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위한 역사 - 과거의 세계가 미래를 구할 수 있을까?
로먼 크르즈나릭 지음, 조민호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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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잘못 배워왔다. 학창시절 외웠던 연도와 사건들, 시험이 끝나면 잊어버려도 무방한 지식의 더미. 역사는 그렇게 박제된 과거로, 추억의 앨범으로 취급되어왔다. 하지만 로먼 크르즈나릭이 제시하는 응용역사의 관점은 전혀 다른 지평을 연다. 역사는 미래를 설계하는 도구이자, 위기를 돌파하는 기술이다.

21세기 인류는 전례 없는 복합 위기의 한가운데 서 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며, 인공지능은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진화하고, 민주주의는 피로에 지쳐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불평등은 심화되고, 소비주의는 지구의 한계를 무시한 채 질주한다. 이 모든 위기의 공통된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 중심주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만 매몰되어, 과거로부터 배울 줄도 모르고, 미래 세대를 위해 책임질 줄도 모른다. 이러한 시대에 크르즈나릭은 과감한 제안을 한다. 미래학이 아니라 응용역사학이 필요하다고. 중세 알안달루스의 관용, 에도시대 일본의 순환경제, 18세기 커피하우스의 공론장, 엘리너 오스트롬이 발견한 공유지의 지혜. 이것들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 해법의 설계도다. 역사를 대하는 이러한 태도의 전환은 근본적이다. 역사는 예언자가 아니라 상담자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해주지는 못하지만,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괴테의 말처럼 삼천 년 세월을 쓰지 못하는 자는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갈 뿐이다. 과거의 인간들이 어떻게 위기를 넘어섰는지, 어떤 시스템이 작동했고 어떤 것이 실패했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를 발명하는 세대가 될 수 있다.


역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점진주의의 한계다. 기후위기나 AI 윤리, 민주주의 회복 같은 시급한 문제들은 느린 개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급진성'의 역할이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역사는 급진파가 파괴자가 아니라 진보의 촉매임을 보여준다. 수십 년간의 사회운동 연구가 밝혀낸 사실은 놀랍다.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성공적인 투쟁들은 급진적 조직이 주도할 때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다. 급진파는 극단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온건파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른바 오버턴의 창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토론의 조건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멸종반란과 같은 불복종 운동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행동은 과격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온건한 환경운동가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준다. 급진파가 없었다면 온건파조차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변화의 메커니즘이다.

크르즈나릭이 제시하는 '위기-운동-사상의 삼각고리'는 이러한 역학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위기가 사회운동을 낳고, 운동이 새로운 사상을 만들며, 사상이 다시 법과 제도를 변혁시킨다. 이 순환 속에서 시민의 집단행동은 정부를 결정적 의사결정 지점으로 밀어붙인다. 고대 그리스어로 '크리시스'란 바로 그런 전환의 순간을 의미했다. 하지만 급진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가 또한 가르쳐주는 것은 연대의 힘이다. 14세기 이븐 할둔이 말한 '아사비야', 즉 집단 연대는 사회의 내구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알안달루스 왕국에서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 케랄라와 핀란드에서 평등 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오스트롬이 발견한 공유지 관리 시스템이 작동한 것. 이 모든 사례의 중심에는 협력과 연결이 있었다. 접촉 이론은 이를 뒷받침한다. 서로 다른 집단이 평등한 조건에서 접촉하고 협력할 때, 편견과 분열은 감소한다. 500건 이상의 연구 중 94퍼센트가 이를 확인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하는 존재가 아니라 협력하는 존재다. 문제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경쟁을 강요하고 연대를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가장 실천적인 통찰은 '설계'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산업화 이전 일본은 제한된 자원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유지했다. 어떻게? 소비자 선택의 구조 자체를 재설계했기 때문이다. 에도 경제는 재생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파괴적인 선택지는 애초에 메뉴에 없었고, 순환적이고 지속가능한 선택지가 기본값이었다. 이것이 바로 '설계에서 배제'와 '설계에 포함'의 전략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와 같은 근본적 재설계다. 커피하우스의 사례도 설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18세기 유럽에서 커피하우스는 단순한 음료를 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공론장이었다. 인쇄술이 정보를 민주화했다면, 커피하우스는 대화를 민주화했다.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읽고,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이 공간의 설계 자체가 민주적 문화를 만들어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쇄술이 종교전쟁을 부추기는 증오의 도구로 악용되었듯, 소셜미디어도 분열과 극단화를 조장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작동하는 구조와 공간의 설계다. 우리는 디지털 공론장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경청과 숙의를 장려하는 구조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분노와 즉각성을 증폭시키는 구조에 머물 것인가? 오스트롬의 공유지 연구 역시 설계의 문제다. 그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통념을 반박했다. 실제 역사에서 수많은 공동체가 공유 자원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어떻게? 민주적 자치 체제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시장도 국가도 아닌 제3의 길, 협력적 거버넌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AI와 유전공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술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기술이 누구의 소유이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누가 혜택을 받는지는 설계의 문제다. 조너스 소크가 소아마비 백신의 특허를 거부하며 "특허는 없습니다"라고 선언한 것, 협동조합과 분산 소유권 모델이 한 세기 이상 작동해온 것. 이것들은 우리에게 다른 설계가 가능하다는 역사적 증거다.


궁극적 질문은 윤리적이다. 우리는 어떤 조상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도덕적 수사가 아니라,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다. 소크 백신의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백신을 인류와 미래 세대를 위한 선물로 여겼다. 보눔 코무네, 즉 공동선을 지향했다. 개인의 선택을 확장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모든 아이를 돕기 위한 기술이었다. 이것이 좋은 조상의 태도다. 케랄라와 핀란드의 평등 투쟁도 세대를 넘어선 비전을 보여준다. 그들은 식민주의와 가부장제, 극심한 빈곤에 맞서 싸웠다. 끊임없이 조직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먼저 쏴라"고 외쳤다. 그들의 투쟁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 세대가 더 평등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바이오필리아, 즉 생명애는 이러한 윤리의 확장이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재통합하는 것.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생명에 대한 본능적 친밀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문명의 내구성을 높이는 궁극의 윤리다. 우리가 다른 종과의 연대를 느낄 때, 지구의 생물리학적 한계를 존중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문명이 가능하다. 네이트 하겐스가 말하는 '거대한 단순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화석연료 기반의 산업문명은 지속될 수 없다. 파티가 끝나는 순간이 온다. 그때 우리는 부러질 것인가, 구부러질 것인가? 아사비야와 바이오필리아는 우리가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질 수 있도록 돕는 두 기둥이다. 집단 연대와 생명애를 바탕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태문명으로 전환할 수 있다. 좋은 조상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결정을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점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경제·교육·기술의 선택을 할 때마다 물어야 한다. "후손이 이 결정을 감사할 것인가?" 이 질문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현재 중심주의에 갇혀 있다는 신호다.


저자의 응용역사의 아름다움은 추상적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천될 수 있고, 실천되어야 한다. 거대한 시스템의 변화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일상에서부터 문명 회복의 패턴을 연습할 수 있다. 사유 루틴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하루 한 번, 오늘 마주한 문제를 역사 속 사례와 연결해보는 것이다. 환경 문제라면 에도의 순환경제를, 갈등 상황이라면 알안달루스의 관용을, 정보 과부하라면 커피하우스의 공론장을 떠올려본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시간의 관점을 훈련하는 습관이다. 연대 루틴은 협력의 감각을 몸에 새기는 실험이다. 작은 팀이나 가족 단위로 공유지 프로젝트를 시도해본다. 공동정원, 공용서가, 에너지 절약 챌린지. 이런 작은 실험들이 오스트롬이 말한 협력적 거버넌스의 씨앗이 된다.

소비 루틴은 설계를 체화하는 과정이다. 한 달간 에도노믹스 챌린지를 해본다. 순환소비, 제로웨이스트, 로컬푸드. 지속가능성은 거대한 운동이 아니라 생활의 패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론 루틴은 디지털 소음 대신 숙의의 공론장을 복원하는 시도다. SNS 대신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소규모 토론을 조직한다. 시간을 제한하고, 근거 중심으로 말하며, 경청하고 요약하고 제안하는 3단계 대화를 연습한다. 이것이 18세기 커피하우스가 만들어낸 민주적 문화의 현대적 번역이다. 윤리 루틴은 기술과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내가 사용하는 플랫폼과 서비스의 소유 구조와 윤리 기준을 점검한다. 가능한 한 협동조합형, 공공형 플랫폼을 선택한다. AI와 인간의 거리두기를 실천한다. 기술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성을 회복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준다. 인간은 부러질 수도, 구부러질 수도 있다. 부러짐은 붕괴이고, 구부러짐은 혁신이다. 로마는 부러졌고, 비잔틴은 구부러졌다. 마야 문명은 부러졌고, 중국은 여러 번 구부러졌다. 21세기 인류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 AI, 불평등, 민주주의의 피로. 이 모든 위기는 우리를 부러뜨릴 수도, 구부러지게 할 수도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응용역사의 지혜를 얼마나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크르즈나릭이 말하는 근본적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인간들이 반복적으로 붕괴를 넘어섰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해법은 시스템이 아니라 연대에 있었고, 기술이 아니라 협력에 있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응용역사는 과거를 능동적으로 동원해 미래를 발명하는 기술이다.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는 세대가 아니다. 과거의 지혜를 현재의 행동으로, 현재의 행동을 미래의 유산으로 바꾸는 세대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역사의 실험실로 들어가 문명 회복의 도구를 꺼내들고, 일상에서 연대와 생명애를 실천하며, 모든 선택을 후손의 관점에서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조상이 될 때, 비로소 근본적 희망은 현실이 된다. 부러지지 말고, 구부러지자. 그것이 응용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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