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는 제갈량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당시 유비에게는 제대로 된 근거지조차 없었다. 조조와 손권이라는 거대한 세력 사이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였다. 그런 유비에게 제갈량은 단순히 전략이 아니라 비전을 선물했다. 북쪽은 조조에게, 동쪽은 손권에게 양보하라는 말. 그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였다. 당장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무리하게 벌이는 대신,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연합해 조조를 견제하는 전략. 제갈량은 유비에게 로드맵을 그려주었고, 실제로 훗날 그 그림대로 삼국이 정립되었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지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되 가능성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는 균형감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당장 쟁취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잃지 않는 것.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그런 지혜의 결정체였다.
적벽의 불길을 상상하며 나는 전율했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조조의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천하를 손에 넣을 것만 같았을 그 순간, 쇠사슬로 연결된 배들이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안정을 위한 장치가 재앙의 통로가 된 것이다. 주유와 제갈량의 화공 작전, 황개의 거짓 항복, 방통의 계책, 그리고 제갈량이 예측한 동남풍.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면서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전략의 승리가 아니라 절제의 승리였다. 조조는 자신의 힘을 과신했고, 상대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경계를 늦췄다. 반면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자신들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 철저히 준비할 수 있었다. 강함이 아니라 절제가 승리를 가져왔다.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 손권의 대립 상황에서 제갈량이 선택한 '빌리겠다'는 표현은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전쟁도 포기도 아닌 제3의 길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교의 기술이다. '빌린다'는 말은 묘한 여백을 만들어냈다. 일단 유비가 형주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 임시적 사용이었다. 손권 역시 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준 것이었다. 양쪽 모두에게 명분을 주는 언어. 그 언어 덕분에 동맹은 유지되었고, 유비는 세력을 재건할 시간을 벌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이런 순간을 마주하는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창의적인 제3의 길을 찾아야 하는 순간. 제갈량의 외교술은 정치적 수완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지혜의 표본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새겨진 메시지는 절제에 관한 것이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패배한 이유는 모두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술, 관우, 장비 같은 영웅들 역시 절제하지 못할 때 목숨을 잃었다. 특히 유비의 변화는 가슴 아팠다.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이성을 잃고 손권과의 전쟁을 감행한 유비. 평생 절제하며 신중하게 판단해온 그였기에, 절제의 끈을 놓은 순간의 파국이 더욱 극적이었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게 된 순간, 그는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절제하는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일생을 수련하듯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산다는 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내 삶이 지나치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수시로 돌아봐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제는 더욱 어려운 덕목이 되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를 외치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조정한다는 것은 나약함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삼국지는 분명히 말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순간 몰락이 시작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