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전 부사장이 말하는 K-반도체 초격차전략 - 기술이 국가 안보를 좌우하는 시대, K-반도체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병철 지음 / 더봄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1세기 산업 지형도는 더 이상 개별 기업의 기술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워싱턴과 베이징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술 패권 다툼은 반도체를 중심축으로 회전하며,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을 이끌었던 고위 임원의 발언처럼, 오늘날 반도체 경쟁은 기업간 경쟁을 넘어 국가 총력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AI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연산 능력과 메모리 성능에 대한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자동차가 '바퀴 달린 컴퓨터'로 진화하면서 반도체는 더 이상 IT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K-반도체 초격차 전략은 단순한 산 업정책을 넘어 국가 생존 전략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DNA는 메모리에 새겨져 있다. 1980년대 ' 반도체 보국 '의 기치 아래 시작된 메모리 사업은 DRAM과 NAND 플래시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구축하며 한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AI 시대는 전혀 다른 게임의 규칙을 요구한다. 많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을 넘어, 얼마나 빠르게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느냐가 승부처 가 되었다. 엔비디아의 최신 GPU가 아무리 강력해도 메모리와의 데이터 교환 속도가 느리면 병목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AI 시대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한 이유다. HBM은 여러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적층하여GPU와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교환하는 기술이다. 문제는 이 기술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미세한 실리콘 관통 전극(TSV)을 수만 개 뚫어야 하고, 각 층 간의 정렬 오차는 나노미터 수준으로 제어되어야 한다. 발열 관리도 극도로 까다롭다. 메모리 초격차 전략의 핵심은 HBM 전용 생산라인을 대폭 확충하고, TSV 공정의 수율을 업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삼성전자 역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추격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능력 확대만으로는 부족하다. AI 가속기 설계사, GPU 제조사와의 긴밀한 협업 생태계를 구축하여 차세대 AI 칩의 요구사항을 미리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메모리 사양을 최적화하는 '공동 설계'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AI 전용 메모리 반도체 개발도 필요하다. 빠른 메모리를 넘어, AI 연산에 특화된 처리 기능을 내장한 '컴퓨팅 메모리'나 '뉴 로모픽 메모리' 같은 차세대 제품군으로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메모리 왕국의 재건축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AI라는 새로운 전장에서 메모리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작업이다.


파운드리 시장은 TSMC라는 거인이 지배하고 있다. 애플, AMD, 엔비디아 등 세계적 팹리스 기업들이 TSMC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 삼성전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역사는 기술 전환기마다 판도가 바뀌어 왔음을 보여 준다. 현재 우리는 바로 그런 전환기에 서 있다. Gate-AII-Around(GAA) 기술은 기존 FinFET구조의 한계를 극복하는 차 세대 트랜지스터 구조다. 삼성전자는 GAA 기술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파운드리 경쟁력을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다. 문제는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객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파운드리 2위 탈환 전략의 첫 번째 축은 초미세 공정의 조기 안정화다. 3나노, 2나노 공정을 빠르게 양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율이다. 수율이 낮으면 아무리 앞선 공정이라도 고객은 주문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공정 시뮬레이션, AI 기반 불량 예측, 실시간 공정 모니터링 시스템을 고도화해야 한다. 두 번째 축은 대규모 고객 포트폴리오 확보다. 소수 대형 고객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AI 칩 스타트업, 자동차 반도체 기업, 클라우드 서비스 기업 등과 장기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AI 시대에는 맞춤형 칩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소량 다품종 생산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생산 체계가 필수다. 세 번째 축은 시스템 반도체 설계 지원 역량 강화다. 파운드리 기업은 단순 제조사가 아니라 설계 파 트너가 되어야 한다. 고객이 칩을 설계할 때부터 함께 참여하여 제조 가능성을 검토하고, 성능 최적화를 지원하는 '디자인 서비스' 조직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이는 TSMC가 강점을 보이는 영역이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이 전공정에서 후공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무어의 법칙이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성능 향상의 돌파구는 패키징 기술에서 찾아지고 있다. 첨단 패키징은 여러 개의 칩을 3차원으로 쌓거나 나란히 배치하여 마치 하나의 집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TSMC의 CoWos(Chip on Wafer on Substrate), 인텔의 Foveros같은 기술이 대 표적이다. 한국의 패키징 기술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이는 메모리 중심 산업구조에서 패키징이 단순 조립 공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칩 시대에 패키징은 핵심 기술이다. HBM을 GPU와 통합하는 과정, 여러 칩렛(chiplet)을 하나로 연결하는 과정 모두 고도의 패키징 기술을 요구한다. 첨단 패키징 전략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HBM 전용 패키징 라인을 신설하고 미세 범프(bump) 형성 기술의 정밀도 를 극대화해야 한다. 둘째, 칩렛 기반 설계를 지원할 수 있는 인터커넥트 기술과 열관리 솔루션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패키징 전문 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고, 장비•소재 기업과의 협력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패키징이 시스 템 통합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CPU, GPU, 메모리, AI 가속기를 하나의 패키지 안에 통합하는 '헤테로지니어스 인티그레 이션(heterogeneous integration)' 기술은 차세대 컴퓨팅의 표준이 될 것이다. 한국이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한다면,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연결하는 가치사슬의 핵심 고리를 장악할 수 있다.


기술과 자본도 중요하지만, 결국 반도체는 사람이 만든다. 반도체 산업은 극도로 복잡한 지식집약 산업으로, 공정 엔지니어 한 명을 양성하는 데 최소 5년 이상이 걸린다.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미국, 유럽, 일본 모두 대규모 반도체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한국의 인재 전략은 양적 확대와 질적 고도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우선 반도체 관련 학과의 정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현재 연간 배출되는 반도체 전공 인력으로는 산업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대학원 정원도 확대하여 석•박사급 고급 인력을 더 많이 양성해야 한다. 동시에 교육 내용도 혁신되어야 한다. 이론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실제 공정 장비를 다루는 실습 교육을 강화하고, 산학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도체 기업의 팹(fab) 시설을 교육 목적으로 개방하거나, 가상 팹 (virtual fab)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구축하여 학생들이 실전 감각을 익힐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글로벌 인재 유치도 필 수다. 인도, 대만, 중국, 유럽 등지의 우수한 반도체 인력을 한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비자 제도, 주거•교육 지원, 연구 환 경 개선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이나 싱가포르처럼 작은 나라도 글로벌 인재를 끌어들여 기술 강국이 된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 인재 파이프라인 구축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투자하지 않으면 10년 후에는 아무리 자본 과 기술이 있어도 제조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더 이상 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국의 CHIPS Act는 52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으로 자국 제조 역량을 복원하고 있으며, 일본은 TSMC와 협력하여 쿠마모토에 첨단 팹을 유치했다. 유럽연합은 반도체법을 통해 2030년까지 글로벌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도 국가 차원의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 K-반도체 벨트는 용인과 평택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로, 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장비•소재 기업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 태계를 의미한다. 이 클러스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소재•부품·장비(소부장)의 국산 화율을 높여야 한다. 일본의 수출 규제 사태에서 확인했듯이, 핵심 소재와 장비를 해외에 의존하면 언제든 공급망이 끊길 수 있다.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EUV 노광 장비 같은 핵심 품목의 국산화를 위해 장기 연구개발 지원과 초기 시장 창출이 필요하다. 둘째,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반도체 팹 하 나를 짓는 데 수십조 원이 들어간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려면 법인세 감면, R&D 세액공제 확대, 환경 규제 합리화 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셋째, 전력과 용수 공급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가동되며 막대 한 전력과 초순수를 소비한다. 탄소중립 시대에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 체계를 구축하고, 용수 재활용 기술을 고도화하는 것도 공급망 안정성의 일부다. 넷째, 국제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미국, 일본, 대만, 유럽과의 반도체 동맹을 공고히 하면서도, 중국 시장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기술 동맹과 시장 접근 사이에서 한국은 유연하고 현명한 외교를 펼쳐야 한다.


K-반도체 초격차 전략은 화려한 슬로건이 아니다. 그것은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메모리에서의 압도적 우위, 파운드리에서의 기술 역전, 패키징 혁신, 인재 양성, 그리고 국가 공급망의 완성. 이 다섯 가지 퍼즐이 모두 맞춰질 때, 한국은 부품 공급자를 넘어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역사는 기술 전환기마다 새로운 강자를 만들어냈다. 1980년대 메모리 시장에서 일본을 추월한 한국처럼, Al 시대의 반도체 전쟁에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업의 과감한 투자, 정부의 전략적 지원, 학계의 인재 양성,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가 하나로 모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반도체는 이제 외교이며, 안보이고, 국가의 미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