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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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오랫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카이로스 극장>,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우리가 함께 겪어낸 격동의 시간을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에서부터 현대 민주주의의 광장까지 종횡무진하며 읽어내는 하나의 장대한 사유였다. 플라톤과 윤석열을, 맥베스와 내란 세력을, 아리스토텔레스와 검찰 권력을 같은 무대 위에 세워놓고 대화하게 만드는 이 지적 모험은, 우리 시대 민주주의가 어떤 위기를 통과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저자가 윤석열 정부 초기에 인용한 플라톤의 <정치가> 비유는 섬뜩할 정도로 예언적이었다. "조타수와 선원들의 무능으로 배가 침몰하듯, 통치술을 모르는 자들의 무능으로 나라가 몰락한다"는 경고는 그저 고전의 지혜가 아니라 우리가 목도한 현실 그 자체였다. 검찰 권력이라는 좁은 경험만을 가진 이가 국가라는 거대한 배의 키를 잡았을 때, 우리는 정말로 그 배가 춤을 추며 난파 직전으로 치닫는 것을 보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국가>에 등장하는 사이비 선원들의 모습이었다. 선주인 민중의 눈을 가리고 권력을 탈취한 뒤 공동체의 재산을 탕진하는 선원들. 이들은 진정한 항해술을 가진 이를 '쓸데없이 하늘만 쳐다보는 몽상가'라며 조롱한다. 지난 3년 반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역사의식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얼마나 철저히 조롱당했는가. '쓸모'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가치가 얼마나 쉽게 폄하되었는가.... 그러나 플라톤의 비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진정한 조타수는 "별과 계절과 바람을 관찰하며" 항해한다. 즉, 즉각적인 이익이나 권력이 아니라 더 큰 질서와 원리를 이해하는 자만이 배를 안전하게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배 역시 마찬가지다. 단기적 인기나 권력 투쟁이 아니라, 정의와 공익이라는 별을 바라보며 항해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겪은 위기는 바로 그런 조타수의 부재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였다.


책에서 가장 깊이 각인된 부분은 법과 정의에 대한 성찰이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은 욕구 없는 지성"이라는 정의와 헤르메스 신화를 교차시키며, 법을 다루는 이들의 타락이 초래하는 위험을 경고한다. 헤르메스는 해석과 통역의 신이지만 동시에 은폐와 왜곡, 속임수의 신이기도 하다. 법 해석이라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가진 이 양면성은, 그것을 다루는 이들의 도덕성에 따라 정의의 도구가 될 수도, 불의의 무기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바로 후자였다. 검찰과 사법부가 "정신 없는 욕구"에 사로잡혀 법을 정적 제거의 도구로 전락시킬 때, 법치는 이름뿐이고 실상은 무법 상태가 된다. 있는 죄는 묻고 없는 죄는 만들어내며, 권력의 비호를 받는 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저항하는 자에게는 가혹한 이중 잣대.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헤르메스 동굴'의 어둠이었다. 특히 내란이라는 명백한 헌정 파괴 행위 앞에서조차 법기술자들이 온갖 해석과 절차를 동원해 책임자들을 비호하려 할 때, 시민들이 느끼는 것은 분노를 넘어선 깊은 배신감이다. 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가 흔들린다. 아테네가 기원전 461년 에피알데스의 개혁을 통해 소수 특권층의 사법 독점을 깨고 시민 배심원 제도를 도입한 것은, 바로 이런 신뢰 붕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법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서로를 봐주는 담합의 도구가 될 때, 시민들은 직접 정의를 실현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비슷한 기로에 서 있다. 검찰 권력의 방종과 사법부의 편향성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특정 사건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법이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민주공화국의 근본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아테네의 사법 민주화가 보여주듯,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공화국 정신의 핵심이다. 우리가 광장에서 외친 것도 결국 이것 아니었던가.


저자는 언어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 모든 공동체는 언어 공동체 " 라는 그의 진단은 명료하다. 언어가 공동체의 토대이고 혈관이라면, 그 언어의 질이 곧 공동체의 질을 결정한다. 연민과 이성에 기반한 언어는 공동체를 높이지만, 탐욕과 기만의 언어는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은 정치 언어의 극심한 타락이었다. 내란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라 포장하고, 헌정 파괴를 '구국의 결단'이라 미화하는 언어의 전도. 이런 왜곡된 언어는 현실을 잘못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세계를 인식하는 인간에게, 언어의 왜곡은 곧 사유의 왜곡이고 현실 인식의 왜곡이다. 오웰이<1984>에서 경고한 '신어(newspeak)'의 공포가 바로 이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타락한 언어를 전파하는 미디어의 역할이다.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거짓과 왜곡을 확산시킬 때, 시민들은 월터 리프먼이 말한 ’의사 환경(pseudo-environment)' 속에 갇힌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처럼, 실제 현실이 아니라 그림자만을 보며 그것을 진실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일부 언론과 유튜브 채널들이 만들어낸 평행 현실 속에서, 어떤 이들은 내란을 민주주의 수호로, 범죄자를 애국자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언어는 회복될 수 있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외친 탄핵하라", "민주주의를 지켜라"는 구호들은 타락한 정치 언어에 맞서 본래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언어 투쟁이었다. 왜곡된 언어를 바로잡고, 사물을 제 이름으로 부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공동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막스 베버의 구분을 빌려 저자는 '권력정치'와 '윤리정치'를 대비시킨다. 권력정치는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정치다. 공익이나 이념이 아니라 권력이 주는 위세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다. 베버는 이런 권력정치인들이 결국 "내적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고, 잘난 체하고 우쭐대지만 실상 속이 텅 빈 제스처의 이면에 어떤 허약함과 무력함이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의 몰락은 정확히 이런 패턴을 따랐다. 검찰 권력을 등에 업고 집권했지만, 실제로는 국가를 이끌 비전도 능력도 없었던 권력정치의 전형. 모든 비판을 억압하고 사적 이익을 챙기다가 내란이라는 극단으로 치달았고, 결국 시민의 저항 앞에 무너졌다. 맥베스가 피로 왕관을 찬탈했지만 불안에 떨다 폭군이 되고 반란을 자초한 것처럼 말이다. 반면 윤리정치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통합한다. 옳다고 믿는 원칙을 견지하되, 그 원칙이 현실에서 낳을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정치.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소명을 가진 이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윤리정치의 토대 위에 서야 한다.


<카이로스 극장>을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민주주의란 한 번 쟁취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켜내고 심화시켜야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 보여주듯, 어떤 정치 체제도 타락과 변질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민주정조차 중우정으로 타락할 수 있고, 그 혼란 속에서 독재가 등장할 수 있다. 우리가 겪은 위기는 바로 민주주의가 형식만 남고 내용이 공허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 선거라는 절차는 있었지만, 그 선거가 시민의 주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은 있었지만, 권력이 그 원칙을 무시하고 폭주했다. 법치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법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회복력도 목격했다.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 진실을 보도하려 애쓴 언론인들, 원칙을 지키려 한 공직자들, 헌법을 수호하려 한 국회의원들. 이들이 보여준 것은 민주주의란 결국 그것을 믿고 지키려는 시민들의 의지와 행동으로만 유지된다는 진리다. 책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통해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것의 바탕에는 시민의 각성과 연대가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끊임없이 깨어있고, 서로 연대하며,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때만 유지된다. 우리가 광장에서 보여준 그 힘, 그 연대, 그 의지를 일상의 민주주의로 이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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