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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모든 글을 기억한다 - 계속 쓰는 사람 정지우의 연결과 확장
정지우 지음 / 해냄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 이런 모임이 또 있을까. 정지우 작가는 매년 연말이면 '글쓰기 A/S 모임'을 연다고 한다. 글쓰기 모임을 마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지 묻고, 쓰고 싶은 마음을 북돋아주며, 글쓰기에 관한 고민을 들어준다. 제품도 아닌 사람의 글쓰기에 A/S를 제공한다니, 이보다 더 진심 어린 태도가 있을까? 대부분의 모임은 끝나면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작가는 10년 동안 글쓰기 모임을 이끌어오면서, 모임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공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꺼내 보인 사람들 사이의 특별한 유대다. 한 사람의 우울했던 순간, 기뻤던 순간, 아팠던 순간이 농축된 글을 함께 읽은 사이는 결코 가벼운 관계일 수 없다. 특히 글쓰기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서른이나 마흔에 작가가 된 이들에게 글쓰기는 삶을 기록하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도구였을 것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면의 상처, 남들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고민, 숨겨두었던 아픔들을 꺼내놓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지우 작가는 글쓰기란 바로 그런 과정이라고 말한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해도 되는, 아니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였음을 깨닫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함부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위로하는 방식으로 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핵심이다. 나의 상처를 드러내되, 그것이 폭력이 되지 않고 공감의 다리가 되도록 만드는 것. 내 안의 어둠을 마주하되, 그 안에서 빛을 찾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사람들은 많이 운다고 한다. 그리고 밤을 지새운다. 누군가는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며, 죽기 전에 이 모임을 떠올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힘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며,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사람은 변화한다.
글쓰기의 원칙은 맥락, 대조, 정확한 솔직함이다. 첫째, 맥락을 쓰라는 것이다. 돌담에 핀 꽃이 아름답다는 문장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이 그날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내 삶의 어떤 순간과 연결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서산 앞바다의 저녁노을을 보며 누군가는 첫사랑을, 누군가는 이별을, 또 다른 이는 죽음을 떠올린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각자의 맥락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김훈 작가의 소설 첫 문장처럼 주어와 동사만으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과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진정한 내 글이 된다.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꽃이 내려올 때 보이는 것처럼, 같은 길을 걷더라도 그때의 나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차이를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이 맥락을 쓰는 일이다.
둘째, 대조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좋은 글은 무언가와 싸운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은 반드시 대립하는 다른 메시지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쓴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과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는 뜻이다. 자기만의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세상의 통념과 다른 나만의 기준을 세운다는 의미다. 데이터는 그 자체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데이터를 비교하면 정보가 되고, 정보를 분석하고 깊이 사유하면 지식이 된다. 토마 피케티가 300년의 빅데이터를 분석하면서도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인용한 것처럼, 진정한 통찰은 비교와 대조, 그리고 인문적 사유에서 나온다.
셋째, 정확하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에는 자신의 허물까지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말해야 치료의 방법이 생기듯, 글쓰기에서도 정직함이 치유의 시작점이 된다. 정지우 작가가 이끄는 모임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얼굴이 밝아진다고 한다.
현대 사회는 팽창하는 우주처럼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는 곳이다. 개개인은 고립되어 있고,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SNS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글쓰기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을 때, 그 글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도 닿는다. 고립된 수험 생활을 하던 시절 정지우 작가가 쓴 글이 오히려 가장 많은 사람에게 다가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자신이 세상과 유리된 먼 섬에 있다고 느끼던 그 순간에 쓴 글이, 비슷한 고립감을 느끼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내 안의 우물을 깊이 파 내려가다 보면, 거기에는 타인과 이어지는 지하수가 있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 가장 솔직할 때, 가장 깊이 들어갈 때, 역설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과 만난다. 이것이 글쓰기의 신비다. 언어에는 소통의 꿈이 있고, 그 꿈은 글쓰기를 통해 실현된다. 글쓰기는 무한한 홀로 있음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이어짐이다.
정지우 작가는 작가들의 연대에 대해 느슨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너무 큰 기대나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유롭게 와해되거나 팽팽해지며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도록 둔다. 생명이 다하면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듯, 이 연대가 사라지는 날이 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대가 존재하는 한, 자신이 먼저 이 끈을 놓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이 태도가 아름답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책임감을 갖는 것. 영원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 글을 쓰고자 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글을 쓰고, 자기를 표현하며,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삶에서 글쓰기의 자리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일. 그를 통해 사람들이 깊이 연결되고, 누군가의 삶을 펼치는 데 서로 도움이 되는 일. 이것이 넷플릭스의 재미있는 드라마보다도 더 즐겁다고 말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진정한 보람이 무엇인지 배운다. 10년간 글쓰기 모임을 이끌어오며 수많은 사람을 만난 정지우 작가. 그중 여럿이 데뷔해서 동료 작가가 되었고, 다른 모임원들도 각자의 모임을 만들어 교류하고 있다. 이 '쓰는 사람들의 세계'는 한 사람의 진심에서 시작되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수억 광년씩 떨어진 밤하늘의 별들이 이어져 별자리를 만들듯, 밤을 건너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간이 하나의 별자리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