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이미 내 안에 있습니다 - 미혹의 시대를 건너는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필사집 원명 스님의 필사집
원명 지음 / 오아시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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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빠름에 길들여져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로 생각하고, 스크롤을 넘기는 순간에 판단한다. 그 와중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일 것이다. 원명 스님의 필사집은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주는 초대장과 같다. 펜을 들고 한 글자씩 경전을 따라 쓴다는 행위. 얼핏 보면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느린 행위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빠른 변화가 일어난다. 손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정신도 함께 느려지며 고요해진다. 박문호 박사가 말한 '손의 귀환'이란 표현이 정확히 이를 가리킨다. 우리는 손으로 쓰는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하고, 흩어진 감각을 모아 중심을 잡는다. 스님은 50년 수행의 정수를 담아 불교 3대 경전을 현대어로 풀어냈다. 반야심경, 금강경, 천수경. 이 고전들이 품고 있는 심오한 진리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것은, 깨달음이란 특정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반야심경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공(空)'이다. 많은 이들이 공을 무(無)와 혼동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 허무한 공허함. 하지만 스님은 공이란 오히려 '충만함'이라고 설명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참으로 비어 있으면서도 묘하게 가득 존재하는 상태. 이 역설적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소유'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어야 안심한다. 물질을, 관계를, 지위를, 심지어 생각과 감정조차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진다. 고정된 실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역설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집착 없이 소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소유를 경험한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도달하게 되는 묘유의 경지. 이는 단순한 철학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체험 가능한 경지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할수록 관계는 질식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일 때, 역설적으로 더 깊은 사랑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공의 지혜가 우리 삶에 적용되는 방식이다.

스님은 오온(五蘊)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 모두 공하다고 말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실체 없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이 통찰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바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고통은 '나'라는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나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들. 하지만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모든 집착의 허구성을 본다. 나라는 존재조차 끊임없이 변하는데, 무엇을 그토록 붙들고 있어야 하는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넌다는 이 구절은, 실제로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볼 때 고통이 사라진다는 경험적 진실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 속에서 산다. 경쟁 사회에서 오는 불안, 관계에서 오는 상처, 미래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결국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스님의 해설 중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한함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만약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끝이 없다면 시작할 필요도 없고, 소중히 여길 이유도 없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나고, 이별이 있기에 만남이 소중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열심히 살자'는 상투적 조언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온전히 깨어 있으라는 것. 아픈 사람이 건강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잃고 나서야 가치를 안다. 하지만 공의 지혜를 체득한다면, 잃기 전에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임을 아는 것이 허무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을 더 깊이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보리살타의 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菩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보살은 위대한 지혜에 의지하여 마음의 걸림을 놓는다. 마음에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도 사라진다. 우리의 일상은 온갖 걸림투성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현재를 놓친다. 이 모든 걸림은 결국 두려움에서 온다. 잃을까봐, 상처받을까봐, 실패할까봐. 하지만 공의 지혜로 무장한 마음은 다르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현실에 대응할 수 있게 한다.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책은 우리에게 필사라는 수행을 권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쓰면서, 그 의미를 곱씹고, 마음에 새기는 과정. 이것이 어떻게 현대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가? 필사는 멀티태스킹의 정반대다. 오직 한 가지에 온전히 집중하는 행위. 손과 눈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 과정에서 우리의 번뇌는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감각이 깨어나며, 지혜가 현실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스님의 해설을 따라 경전을 필사하는 것은, 부처의 지혜를 내 몸과 마음에 각인시키는 수행이다. 펜 끝이 종이를 지나는 그 찰나에, 2,500년 전 붓다의 깨달음과 지금 여기의 나 사이에 시공을 초월한 연결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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