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계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지중해를 떠올린다. 로마 제국이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라 부르며 문명의 중심으로 삼았던 그 바다. 대서양을 떠올린다. 신대륙 발견 이후 근대 세계 체제를 형성한 교역로의 중심이었던 그 바다. 태평양과 인도양도 마찬가지다. 각각 냉전 시대 패권 경쟁의 무대였고, 고대 해상 실크로드의 동맥이었다. 그러나 흑해는? 이 바다는 역사 서술의 중심에서 언제나 비껴나 있었다.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경계선, 강대국들 이 각축을 벌이는 완충지대. 흑해는 이처럼 늘 '사이'에 존재했고, '주변부'로 인식되어 왔다. 찰스 킹의 흑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망각에 새로운 시각을 전달한다. 그는 흑해가 결코 변방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중심 무대였음을 방대한 사료와 치밀한 분석을 통해 증명한다. 2700년에 걸친 흑해의 역사는 단순히 한 지역의 연대기가 아니라, 문명의 충돌과 융합, 제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인간 집단의 이동과 적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관통하는 세계사 그 자체다.


흑해의 역사는 신화로부터 시작된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5600년경보스포루스 해협이 무너지면서 지중해의 바닷물이 당시 담수호였던 흑해 분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격변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화와 지질학이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흑해는 이미 인류 집단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흑해 연안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기원전 7세기부터, 이 바다는 '문명'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밀레투스에서 출발한 그리스 상인들은 흑해 전역에 90개가 넘는 폴리스를 세웠다. 히스트리아, 토미스, 올비아, 케르소네소스. 이 도시들은 단순한 교역 거점이 아니었다. 그리스 세계와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같은 유목 민족 세계를 연 결하는 문화적 중개자였다. 헤로도토스가 스키타이인들의 풍습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오비디우스가 유배지 토미스에서 슬픈 시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흑해 연안 도시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서도 흑해는 여전히 경 계였다. 제국의 변경이자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관문. 그러나 이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유동하는 접촉 지대였다. 상품과 사람, 사상과 종교가 교차했고, 로마의 문물은 흑해를 통해 북쪽 초원 지대로 전파되었다.

중세 흑해는 진정한 세계화의 무대였다. 비잔티움 제국, 킵차크 한국(금장한국), 제노바와 베네치아 상인 공화국들이 이 바다를 무대로 복잡한 관계망을 형성했다. 특히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흑해는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점으로서 전례 없 는 번영을 누렸다. 제노바의 카파(현재의 페오도시야)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 출발한 비단과 향신료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파로 들어왔고, 여기서 다시 제노바 상선에 실려 서유럽으로 운반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윌리엄 오브 루브룩이 몽골 대칸을 알현하러 가는 길에, 이 도시들을 거쳐 갔다. 흑해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물류 허브였을 뿐 아니라, 정보와 지식이 교환되는 지적 교차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역설적으로 재앙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1346년, 몽골군이 카파를 포위 공격할 때 흑사병에 감염된 시체를 성벽 너머로 투척했다는 기록이 있다. 흑사병은 이곳에서 제노바 상선을 타고 지중해 전역으로,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연결성은 번영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재앙도 전파한다는 교훈을 흑해는 뼈아프게 보여주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1484년 킬리야:아크케르만 요새의 함락으로, 흑해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내해가 되었다. 흔히 '터키의 호수'라 불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술탄은 비무슬림 선박의 흑해 진입을 엄격히 통제했고, 300년 가까이 이 정책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킹이 지적하듯, '터키의 호수'라는 표현은 과장이다. 오스만 제국의 통제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왈라키아와 다비아 같은 속국들은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고, 크림 한국은 명목상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독자적인 정치체를 유지했다. 더욱이 오스만 제국 자체가 다민족•다종교 제국이었기에, 흑해 연안에는 터키인뿐 아니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 타타르인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살았다. 흥미로운 점은 오스만 지배 아래서도 흑해 무역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제국의 곡창 지대였던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생산된 밀이 이스탄불로 운송되었고, 카프카스의 목재와 노예가 거래되었다. 17세기 코사크 해적들의 약탈조차 이 무역망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다. 흑해는 폐쇄된 바다가 아니라, 다만 다른 규칙으로 작동하는 바다였다.

18세기는 흑해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며 남하 정책을 본격화했다. 1783년 크림 반도의 병합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수세기 동안 유목 민족의 마지막 보루였던 크림이 정주 농경 제국에 편입된 것이다. 러시아는 흑해를 단순히 정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데사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흑해를 세계 경제에 통합시켰다. 19세기 중반, 오데사는 유럽 최대의 곡물 수출항으로 성장했다. 우크라이나 평원의 밀이 오데사를 거쳐 마르세유, 런던, 암스테르담으로 실려갔다. 증기선의 등장은 이 변화를 가속화했다. 트라브존에서사우샘프턴까지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고, 흑해는 문자 그대로 세계 해운망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평화롭지 않았다. 크림 전쟁(1853-1856)은 흑해를 둘러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첨예한지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쇠락하는 제국을 지키려는 오스만,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오스트리아. 흑해는 '동방 문제'의 핵심이었고, 유럽 국 제 정치의 화약고였다.


20세기 흑해의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그리스-터키 간 인구 교환, 스탈린 시대의 대량 추방. 흑해 연안은 민족주의와 전체주의가 빚어낸 참상의 현장이었다. 특히 1944년 크림 타타르인의 강제 이주는 충격적이다. 스탈린은 크림 타타르인 전체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단 며칠 만에 20만 명 이상을 중앙아 시아로 강제 이송했다. 수송 과정에서, 그리고 낯선 땅에서의 정착 과정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세기 동안 크림 에 뿌리내려 살았던 한 민족이 역사에서 지워진 것이다. 이는 크림 타타르인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리스인, 아르메니아 인, 체르케스인, 칼미크인. 흑해 연안의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20세기의 광풍 속에서 고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민족•다문화 공존의 전통은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이름 아래 파괴되었다. 흑해는 문화적 다양성의 보고에서 민족 청소의 현 장으로 변모했다.

냉전 시대 흑해는 다시 한번 분단되었다. 북쪽 연안은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남쪽은 NATO 회원국 터키가 지배했다. 흑해는 철의 장막이 바다로 연장된 곳이었고, 양 진영의 해군이 대치하는 긴장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냉전기 흑해가 겪은 가장 심각한 위기는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적인 것이었다. 무분별한 공업화, 과도한 어획, 하수 처리 시설의 부재.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흑해는 심각한 생태계 파괴를 겪었다. 1980년대에는 빗살무늬 해파리 (Mnemiopsisleidy)라는 외래종이 우연히 유입되어 대번식하면서 재앙이 가중되었다. 이 해파리는 물고기 알과 치어를 잡아먹으며 어족 자원을 고갈시켰다.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풍요를 제공했던 흑해가 '죽어가는 바다'가 된 것이다. 킹은 이 환경 위기를 자연 현상만이 아니라 정치경제 체제의 실패로 분석한다. 소련의 계획경제는 환경 비용을 무시한 채 생산 량 극대화만을 추구했고, 그 대가는 흑해 생태계가 치렀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소련의 붕괴는 흑해 지정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우크라이나, 조지아 같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흑해와 관계를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역내 협력을 통해 안정되고 번영하는 흑해 지역을 건설하자는 낙관론이 대두했다. 2006년 부쿠레슈티 정상회의는 이러한 희망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킹이 우려했듯, 이 낙관론은 과도했다. 2008년 러시아-조지아 전쟁, 2014년 크림 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 분쟁. 흑해는 다시 한번 지정학적 단 충선이 되었다. 러시아의 혹해 함대 문제, NATO의 동진, 에너지 자원을 둘러싼 경쟁.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가 새로운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동시에 문화적·경제적 차원에서는 연결성이 회복되고 있다. 터키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사이의 교역 이 증가하고, 관광산업이 발전하며, 흑해를 사이에 둔 가족과 친구들이 다시 만나고 있다. 국가 간 갈등과 민간 차원의 교 류라는 모순적 상황이 공존하는 것이 현재 흑해의 모습이다.


찰스 킹의 책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민족과 국가라는 근대적 범주를 넘어서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그는 흑해의 역사를 러시아사, 터키사, 루마니아사로 분절하지 않는다. 대신 이 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역망, 문화 교류, 인구 이동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그리스 상인, 제노바 은행가, 코사크 해적, 아르메니아 장인, 유대인 중개상, 타타르 목동. 이 늘 모두가 흑해 역사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접근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은 필연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을 강화하고, 과거의 갈등을 현재로 소환한다. 반면 바다를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은 연결과 교류, 상호의존성을 부각시킨다. 같은 역사적 사실도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흑해의 역사는 또한 '중심'과 '주변'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흑해는 알려진 세계의 끝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중세 제노바 상인들에게 흑해는 실크로드의 서쪽 관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북쪽 변경이었고, 러시아 제국에게는 남쪽으로 열린 창이었다. 관점에 따라 흑해는 변방이기도 하고 중심이기도 했다. 이는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과 행위자의 관점이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