스의 진짜 근원은 어디인가.


현실적으로 다가온 조언은 "그 사람을 사랑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텐 브링크는 이것을 "너의 문제이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한다. 다크 테트라드 성향이 높은 사람은 대개 자신의 행동으로 원하는 것을 이미 얻고 있기 때문에, 굳이 변화할 동기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냉정하게 들리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 나는 관계가 어긋날 때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참고 이해해 주면 저 사람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붙잡고 있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 변화의 동기는 결국 상대방 안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내 인내심의 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를 끝내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죄책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남은 것은 특정 인물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자신감과 능력을 혼동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의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이 나와 무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리고 나는 어떤 관계에서, 매몰 비용 때문에 이미 답이 나온 결정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텐 브링크의 말대로, 이런 사람들을 알아보는 일은 결국 그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잘 아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첫인상에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고, 패턴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함께 빌려 오는 것. 그것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오래갈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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