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견하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법
챠오쟈 지음, 이에스더 옮김 / 알토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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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늘을 나로 살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는 이 작은 선택들의 연속이다. 출근길에 만난 동료의 무심한 한마디, 회의 시간에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 SNS에서 본 누군가의 화려한 일상.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문제는 우리가 그 흔들림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라는 설렘보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들을까'라는 불안이 먼저 찾아온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저울 위에 매일 아침 자신을 올려놓고, 그 눈금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들리지 않는 삶이란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감정을 차단하며 사는 것일까, 아니면 흔들림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일까. 이 글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 가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슬퍼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성숙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눈물을 삼키고, 분노를 감추고, 외로움을 부정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수면 아래 가라앉은 얼음덩어리처럼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침전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사소한 일에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엉뚱하게 화를 내거나,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에 빠지는 순간들. 이 모든 것은 억눌린 감정이 보내는 신호다. 진짜 문제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틀렸다'고 판단하는 우리의 태도다. '나만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이 정도 가지고 왜 이러지'라는 자책은 감정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흔들림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 '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어, '나는 인정받고 싶었던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그 순간, 감정은 나를 압도하는 폭풍이 아니라 내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감정과 나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다.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파도를 피할 수 없다면, 파도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서핑을 하는 사람들은 파도와 싸우지 않는다. 파도의 리듬을 읽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되, 중심은 잃지 않는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나가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은 역설적이게도 '너와 나'를 분명히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흐려짐이 나 자신을 지우는 것으로 이어 질 때다. '이 사람을 잃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일 수 있다. '이 사람 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우선한다면, 관계는 이미 균형을 잃은 것이다. 상대의 감정이 곧 나의 책임이 되고, 상대의 기분이 곧 나의 가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기 시작한다. 건강한 관계는 두 개의 온전한 개인이 만나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온전할 때, 비로소 상대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자신을 잃고 주는 사랑은 언젠가 원망으로 변한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균열이 시작되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관계를 끝낼 용기도 필요하다. 나를 자주 불행하게 만드는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관계가 끝 나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관계를 끝내는 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상대가 나쁜 사람 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끝낸다는 것은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한다. SNS에 올리는 사진, 직장에서 보여주는 모습, 가족 앞에서의 태도. 각 상황에 맞는 '나'를 연기한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콘셉트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이다. '나는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야', '나는 강한 사람이야, '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라는 자기규정은 때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그런 이미지에 맞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억압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이미 지로 규정될 수 없다. 우리 안에는 선함과 이기심이, 용기와 두려움이,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면을 인정하는 일이다. 때로 약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고, 때로 이기적일 수도 있으며, 때로 혼란스러워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 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은 완벽한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모순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진짜 나는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하고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다. 완성된 자아를 찾으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에 솔직해지는 것. 그 솔직함이 쌓여 비로소 나다운 삶의 윤곽이 드러난다.

우리는 결과로 평가받는 세상에 산다. 몇 등을 했는지, 얼마를 버는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 이런 외적 지표들이 그 사람 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다. 하지만 삶은 정직하지 않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많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도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결과만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다.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누군가를 짓밟지 않았는지, 내 원칙을 지켰는지. 세상은 끊임없 이 비교를 부추긴다. 누구는 벌써 승진했고, 누구는 결혼했고, 누구는 집을 샀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출발선 에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이다. 누군가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으며, 내가 선택한 길이 틀렸다는 증거 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을 어떤 태도로 걸어왔는지다. 남의 기준에 맞춰 억지로 달려온 길인지, 아니면 내 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속도가 느려도, 때로 멈춰 서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 선택이었다면 그것만 으로 충분하다. 참견하는 세상에서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외부의 소리를 차단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도, 무엇이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조언이고 무엇이 그저 잡음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내 안에 명확한 기준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외부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필요한 것만 선택할 수 있다. 그 기준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와 후회,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통해 천천히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조언을 따랐다 가 후회하기도 하고, 내 고집을 부렸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나다움'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것만이 진짜 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 열망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말에, 예상치 못한 사건에, 내 안의 감정에. 그 흔들림은 약함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다. 진짜 목표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갈 때까지 버티는 법을 배우 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는 균형감이다. 완벽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관찰하고, 왜 흔들렸는지 이해하고,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흔들렸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흔들림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중심을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흔들릴 때마다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 실수해도 괜찮으며, 가끔 무너져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그것도 빨리 일어설 필요는 없다. 넘어진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숨을 고르고, 준비가 되었을 때 천천히 일어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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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 뇌를 설계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다중언어의 놀라운 힘
비오리카 마리안 지음, 신견식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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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몇 년간 다중언어 사용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신경과학 연구와 인지 연구들은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인간의 뇌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이 논쟁에 불을 지폈다. 비오리카마리안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다중언어 구사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포괄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그녀는 다중언어 구사자들이 향상된 인지 능력, 지연된 치매 발병, 그리고 우 수한 실행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중언어를 기반으로 한 논지가 흥미롭다.

마리안의 핵심 논지는 그녀가 "병렬 활성화"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한다. 이는 다중언어 뇌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에 대한 동시적 접근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작동하는 인지 시스템을 만들어 전체적인 정신 기능을 향상시킨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언어 전환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도전하며, 다중언어 뇌가 "병렬 처리 초유기체"로 작동한다고 제안한다. 만약 여러 언어가 영구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다면, 뇌는 경쟁하는 언어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우수한 메커니즘을 발달시켜야 하 며, 이론적으로 향상된 실행 기능, 창의성, 그리고 인지적 유연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 사이의 관계는 마리안이 제안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지만, 여전히 매혹적이고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제공하는 예시들, 예를 들어 스페인어가 안쪽 모퉁이(rincon)와 바깥쪽 모퉁이(esquina)를 구별하는 별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흥미롭다.. 언어들은 현실을 다르게 분할하며, 잠재적으로 화자들이 특정 구별에 주목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는 것이다.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고 제안하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수십 년간 논쟁되어 왔으며, 미묘한 결론들이 나타나고 있다. 언어는 인지와 지각의 특정 측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은 여러 범주적 틀에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자동적으로 보편적 인지적 우월성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여러 언어 시스템을 넘나들 때, 필연적으로 다른 문화적 틀, 관용적 표현, 그리고 경험을 조직하는 방식과 관여한다. 이러한 노출은 일종의 정신적 민첩성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중언어 뇌가 구조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언어 세계 사이를 항해하는 실천이 특정 적응 기술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제2언어로 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다중언어의 효과는 언어와 감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다. 학습된 언어의 감소된 정서적 공명은 심리적 거리를 만들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의사결정에 대한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 이 현상은 언어 선택이 도덕적 추론, 재정적 결정, 그리고 위험 평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의미를 전달해 준다.

개인적 인지를 넘어서 언어는 강력한 사회적·정치적 도구로 기능한다. 정부와 공인들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언어를 조작하는 방식에 대해 마리안은 본질적인 진실을 강조한다. 언어에 대한 통제는 사고에 대한 통제다.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프레이밍, 강조, 그리고 아이디어의 접근성 측면에서. 단어의 제거가 특정 사고를 표현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웰의 Newspeak 개념은 정치적 담론, 광고, 그리고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언어는 정체성과 깊이 얽혀 있으며, 여러 언어 공동체를 항해하는 개인들은 종종 단일 언어 사용자들이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일종의 심리적 복잡성을 경험한다. 이것은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 또한 다중언어 사용에 관한 교육 정책은 사회적 가치와 권력 구조를 드러낸다.

어떤 언어가 가치 있게 여겨지고, 어떤 언어가 주변화되며, 누가 다중언어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가는 중립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의 반영이다. 미국 국무부의 언어 난이도 분류(스페인어를 카테고리 I, 아랍어를 카테고리 IV 로)는 본질적인 언어적 복잡성이 아니라 영어 구조로부터의 거리를 반영하고 있다. 영어를 참조점으로 중심화하고 암묵적으로 영어권 관점을 정상화하는 틀인 것이다. 언어의 힘은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측정 가능한 우월성을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경험을 형성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다양한 인간 공동체를 가로질러 의미를 구축하는 능력에 있다. 마리안은 다중언어 사용의 인지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접근 방법을 보여준다. 각 언어는 경험에 대한 특정한 렌즈를 제공하며, 여러 렌즈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은 사람들은 우월성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얻는다. 언어의 힘은 그것이 우리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게 하는가에 있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고, 우리 자신을 표현하며, 복잡한 세계에서 의미를 만드는 것. 그 힘은 과학적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어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모 든 대화, 번역을 거부하는 모든 시, 그리고 가정과 학교의 다양한 언어 사이를 항해하는 모든 아이에게서 명백하다. 다중 언어의 다름을 경험하고, 그 차이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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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클래식 - 24명의 대표 작곡가와 함께 떠나는 유쾌한 클래식 여행
음플릭스 지음 / 빅피시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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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세 시, 잠이 오지 않아 무심코 켠 음악 앱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흘러나왔다. 귀가 들리지 않는 노작곡가가 관객석을 등진 채 서 있던 1824년의 그 밤이, 200년의 시간을 건너 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돌려세우기 전까지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소리가 극장을 얼마나 뜨겁게 달구고 있는지를. 들을 수 없는 세계에 서 들려주기 위해 써 내려간 음표들. 그 역설 앞에서 나는 이어폰을 벗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음악을 온전히 듣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경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건 한 인간의 삶을 엿보는 일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이며, 때로는 그가 견뎌낸 고통과 환희를 함께 경험하는 일이다. 하이든의 머리가 145년 동안 유랑했다는 기괴한 일화는 그저 웃고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천재의 뇌를 해부하고 싶어 했던 19세기 골상 학의 광기, 예술가를 신격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표본으로 소유하려 했던 당대의 모순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상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곡 '동물의 사육제'를 생전에 공개하지 말라고 유언처럼 남긴 이야기를 읽으며 웃음이 났다. 진지한 대작곡가로 기억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이 농담으로 쓴 경쾌한 음악이 자신의 명성을 갉아먹을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역사는 잔인할 만큼 정직해서, 사람들은 그의 장엄한 교향곡보다 백조의 우아한 선율을 더 사랑했다. 예술가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세상에 나간 뒤의 운명일 것이다. 바그너처럼 반역자이자 도망자, 심지어 빚쟁이였던 인물이 음악사의 거장으로 기억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우리는 종종 위대한 예술은 고결한 인격에서 나온다고 착각하지만, 역사는 그 환상을 가차 없이 깨뜨린다. 모차르트는 편지에 똥 이야기를 즐겨 썼고, 비발디는 미사를 소홀히 하며 바이올린에 빠져 살았으며,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도 누군가를 숨겨둔 채 사랑했다. 그들의 삶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탄생한 음악은 시간을 초월한 완벽함을 지녔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굶주림에 지친 연주자들이 쓰러지면서도 악기를 놓지 않았던 그 초연의 현장, 정부는 그것을 체제의 승리로 포장했지만, 작곡가 본인은 그 곡이 나치뿐 아니라 모든 독재와 억압을 향한 진혼곡이었다고 고백했다. 음악은 때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대신 말해주고, 침묵으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을 소리로 번역한다. 스탈린의 공포정치 아래서 쇼스타코비치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은 음표 사이에 숨겨놓은 암호 같은 것이었 을지도 모른다.


중세의 귀도 다레초가'도레미'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음악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 이전까지 음악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기보법이 없던 시대, 음악은 오직 기억과 구전으로만 전승됐고, 그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음악은 비로소 기록될 수 있었고, 기록된 것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인간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음악이 신의 것에서 인간의 것으로 내려온 순간이었다. 우리는 시각예술의 거장들은 기억하면서도 청각예술의 선구자들은 쉽게 잊는다. 하지만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눈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귀로 들었던 것도 함께 복원해야 한다. 다빈치가 붓을 들 때 배 경에 흐르던 음악,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릴 때 들렸을 미사곡, 팔레스트리나가 교황청의 음악 금지령을 무릅쓰고 지켜낸 교회음악의 전통. 그것들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시대정신 그 자체였다.


바로크 시대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음악이 '감정을 흔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음악이 신을 찬양하고 질서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바로크는 인간의 내면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헨델이 죽음의 문턱에서 완성한 ‘메시아'는 그 자체로 부활의 은유였고, 바흐가 남긴 방대한 작품들은 고기 포장지로 쓰일 뻔한 운명을 겨우 피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가 죽은 직후 그의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됐다. 위대함은 때로 한참 뒤에야 발견된다. 고전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음악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찾기 시작했다. 하이든의 교향곡들 은 정교한 건축물처럼 치밀했고, 모차르트는 천재적 감각으로 형식과 자유를 완벽히 결합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음악만큼 조화롭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편지에 천박한 농담을 쓰며 웃었고, 하이든의 머리는 도둑맞아 유럽을 떠돌았다. 예술가의 작품과 삶 사이의 괴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균형을 작품 안에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의 삶이 그만큼 불균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슈베르트가 짧은 생애 동안 6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는 건 하나의 강박에 가깝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쇼팽이 폴란드의 영혼을 피아노로 속삭였고, 리스트가 클래식 역사상 최초의 ‘아이돌'이 되어 유럽을 휘저었으며, 슈만이 사랑을 위해 스승을 고소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던 시대. 낭만주의는 말 그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던 예술가들의 시대였다. 브람스가 스승의 아내를 40년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애틋함을 넘어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그 감정이 그의 음악에 어떤 깊이를 더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생상스는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신동으로 불렸지만 평생 진지함의 가면을 쓰고 살았고, 결국 가장 사랑받는 곡은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농담'이 되었다. 예술가가 의도한 것과 세상이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간극은 때로 아이러 니하다.


새벽 다섯 시,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이 방안을 채운다. 아름답지 않지만 강렬하다. 편안하지 않지만 깨어 있게 만든다. 클래식은 때로 자장가처럼 우리를 재우지만, 때로는 알람처럼 우리를 깨운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이어진 이 긴 여정은 결국 인간이 소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신을 찬양하던 목소리가 인간을 노래하게 되고, 감정을 흔들고, 민족을 품고, 결국 모든 규칙을 해체하며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듣는 일이다. 완벽하지 않았던, 때로 추악하기까지 했던,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그래서 클래식은 박물관에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현재다. 베토벤이 듣지 못했던 박수 소리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울려 퍼지는 것처럼, 생상스가 숨기려 했던 농담이 지금도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처럼, 쇼스타코비치가 침묵으로 전한 진실이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것처럼. 클래식이라는 시간여행에는 종착역이 없다. 다만 각자의 속도로 걸으며, 때로 멈춰서서 귀 기울이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클래식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가는 나에게 옆에서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이야기해 준다. 클래식 매니아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안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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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함께 있어도 외로울까 - 관계에 휘둘리는 당신에게
황규진 지음 / 북스고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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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 안에서 가장 깊은 외로움을 경험한다. 손을 맞잡고 있지만 마음은 닿지 않고, 함께 있지만 혼자인 것 같은 그 기묘한 감각. 단순한 권태나 일시적인 갈등이 아닐 것이다. 관계의 구조 자체가 비틀어져 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서서히 자신을 잃어간다.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처음에 모든 것은 완벽한 설렘으로 시작되었다. 작은 기침 소리에도 약을 사 들고 달려왔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했으며, 나의 말에 귀 기울이는 듯했다. 주변 사람들 은 " 좋은 사람 만났다 " 며 축하했고, 나 역시 '이 사람이구나 ' 싶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상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덕처럼 보였던 그의 효심과 착함이 어느새 당신을 질식시키는 벽이 되어 있었다. 점점 더 많이 노력했지만, 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애쓸수록 더 외로워지는 역설 속에 갇혔다. 무엇이 문제이었을까? 내가 만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교하게 위장된 지배의 관계였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과시하고, 타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알아보기 쉽다. 문제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다. 이들은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이타적으로 보인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약자를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결핍이 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차가운 공감'이라 부른다. 인지적으로는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전혀 공명하지 않는 상태. 그래서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도 불편함만 느낄 뿐,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힘들다"고 말할 때, 돌아오는 말은 언제나 비슷했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던데.""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반응 앞에서 나는 점점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 정말 내가 예민한 걸까? ' ' 내가 이해심이 부족한 걸까?' 하지만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 불편함, 답답함, 설명 할 수 없는 서늘함. 그것들은 모두 진짜였다.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지점은 '제3자의 존재'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많은 경우 그것은 어머니, 혹은 가족이다. 사랑을 나누면서도, 정작 중요한 결정에서는 언제나 가족의 의견을 우선한다. 나의 생일보다 어머니의 전화가 먼저고, 나의 아픔보다 어머니의 기분이 더 중요하다. '정서적 근친'이라 불리는, 건강하지 못한 유착 관 계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감정받이 역할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발달시킬 기회를 잃었다. 그는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지워왔고, 이제는 자아가 없는 빈 껍데기만 남았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조차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그의 삶에서 '연인'이 아니라 '부속품'에 가깝다. 그의 세상 속에서 당신은 언제나 참고인이고, 조연이며, 엑스트라일 뿐이다. 이런 관계에서 나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내어준다. 더 이해하려 하고, 더 참으려 하고, 더 사랑하려 한다. "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변할 거야 " 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밑 빠진 독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독은 차지 않는다. 그는 나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도 결코 채워지지 않 는다. 오히려 내가 행복해하면 그것을 시기하고, 내가 성장하면 불안해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자신을 떠받쳐 줄 지지대이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이 그의 불행이 되는 기묘한 역학이 작동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이 중성이 드러난다. 그는 "내 돈은 엄마 돈"이라고 하면서도, 나의 돈은 우리 생활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서 히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고갈되어 간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런 관계 속에서 판단력 자체가 흐려진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브레인 포그(Brain Fog)'라고 한다. 지속적인 가스라이팅과 정서적 학대 속에서 당신의 뇌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똑똑하고 주체적이었던 당신 이 어느새 자신의 감정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더 나아가 '트라우마 본딩', 즉 학대적 관계에 대한 중독이 발생한다. 그가 가끔씩 보여주는 친절과 애정이 마치 도박에서의 대박처럼 느껴진다. 뇌는 사랑이 아니라 불확실한 보상 체계에 중독된 것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떠나지 못한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아프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용기를 내는 것. 당신의 고통은 예민함이 아니라 정당한 반응이 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구원자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그를 고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이해해도, 그는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본인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진심으로 변하고자 할 때만 가능하다. 나의 희생이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나만 소진될 뿐이다. 단호한 경계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 더 이상 나의 감정을 무시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기. "네가 예민한 거야"라는 말에 "아니, 이건 정당한 요구야"라고 답하기.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통제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더 작게 만들지 않고, 더 크게 만든다. 진정한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각자로 서면서 함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대화에 리듬이 있다. 말이 오가고, 감정이 공명하며,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풍요롭게 만든다. 외로움이 아니라 연결감을 느낀다. 애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흐른다. 물론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해결책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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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치유 혁명 - 내 안의 완치 본능을 깨워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제프리 레디거 지음, 김지원 옮김 / 앵글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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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의학의 역사는 예외와 이상 현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어떤 치료도 없이, 혹은 의학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여겨지는 방법을 사용한 후 완전히 회복되는 사례들은 현대 의학이 가장 불편해하는 영역이다. 하버드 의대의 정신과 의사인 제프리레디거는 이러한 '자발적 관해' 또는 '놀라운 회복' 사례들을 15년 이상 추적 연구하며, 이들이 통계적 오류나 오진이 아닌, 우리 몸의 치유 능력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 <Cured>는 우리 면역 체계의 힘과 심신 연결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자발적 (spontaneous)'이라는 단어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처럼 들리지만, 레디거가 추적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회복은 환자들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선택과 변화 이후에 일어났다. 이는 수동적 운명이 아닌 능동적 참여의 결과였다. 19세 기 말 윌리엄 콜리 의사가 발견한 사례는 이러한 현상의 시초를 보여준다. 계속 재발하는 암 환자가 고열을 동반한 감염에 걸린 후 종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콜리는 이를 바탕으로 사균을 주입하여 인위적으로 발열을 유도하는 치료를 시도했고, 놀랍게도 일부 환자에게서 관해를 관찰했다. 이는 오늘날 면역치료의 선구적 시도였으나 당시에는 주류 의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레디거의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콜리의 유산을 계승하며, 의학이 무시해온 '블랙박스'를 열어보려는 시도다.

레디거가 제시하는 회복의 경로는 단순하지 않다. 초반부는 영양, 면역 체계, 신경계 등 신체적 측면에 집중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플라시보 효과, 신앙 치유, 사랑의 힘, 그리고 '정체성의 치유'라는 더 깊은 심리적•영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특히 마지막 개념은 핵심적이다. 많은 환자들이 단순히 식단을 바꾸거나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재 구성했다는 점이다. 암 환자들 중 상당수가 진단 전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억압하고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왔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의 놀라운 회복을 경험한 이들은 독성 있는 관계를 떠나고, 만족스럽지 못한 직업을 그만두고, 억눌렀던 재능이나 열망을 되살렸다. 이는 배를 불태우는 용기를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과거로 돌아갈 다리를 끊어야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케이틀허쉬버그와 마크 바라쉬의<Remarkable Recovery>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 다. 환자들은 자신만의 치유 방식에 전적으로 헌신했는데, 그것이 엄격한 케토제닉 식단이든, 매일의 요가와 명상이든, 중 요한 것은 방법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점이다.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효과적인 것은 특정 치료법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환자의 완전한 몰입과 신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디거는 모든 경우가 이런 심리적 패턴에 들어맞 지는 않는다고 인정한다. 고열을 동반한 급성 감염 후 암이 퇴행하는 경우는 명백히 생물학적 기제에 기반하며, 어떤 사례들은 진정으로 '자발적'이어서 아무런 설명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솔직함은 책의 신뢰성을 높인다.

레디거는 17년간 사례를 수집하고 환자를 인터뷰하며, 많은 단일 사례 연구가 의미 있는 인과관계의 패턴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비평이 있을 수 있다. 클레어, 맷, 파블로, 미래와 같이 회복된 소수의 사례 뒤에는 똑같은 생활 변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질병에 굴복한 수천 명이 있을 수 있다. 스티브 잡스의 사례는 이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췌장암 진단 후 수술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채식과 침술에 의존했다가 결국 생명을 잃었다. 만약 일화만으로 장수의 비결을 찾는다면, 매일 위스키를 마신다는 백세 노인들의 증언도 똑같이 유효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규모 임상 시험이 필요한 이유다. 특정 개입을 받은 집단과 받지 않은 집단의 관해율을 비교해야만 진정한 효과를 검증할 수 있다. 레디거는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치유가 환자의 강한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통제된 실험이 불가능하다고 변론한다. 우려 스러운 것은 이러한 메시지가 절박한 환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심리적 영향이다. 99.9%의 환자가 생활 방식을 바꾸고 태 도를 전환했지만 신체적 치유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거나, 믿음이 부족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 레디거는 " 올바른 모든 것을 했지만 여전히 질병에 굴복하는 환자들이 많다 " 고 인정하지만, 이 점을 충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레디거의 작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는 '만능 치료'에서 벗어나 개인 맞춤형, 전인적 치료로 나아가는 서양 의학의 변화를 예고한다. 호스피스 환자들이 예상보다 오래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정서적 지지 덕분일 수 있다는 연구는 매력적이다. 자비와 연결이 가진 치료적 이점에 대한 그의 논의는 의료 현장에 인간성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환자를 수동적 치료 대상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보는 관점을 강화한다. 질병과 치유의 과정에서 환자의 고유한 상황, 신념, 가치관, 관계가 중요하다는 인식은 현대 의학이 간과해온 차원이다. 환자 중심 의료, 통합 의학, 정신종양학의 발전은 이러한 방향성을 뒷받침한다. 책은 서구적 개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어 자기중심적이다. 개인화된 의학이 소수의 특권이 되는 미래는 우려스럽다. 역설적이게도, 만약 레디거가 제안하는 전인적 실천들이 사회 전체 차원에서 채택된다면, 인구 집단의 건강은 극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기적보다 공동체의 웰빙이 더 중요한 목표가 될 수 있다.

레디거의 <치유 혁명 -Cured>는 완결된 답이 아니라 열린 질문이다. 자발적 관해가 '블랙박스'라면, 그 안의 비밀 대부분은 여전히 잠겨 있다. 일화적 증거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더 엄격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책은 의학이 무시해온 현상들에 주목하게 만들고, 치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하도록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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