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언어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 모든 공동체는 언어 공동체 " 라는 그의 진단은 명료하다. 언어가 공동체의 토대이고 혈관이라면, 그 언어의 질이 곧 공동체의 질을 결정한다. 연민과 이성에 기반한 언어는 공동체를 높이지만, 탐욕과 기만의 언어는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은 정치 언어의 극심한 타락이었다. 내란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라 포장하고, 헌정 파괴를 '구국의 결단'이라 미화하는 언어의 전도. 이런 왜곡된 언어는 현실을 잘못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에게, 언어의 왜곡은 곧 사유의 왜곡이고 현실 인식의 왜곡이다. 오웰이<1984>에서 경고한 '신어(newspeak)'의 공포가 바로 이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타락한 언어를 전파하는 미디어의 역할이다.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거짓과 왜곡을 확산시킬 때, 시민들은 월터 리프먼이 말한 ’의사 환경(pseudo-environment)' 속에 갇힌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처럼, 실제 현실이 아니라 그림자만을 보며 그것을 진실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일부 언론과 유튜브 채널들이 만들어낸 평행 현실 속에서, 어떤 이들은 내란을 민주주의 수호로, 범죄자를 애국자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언어는 회복될 수 있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외친 탄핵하라", "민주주의를 지켜라"는 구호들은 타락한 정치 언어에 맞서 본래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언어 투쟁이었다. 왜곡된 언어를 바로잡고, 사물을 제 이름으로 부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막스 베버의 구분을 빌려 저자는 '권력정치'와 '윤리정치'를 대비시킨다. 권력정치는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정치다. 공익이나 이념이 아니라 권력이 주는 위세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다. 베버는 이런 권력정치인들이 결국 "내적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고, 잘난 체하고 우쭐대지만 실상 속이 텅 빈 제스처의 이면에 어떤 허약함과 무력함이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의 몰락은 정확히 이런 패턴을 따랐다. 검찰 권력을 등에 업고 집권했지만, 실제로는 국가를 이끌 비전도 능력도 없었던 권력정치의 전형. 모든 비판을 억압하고 사적 이익을 챙기다가 내란이라는 극단으로 치달았고, 결국 시민의 저항 앞에 무너졌다. 맥베스가 피로 왕관을 찬탈했지만 불안에 떨다 폭군이 되고 반란을 자초한 것처럼 말이다. 반면 윤리정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통합한다. 옳다고 믿는 원칙을 견지하되, 그 원칙이 현실에서 낳을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정치.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소명을 가진 이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윤리정치의 토대 위에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