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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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선을 긋는다면, 그 선은 어디쯤 그어져야 할까. 우진영의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이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김환기의 '푸른 점화'가 123억 원에 낙찰되었다는 뉴스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날, 한국 미술이 세계 무대에서 빛나는 그 순간에도, 정작 우리는 그 빛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빛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1920년대 경성의 거리에서 시작된 예술가들의 고민이 2020년대 서울의 갤러리에서 어떻게 메아리치고 있는지, 저자는 47명의 예술가를 통해 섬세하게 직조해낸다.


책의 첫 장을 여는 것은 도시 풍경이다. 김주경의 1927년작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과 정영주의 2020년작 《도시-사라지는 풍경 531》. 거의 100년의 시차를 두고 그려진 두 그림은 놀랍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가 포착한 김주경의 그림 속 경성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1920년대 경성, 붉은 양산을 쓴 신여성이 경성부청을 향해 걷는 모습은 변화의 한복판에 선 도시의 초상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무거운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신여성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모던함과 희망이 공존하던 순간, 김주경은 그 찰나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반면 정영주가 그린 2020년의 서울은 어떤가. 한지를 구겨 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만들어낸 판잣집들은 빼곡하게 모여 있지만, 그 안에는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저자는 이 불빛을 보며 "온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고층 빌딩이 아닌 판잣집을, 화려함이 아닌 소박함을 선택한 정영주의 시선은 도시 한구석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온기를 향한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시는 변했지만, 예술가들이 포착하고자 한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김주경이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했다면, 정영주는 초고속 발전의 그늘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그려냈다. 두 작가 모두 자신이 발 딛고 선 '지금, 여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 성실함이 1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책의 두 번째 장에서 저자가 연결하는 것은 주경과 노은주, 정물화를 그린 두 예술가다. 그런데 같은 꽃을 그렸을 뿐인데, 그 온도는 정반대다. 주경의 1920년 작품 《온실의 꽃》에서는 뜨거움이 뿜어져 나온다. "나무판 위에 펼쳐진 활달함은 기대 이상이었다. 속도감 있는 붓놀림이다. 꽃잎들이 살아나 춤출 것 같다"는 저자의 묘사는 그림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주경은 어린 나이에 이미 서양화의 매력을 알았고, 유학을 통해 당대 최신의 미술 사조를 흡수했다. 그의 정물화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넘나들며,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대상을 포착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뜨거움'이다. 캔버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것은 단순히 색채의 선명함이 아니라 그리는 이의 기운이다. 안타깝게도 유학 중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예술적 전성기는 일찍 막을 내렸지만, 남겨진 작품들은 여전히 뜨겁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반면 노은주의 《스틸 라이트 2》는 냉정하다. 가느다란 철사 같은 선들, 색을 잃은 꽃송이들, 무채색의 화면. 처음 이 그림을 본 저자는 "폐허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며 저자는 깨닫는다. 이 차가움은 절망이 아니라 단단함이라는 것을. "낙화가 아니었다. 《스틸 라이트 2》 속 꽃들은 피어나고 있다." 노은주는 도시의 건축물과 버려진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그가 그리는 정원은 예쁘지만은 않다. 개화와 낙화가 공존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물들의 정원. 하지만 그 차가운 정물화 속에는 "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가 담겨 있다. 저자는 이를 "스틸 라이트"라고 명명한다. 꺼지지 않는 빛. 두 작가의 대비는 명확하다. 주경의 열정과 노은주의 냉정. 그러나 저자가 포착한 것은 그 차이가 아니라 공통점이다. 두 작가 모두 꽃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주경은 왕성하게 타오르는 생명력을, 노은주는 시들어가면서도 존재하는 생명의 존엄함을 그려낸다. 우리의 삶이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차갑듯, 두 작가의 그림은 삶의 양면을 보여준다.


책의 중후반부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김기창과 현덕식의 이야기였다. 저자는 이 둘을 "장애와 상처 너머"라는 키워드로 묶는다. 김기창은 여덟 살에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었다. "거리를 활보하던 남자아이는 교실 한쪽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들리지 않던 공백을 채운 것은 그림이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김기창의 작품은 《군마》다. 가로 5미터가 넘는 대작 앞에서 저자는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여섯 마리의 말들이 각자 제멋대로 뛰고, 날뛰고, 포효한다. "그 무질서함이 싫지 않다. 숨지 않는 감정들이 통쾌하다." 이 그림은 김기창의 외침이다. 들을 수 없었던 세계를 딛고 나아가겠다는, 소리를 향한 평생의 갈망을 거침없이 드러낸 선언이다. 김기창의 삶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그가 평생 "소리"를 그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청》 속 축음기에 귀 기울이는 여성들, 《싸움》 속 언쟁하는 사람들, 《군작 싸움》 속 지저귀는 참새들. 들을 수 없는 세계를 살면서도 그는 소리로 가득 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아내 박래현과 함께 구화술을 배워 마침내 소리를 내었다. 저자는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현덕식의 《유시도》는 또 다른 의미의 외침이다. 검은 화면을 가득 채운 얼음 덩어리들. 저자는 처음에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으며 깨달았다. "녹진하게 흐르는 물질들은 얼음이었다. 인간 내면의 욕망들을 그리고 싶었단다." 투명하게 빛나면서도 검은 얼음. 그 안에는 "짓이겨진 속내"가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자주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받고, 그것을 숨긴다. 현덕식의 얼음은 바로 그 숨겨진 욕망과 상처의 형상이다. 저자는 이 작품 앞에서 "목덜미부터 젖는 듯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들어와 얼음을 따라 하며 놀자, 저자는 마음이 풀린다. "못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겠다고." 김기창과 현덕식, 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내면의 소리를 터트렸다. 한 사람은 청각 장애를 넘어 소리로 가득 찬 세계를 그렸고, 다른 한 사람은 투명한 얼음 속에 검은 욕망을 담아냈다. 둘 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저자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나와 너의 욕망들에게 말을 건네본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당신도 부디 자책하지 말기를."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서술이다. 저자는 이인성과 정수정을 "시대 속 여성들의 목소리"라는 주제로 연결한다. 이인성은 남성 작가이지만, 그가 그린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저자는 시대를 읽어낸다. 이인성의 1934년작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에서 저자가 발견한 것은 "모던걸"의 자신감이다. "비스듬히 쓴 흰색 모자와 벗겨지듯 신고 있는 슬리퍼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모델은 이인성의 아내 김옥순, 당시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인성이 그린 여성들의 표정은 점점 무거워진다. 《가을 어느 날》 속 반라의 여성은 "표정이 없다." 《해당화》 속 소녀들의 눈망울은 "비감함"을 더한다. 저자는 이를 이인성 개인의 비극과 연결한다. 아내 김옥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림 속 여성들의 눈은 더 자주 감겼다. 하지만 저자가 더 주목하는 것은 "재현되거나 관찰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던 여성들의 모습"이다. 여성은 그려지는 대상이었지, 그리는 주체가 아니었던 시대. 그 한계를 저자는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반면 정수정은 스스로 붓을 든 여성 작가다. 그의 2023년작 《뿔》 앞에서 저자는 혼란을 느낀다. "채도 높은 색들이 엉켜 기묘한 에너지를 뿜는다." 측면으로 돌아선 여성이 피리를 불고 있고, 주변에는 고래 같은 생명체와 애벌레가 있다. 환상인가, 현실인가? 정수정은 대답한다. "나의 욕망과 야망을 인정하고 싶다." 정수정이 그리는 여성들은 더 이상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고, 나체로 사막에서 춤추고, 피리를 분다. "씩씩하고 전투적인 여성"이다. 저자는 이를 "진정한 리얼리즘"이라고 평가한다.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정직함. 정수정의 그림은 100년 전 이인성이 그린 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여성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한다.


책의 후반부을 장식하는 것은 김환기와 손승범이다. 저자는 이 둘을 "영원을 꿈꾸고 사라짐을 맞이하는"이라는 주제로 묶는다. 김환기의 《영원한 노래》를 보며 저자는 "피아노 선율"을 떠올린다. "지속되는 반음들이 맑고 맑아서 더욱 귀 기울이게 된다." 김환기는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그렸다. 달, 학, 매화, 항아리. 한국적인 것들. 저자는 묻는다. "왜 그토록 바라던 파리에 이르러서도 같은 모티프들을 그렸을까?" 그리고 답한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흠모와 바람." 김환기는 영원을 추구했다. 서양의 기법으로 동양의 정서를 담아내며, 추상 속에 구상을, 점 속에 우주를 담았다. 반면 손승범은 "사라지는 것"에 주목한다. 《투명하게 사라지는 믿음 I》에서 저자가 본 것은 "서서히 무너져가는 관계"다. 고대 조각상 위로 나무와 식물이 뒤덮인다. "한때는 영광을 자랑했던 조각상들은 여러 부분 지워져 있다." 버려진 형상들. 하지만 저자는 깨닫는다. "폐기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자투리 조각들이 느리게 나아가는 예술가의 삶과 닮아 보였다." 손승범의 최근 작품들은 "사라져가는 것"뿐 아니라 "자라나는 것"도 그린다. "예전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집중했는데, 지금은 주위에 피어 있거나 자라나는 생성하는 것들에도 관심이 간다." 저자는 이를 통해 말한다. "뒷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던 관계에 자책하지 말라고." 김환기와 손승범. 한 사람은 영원을 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소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둘 다 삶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캔버스 앞에 섰다. 김환기는 "꿈은 무한하다"고 말했고, 손승범은 "투명하게 사라지는 믿음"을 그렸다. 저자는 이 둘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접근성'이다. 저자는 미술사학자이면서도 전문 용어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한국화에 대한 솔직한 속내였다. (…) 유려하지만 난해하게만 느껴졌다." 이상범의 《귀로》를 보고 나서야 한국화를 알고 싶어졌다는 고백은, 미술을 어려워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저자는 작품을 설명할 때도 어렵지 않다. 대신 생생하다. "또각또각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햇볕이 뜨거워서일까, 차가운 색을 따뜻하게 풀어냈기 때문일까." "목덜미부터 젖는 듯하다." 이런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만든다. 또한 저자는 작품을 삶과 연결한다. 정영주의 그림을 보며 "직장에서의 일들이 벅차게 느껴질 때"를 떠올리고, 노은주의 작품 앞에서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을 회상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작품 해석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 독자는 미술이 미술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잇기'다. 근대와 현대를, 과거와 현재를, 예술과 삶을 잇는 것. 저자는 47명의 예술가를 통해 보여준다. 1920년대 경성에서 고민하던 것과 2020년대 서울에서 고민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김주경과 정영주는 모두 도시를 그렸다. 주경과 노은주는 모두 정물화를 그렸다. 이상범과 권세진은 모두 수묵화를 그렸다. 이인성과 정수정은 모두 여성을 그렸다. 김기창과 현덕식은 모두 내면의 소리를 그렸다. 김환기와 손승범은 모두 시간을 그렸다. 장르도, 기법도, 시대도 다르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저자는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작품들을 통해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독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정영주의 불빛을 보며 "도시의 밤, 그 안에 가만히 안겨 있고 싶다는 바람"을 느끼고, 노은주의 꽃을 보며 "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고, 현덕식의 얼음을 보며 "못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술의 힘이다. 100년 전 그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캔버스 위의 점과 선과 색이 우리의 삶과 연결된다. 저자는 이 연결고리를 섬세하게 직조해내며, 독자들을 경성에서 서울로, 과거에서 현재로, 미술관에서 삶 속으로 이끈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읽고 나면, 미술관에 가고 싶어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가고 싶어진다. 한 번 스쳐 지나갔던 그림들 앞에 더 오래 서 있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나 자신에게, 내 삶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이 책은 미술사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근대와 현대를 잇는 것은 결국 시간이 아니라 삶이고,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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