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문화사 - 사물의 생김새로 읽는 인간과 문명 이야기
서경욱 지음 / 한길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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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침대 모서리에 발을 내딛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가 식탁 앞에 앉는다. 이 모든 행위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나는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왜 문고리는 하필 이 크기일까. 왜 계단의 높이는 이 정도일까. 왜 나는 식탁 앞에서 자연스럽게 이 자세로 앉게 될까. <형태의 문화사>를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세계에 맞춰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을.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는 종의 평균적 신체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나는 조금씩, 매일,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손바닥을 펼쳐본다. 다섯 손가락이 모이는 이 작은 공간이 세상의 크기를 정했다. 야구공은 왜 지금의 크기일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인간의 손이 세밀하게 조작할 수 있는 최대 크기가 바로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문고리의 지름도, 컵의 손잡이도, 심지어 스마트폰의 가로 길이까지. 모든 것이 손의 크기라는 생물학적 한계 안에서 결정되었다. 동전이 둥근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주머니 속에서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지폐가 네모난 이유는? 접고, 쌓고, 세기 위해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이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형태가 몸을 따른다. 인간의 손과 발, 눈과 귀, 피부의 감각이 세계의 형태를 규정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거리를 걷다가 간판의 높이를 보면 인간의 평균 시선 높이가 떠오르고, 카페의 의자에 앉으면 무릎 관절의 각도가 느껴진다. 문명이란 결국 몸의 복제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역방향의 흐름이다. 우리가 형태를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형태가 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현관 문화를 생각해보자. 낮게 구획된 현관 공간은 단순히 신발을 벗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안'과 '밖'을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경계선이며, 청결에 대한 문화적 집착을 공간화한 결과다. 현관이라는 구조가 먼저 있었고, 그 구조 속에서 우리는 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분하는 감각을 체화했다. 온돌 문화도 마찬가지다. 바닥이 뜨거워지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고, 앉는 생활방식은 다시 가구의 높이를, 식사 방식을, 심지어 몸의 유연성까지 바꿨다. 구조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다시 정체성을 만든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설계된 공간의 구조가 나를 이렇게 살도록 유도한 것일까.

서양의 건물에 들어가면 조명이 어둡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이 단순히 미적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눈동자 색깔의 차이 때문이었다. 밝은 색 눈동자를 가진 서양인들은 더 많은 빛을 흡수할 수 있어서, 낮은 조도에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조명 설계는 생리학적 차이를 반영한 결과였다. 쇼츠나 릴스 같은 짧은 영상이 세로 화면인 이유도 비슷하다. 양안시 영역, 즉 양쪽 눈이 동시에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영역은 가로보다 세로로 더 길다. 세로 영상은 유행이 아니라 인간의 시각 구조에 최적화된 형태였던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우리가 편하다고 느끼는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우리 몸의 구조에 맞춰져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묻게 된다. 그렇다면 그 '평균'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평균 키보다 작거나 큰 사람, 다른 시각 구조를 가진 사람,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계에서 계속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가장 소름 끼쳤던 부분은 개방형 사무실에 관한 대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개방형 사무실을 민주적이고 소통이 활발한 이상적 공간으로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의 시선도 피할 수 없는, 완벽한 감시 구조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형태는 중립적이지 않다. 형태 안에는 권력관계가 새겨져 있다. 누가 편하고 누가 불편한지, 누가 보고 누가 보이는지, 누가 중심이고 누가 주변인지. 공간의 설계는 곧 권력의 설계다. 지금 우리는 AI가 형태를 자동 생성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은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해서 '최적의' 형태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 최적이란 무엇인가. 누구의 몸을 기준으로 한 최적인가? 평균값은 효율적이다. 하지만 평균값으로 설계된 세계는 평균에서 벗어난 모든 사람을 자동으로 배제한다. 알고리즘이 학습한 데이터 속에 어떤 몸들이 포함되어 있고, 어떤 몸들이 누락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형태는 더 정교해지고 더 편리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편리함은 누구의 편리함인가. 이 형태는 누구의 몸을 상상하며 만들어졌는가.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 자유란 구조를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나를 둘러싼 형태들이 나를 어떻게 길들이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첫걸음이다. 습관을 바꾸고 싶다면,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환경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책상의 배치를, 방의 구조를, 동선을 바꿔야 한다. 변화는 결심이 아니라 형태의 변경에서 시작된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 문고리를 잡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설 것이다. 이 손잡이의 크기가, 이 문의 높이가, 이 공간의 구조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생각하면서. 그리고 물을 것이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구조가 허락한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형태를 의심하는 것. 그것이 문명을 보는 눈이고, 나 자신을 되찾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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