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라틴어 문장 하나쯤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티나 씨.야마자키 마리 지음, 박수남 옮김 / 윌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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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서재에서 라틴어 격언들을 읽다 보면, 묘하게도 고대 로마의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2000년이라는 시간의 강 을 거슬러 올라가, 토가를 두른 철학자들 사이를 거니는 기분. 그런데 정작 놀라운 건 그들이 고민하던 문제가 지금 내가 마주한 삶의 질 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문장 하나쯤은 갖고 산다. 어떤 이에게는 부모님이 반복해서 들려주던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힘들 때 우연히 읽은 책의 한 구절이 평생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되뇌던 문장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때로는 부적처럼, 때로는 나침반처럼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

라틴어를 '죽은 언어'라고 부르는 건 참 역설적이다. 일상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사유의 깊이와 삶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생생하게 숨 쉬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걷혀 나가 고, 본질만 남아 더욱 선명해진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라틴어 문장들이 격언이나 경구로만 소비되지 않고 살아있는 맥락 속에서 호흡한다는 점이었다. 라티나와 야마자키 마리의 대화는 마치 오래된 친구들이 카페에 앉아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서의 실제 경험담들, 현대 사회의 구체적인 상황들과 맞물리면서 고대의 지혜는 박제된 과거가 아닌, 지금 의 이야기가 되었다.

어떤 문장은 읽는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스무 살에 읽은 문장과 마흔 살에 다시 읽는 같은 문장은 완전히 다른 울림을 준다."이 또한 언젠가 즐거운 추억이 되리라는 말도 그렇다. 한창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이 문장을 만났다면, 어쩌면 공허 한 위로로 밖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나서 뒤돌아보았을 때, 정말로 그 시간이 추억이 되었던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이 문장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이 문장은 시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 통찰이다. 지금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경험은 결국 우리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한 조각이 된다는 것. 삶은 현재진행형이 지만, 동시에 과거로 축적되면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역설이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건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의 진짜 뿌리를 발견하는 순간들이었다. '카르페 디엠'이나 '아모 르 파티' 같은 표현들은 현대 문화 속에서 이미 하나의 브랜드처럼 소비되고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태어난 원래의 맥락, 그것을 처음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의 상황과 의도를 알고 나면, 같은 문장이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온다. '카르페 디엠'을 현재를 즐기라는 향락주의적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과, 유한한 삶 속에서 매 순간의 가치를 온전히 인식하며 살라는 실존적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천지 차이다. 호라티우스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저 재미있게 놀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을 의식하며, 그렇기에 더욱 의 미 있게 현재를 살아가라는 무게 있는 조언이었다.

한 권의 책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으며 그 안에서 길을 발견하는 경험. 한 문장 앞에 오래 머물며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 보는 시간. 그런 깊이 있는 독서 경험이 우리를 진정으로 성장시킨다. 백 권의 책을 훑어보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 드는 것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 이 책 자체가 그런 깊이 읽기인 것 같다. 65개의 라틴어 격언을 빠르게 훑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각 문 장 앞에서 멈춰 서서 그것이 태어난 배경, 그것이 품은 의미, 그것이 나의 삶과 맺는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른 책이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에게 진짜 중요한 문장은 무엇일까. 내 삶을 지탱하고, 방향을 제시하며, 흔들릴 때 붙잡을 수 있는 그런 문장은 어떤 것일까? 책에 소개된 65개의 문장 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오래 남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과 공명하는 문장들이었다. 어쩌면 몇 년 후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전혀 다른 문장들이 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좋은 문장들이 가진 힘이다. 읽는 이의 상태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중요한 건 누군가가 정해준 '명문장'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과 진정으로 만나는 문장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라틴어든, 한글이든, 영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문장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일 것이다.

라틴어를 배우지 않아도, 고대 로마사를 깊이 알지 못해도,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책이 정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라틴어가 아 니라 삶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언어는 사 유의 틀이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며, 삶을 대하는 태도다. 라틴어 격언들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보편적 인간 경험의 본질 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를 넘어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이 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이다. 이제 나는 일상 속에서 이 문장들을 다시 만날 것이고,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의미를 발견할 것 이다. 어떤 문장은 내 인생의 특정 시기를 대표하는 문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스무 살의 문장, 서른 살의 문장, 마흔 살의 문장. 그렇 게 문장들을 모아가다 보면, 그것이 곧 내 삶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기대를 가지면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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