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 100개의 물질로 읽는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
김성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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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물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화학의 원리를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공기 중의 산소가 우리 폐로 들어가 혈액의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는 과정, 물 분자가 세포막을 통과하여 우리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현상, 이 모든 것이 화학반응이다. 화학은 단순히 실험실의 비커와 플라스크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시작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언어인 셈이다. 김성수 저자가 100개의 화학물질로 세상을 재구성하려 했을 때 느꼈던 곤혹스러움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무한에 가까운 물질 중에서 단 100개를 선택한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교향곡에서 핵심 악만을 골라내는 작업과도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선택과 집중이 이 책의 힘이다. 저자는 수소 원자라는 우주의 가장 단순한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지구의 암석과 대기, 생명체를 거쳐, 인류 문명의 산물들을 지나 다시 우주로 향하는 장대한 여정을 설계했다. 닐스 보어와 에르빈 슈 뢰딩거가 수소 원자를 통해 양자역학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 하다. 우주에서 가장 단순한 원자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는 점에서, 복잡성은 단순성으로부터 태어나며, 단순성 속에 모든 복잡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화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나아가 삶의 진리이기도 하다.


저자가 화학을 '중심 과학'이라고 부른 것은 과장이 아니다. 물리학자는 세상을 물리학적으로, 생명과학자는 생명 현상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화학은 그 모든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원자와 분자라는 물질의 기본 단위는 물리학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근간이며, 문명의 재료이고, 우주의 구성 요소다. 화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무생물과 생물을, 자연과 인공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다. 일산화탄소의 이중성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주 공간에서는 별과 별 사이를 채우는 평범한 성간 물질이지만, 지구로 내려오면 치명적인 독이 된다. 헤모글로빈이 산소보다 일산화탄소와 200배 이상 강하게 결합한다는 사실은 화학적 친화력의 차이를 넘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이 화학적 성질이 실제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다. 같은 물질이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 이것이 화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상대성의 교훈이다. 셀룰로스의 여정 또한 흥미롭다. 식물 세포벽을 구성하는 생물학적 고분자가 인류의 의생활을 혁신하고, 산업혁명을 이끈 방적기의 핵심 재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자연과 문명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보여준다. 지구 역사와 인류 역사 모두에 족적을 남긴 물질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화학은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공간을, 서로 다른 학문 분야를 종횡무진 연결한다.


암모니아 합성의 역사는 화학이 인류 문명에 미친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리츠하버와 카를 보슈가 이룬 '공기에서 빵을 만드는' 혁신은 20세기 인구 폭발을 가능하게 한 근본 동력이었다. 질소 비료의 대량 생산이 없었다면 현재의 80억 인구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업적은 동시에 화학무기 개발로 이어졌고, 과도한 질소 비료 사용은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었다. 화학의 양면성, 기술의 중립성과 윤리의 문제가 여기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메틸 고무의 사례는 더욱 직접적으로 화학과 전쟁의 관계를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고무 금수 조치로 궁지에 몰린 독일이 열악한 메틸 고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패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물질이 역사를 바꾼다는 명제를 증명한다. 전쟁은 역설적으로 화학 발전의 촉매가 되었고, 평화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혁신들이 전시에 이루어졌다. 합성 고무, 나일론, 페니실린 등 현대 생활의 필수품들이 모두 전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씁쓸하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듯, 중요한 것 은 '우주적 평형'에 대한 고려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빚진 채 공존하고 있으며, 화학은 그 공존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변화의 과정이다. 석회암의 화학평형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1만 8천 년 동안 보존해준 것처럼, 자연의 화학은 자체적인 균형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개입이 그 균형을 깨뜨릴 때 발생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변화, 플라스틱 오염, 미세먼지 등 현대 문명의 환경 문제는 모두 화학적 불균형의 결과다.


2024년 인공지능 전문가들이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수상한 사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험실이 아닌 컴퓨터에서 과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역설적으로 물질에 대한 본질적 이해는 더욱 중요해졌다. AI가 생성한 데이 터의 환각을 가려내고, 연구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통찰이다. 그리고 그 통찰은 물질의 기본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최소한의 화학'이라는 제목에서 '최소한'이 의미하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다. 100개의 물질을 안다는 것은 100개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100개의 렌즈를 갖는 것이다. 리그닌, 푸트레신, 헨트라이아콘테인처럼 생소한 이름의 물질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다. 루비가 우주 탐사 파트에 실린 것은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레이저의 매질로서의 기능 때문이다. 맥락이 의미를 만든다. 질화 붕소 나노튜브가 우주방사선의 중성자를 차폐하는 재료로 주목받는 것처럼, 화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다. 탄소나노튜브, 그래핀, 양자점 같은 신소재들은 미래 기술의 핵심이며,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가올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고, 그 성질을 규명하고, 응용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은 화학자의 몫이다. 알고리즘은 패턴을 찾을 수 있지만, 창조는 인간의 영역이다.


100개의 물질로 우주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100개의 단어로 장편소설을 쓰는 것만큼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김성수 저자는 해냈다. 수소에서 시작하여 질화 붕소 나노튜브로 끝나는 여정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다. 각 물질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100개의 물질을 통해 배운 원리는 무수한 다른 물질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지식은 축적되지만, 원리는 확장된다. 화학을 안다는 것은 사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문법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 문법을 익히면 낯선 현상도 친숙해지고, 복잡한 문제도 단순해진다. AI 시대에 화학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리즘은 데이터를 처리하지만, 화학은 본질을 이해하게 한다. 컴퓨터는 패턴을 찾지만, 화학자는 의미를 창조한다. 미래는 기술이 만들지만, 방향은 통찰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 통찰은 세상이 화학으로 쓰여 있다는 근본적 이해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화학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화학을 이해 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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