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겨울차 - 한국약선차꽃차연합회 다인들이 큐레이션한 가을 그리고 겨울 차 40선
이은주 외 지음 / 대경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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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찻잔을 꺼낸다. 유난히 날이 서늘해진 오후, 창밖으로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며 물을 끓인다. 주전자에서 김이 오르고, 그 김이 창문에 닿아 희미하게 흐려질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을 마시는 일이고, 자연이 건네는 위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따고, 말리고, 덖어낸 잎과 꽃 과 열매가 뜨거운 물을 만나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잔을 들고, 향을 맡고,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삼키면 된다. 가을 차에는 여름 내내 쌓아온 것들을 내려놓는 힘이 있다. 뜨거운 계절을 견디며 단단해진 뿌리의 기운이, 선선한 바람에 익어간 열매의 달콤함이, 서리 맞기 직전 잎사귀가 품은 마지막 생명력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가을 차는 은은하다. 강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마치 가을 햇살이 따갑지 않지만 깊숙이 스며드는 것처럼. ^.^

어떤 사람은 메리골드 꽃잎이 찻물에 풀어지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기다린다. 노란 꽃잎이 물속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같다. 어떤 사람은 구절초 한 송이를 잔에 띄우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또 어떤 사람은 로즈마리의 강렬한 향에 감싸이며 오늘 하루를 견딜 용기를 얻는다. 나는 가을이면 천일홍을 즐겨 마신다. 그 붉은 빛깔이 가을 석양을 닮아서일까, 아니면 말라도 색을 잃 지 않는 강인함이 부러워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일홍 차를 마시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어느 가을, 함께 걷던 길.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나눴던 소소한 대화. 그때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했지만, 그 시간이 특별했던 건 함께였기 때문이다. 천일홍 차를 마실 때마다 그 시간이 떠오른다. 색이 바래지 않는 꽃처럼, 기억도 바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계절이 주는 선물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꽃이 스스로 향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잎이 자신의 색을 풀어놓을 때까지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기다림의 기술을 알고 있다. 불의 온도를 조절하고, 시간을 견디며,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만 취한다. 그래서 한 잔의 차 안에는 사람의 정성과 자연의 시간이 함께 녹아 있다.

겨울 차는 가을 차와 다르다. 가을 차가 마음을 어루만진다면, 겨울 차는 몸을 다독인다. 추위가 깊어지면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는다. 그때 필요한 것은 속부터 데워지는 근원적인 열이다. 생강, 계피, 대추, 인삼. 이런 재료들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의지해온 자연의 난로였다. 발효생강차를 마시면 목구멍부터 위까지,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열이 퍼져나간다. 처음엔 맵고 강렬하지만, 곧 달콤함이 뒤따라온다. 그 맛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몸이 풀어지고, 굳어있던 어깨가 내려오고, 얕았던 호흡이 깊어진다. 감기 기운이 느껴질 때, 온종일 찬바람을 맞고 돌아온 날, 나는 생강차를 끓인다. 그것은 약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의식이기도 하다. 어머니 세대는 쌍화차를 끓였다. 당귀, 천궁, 백작약, 숙지황 같은 약재들이 오랫동안 우러나며 만들어내는 깊고 진한 맛. 쓴맛과 단맛이 교차하는 그 복잡한 풍미 속에는 '너의 기운을 북돋아주마'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차가 되었지만, 그때의 쌍화차는 특별한 날에만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시험 전날, 아픈 뒤, 기력이 떨어졌을때. 쌍화차 한 잔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회복의 신호였다. 겨울 차를 마시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 해를 정리하고,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계절.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저절로 생각이 깊어진다. 올해는 무엇을 얻었나, 무엇을 잃었나, 누구를 만났고 누구와 헤어졌나. 그런 질문들이 차 향을 따라 피어오른다. 차를 배우고, 차를 만들고, 차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차는 삶의 방식이고, 세상을 이해하는 언어이며,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다. 산과 들을 다니며 재료를 채집하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발효와 숙성의 시간을 견디는 과정. 그 모든 것 이 차를 만드는 일이다. 어떤 이는 15년 전, 가족의 건강을 위해 약초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작은 실험이었지만, 차를 마신 이웃들의 몸과 마음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점차 확신을 얻었다. 차는 나눌 수 있는 것이었고, 나누면 더 커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차를 만들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땅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 자연이 전하는 치유의 힘. 그것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가을과 겨울의 차를 마시며 나는 계절의 지혜를 배운다. 여름의 뜨거움을 견디고 가을의 풍요를 맞이하는 법, 추위가 와도 중심을 잃지 않고 봄을 준비하는 법. 차 한 잔 속에는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교훈이 녹아 있다. 그러니 오늘, 커피 대신 차 한 잔 어떨까. 우리 땅에서 자란 풀과 꽃으로 만든 차. 누군가의 정성과 시간이 담긴 차. 천천히 우려내고,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씩 마시며 계절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런 시간이 있다면, 가을과 겨울은 조금 더 따뜻하고 의미 있는 계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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