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담은 기계 - 인공지능 시대를 마주하는 인지심리학자의 11가지 질문
정수근 지음 / 심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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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조금 설렌다. 무심코 지나치던 책등 하나가 시선을 붙잡고, 표지를 펼치는 순간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기분이 든다. <마음을 담은 기계>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제목부터 묘했다. 마음을 담은 기계라니. 차갑고 정밀한 금속 덩어리에 따뜻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이 담길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만든 기계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투영하고 있다는 뜻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결국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요즘 세상은 인공지능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이 날씨를 알려주고, 출근길에는 음악 앱이 내 기분을 읽은 듯 딱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준다. 일하다 막히면 챗GPT에게 조언을 구하고, 퇴근 후엔 넷플릭스가 추천한 영화를 본다. 어느새 인공지능은 공기처럼 우리 곁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이 기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뿐,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정수근 교수의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건 안도감이었다. 이 책은 인공지능을 찬양하지도, 무조건 경계하지도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질문을 던진다. 인공지능은 정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창의성이란 무엇이며, 기계도 창의적일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이 기술과 함께 자라며 어떤 사람이 될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기술적 호기심을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비유는 인공지능을 '거울'로 보는 시선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 나인데, 동시에 나는 아니다. 좌우가 바뀌어 있고, 깊이감이 없으며,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거울을 통해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있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때로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닫는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짜 인간은 아니지만, 우리가 만든 데이터의 패턴을 반영하며 우리 자신을 비춰준다. 연말이 되면 챗GPT도 게을러진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묘하게 찡했다. 기계가 실제로 피곤함을 느낄 리 없다. 그저 학습한 데이터 속에 담긴 인간의 패턴—연말에 사람들이 여유를 부리고, 업무 강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그대로 재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슬프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우리의 습관과 결점, 심지어 나태함까지도 기계에 고스란히 복사된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럽고 애잔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에 갇혀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남긴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우리의 편견, 욕망, 불완전함이 모두 그 안에 녹아든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문제는 사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거울이 비뚤어졌다고 투덜대기 전에, 거울 앞에 선 우리 자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는 어떤 데이터를 남기고 있는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다음 세대에 어떤 유산으로 전해질 것인가.


책을 읽으며 자꾸 떠오른 장면이 있다. 몇 년 전, 처음 스마트 스피커를 샀을 때였다. "오늘 날씨 어때?"라고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그 기계가 신기하면서도 어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고마워"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스피커가 말을 못 알아듣자 짜증을 냈다. "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라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기계에게 감정을 투사하고, 그것이 나를 이해해주길 기대했다니 말이다. 정수근 교수는 이런 현상을 의인화 본능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오래된 차에 이름을 붙이고, 인형을 소중히 다루며, 심지어 바위에도 마음이 있다고 느낀다. 하물며 말을 하는 기계에게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감정이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스마트 스피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음성 패턴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적절한 답을 찾아 출력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는 그것이 나를 알아준다고 착각한다. 이 착각은 위험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 외로운 노인이 AI 챗봇과 대화하며 위로받는다면 그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진짜 관계와 가짜 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피상적인 상호작용에 만족하며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소홀히 할 위험이 있다. 마음이 없는 것에 마음을 투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본능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고, 음악을 작곡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든다. 놀랍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어딘가 섭섭하기도 하다. 예술은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믿었는데, 이제 그 경계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하지만 정수근 교수의 설명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창의성은 단순히 결과물의 참신함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작위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왔다고 해서 그게 음악이 될까. 원숭이가 키보드를 두드려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나온다면 그건 예술일까. 아니다. 예술에는 의도가 있고, 과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 있다. 창작자는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작품을 완성한다. 그 과정 자체가 창의성의 본질이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학습하고 조합할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통도, 기쁨도, 망설임도 없다. 인공지능은 왜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도, 누구에게 전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결과물이라도 인간이 만든 것과 기계가 만든 것을 다르게 평가한다. 창의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결국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공지능을 배척해야 할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도구다. 붓이든 카메라든 컴퓨터든, 도구는 창작자의 손에 들렸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쥔 손이고, 그 손을 움직이는 마음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경험, 감정, 의지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영역이다.


책 속에서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때로는 왜곡하며, 심지어 없던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불완전함이 인간을 약하게 만들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망각이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컴퓨터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 번 저장된 데이터는 삭제하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 있다. 정확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때로는 한계가 된다. 지나치게 특정 데이터에 의존하면 유연성을 잃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오히려 인간의 망각을 모방하려 한다. 의도적으로 일부 정보를 삭제하거나 무작위로 연결을 끊어 기계가 더 창의적이고 적응적으로 학습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결함이 기계를 발전시키는 열쇠가 된 셈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완벽해지려 애쓸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수하지 않으며, 최적의 선택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완벽함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잊고, 후회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상처는 아물며 흉터가 되고, 그 흉터는 우리가 살아온 증거가 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이런 경험은 가질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부분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요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둘러싸여 자란다. 말을 배우기 전에 터치스크린 조작법을 익힌다. 질문이 생기면 부모보다 유튜브에 먼저 묻는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될까? 정수근 교수는 단정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교육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 맞춤형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창의적 활동을 돕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있다. 지나친 의존은 깊이 사고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고, 인간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나는 조카가 AI 스피커와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헤이, 공룡은 왜 멸종했어?" 스피커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조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편리하긴 했지만 왠지 서운했다. 예전에는 그런 질문을 나에게 했을 텐데. 나는 완벽한 답을 주지 못했겠지만, 함께 백과사전을 뒤적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호기심을 키워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카는 정보를 얻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기다림, 탐구, 관계 맺음 같은 것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아이들에게 기술을 무조건 멀리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신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공지능이 주는 답을 맹신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무엇보다 인간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수근 교수가 던진 질문들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정말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인공지능에 마음을 투영할까.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인간다워질까, 아니면 덜 인간다워질까. 답은 아직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명확한 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돌아보게 하며, 다시 나아가게 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인공지능은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턴, 습관, 편견, 아름다움, 결함을 본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신기하며, 때로는 두렵다. 하지만 거울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거울 속 모습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선 진짜 우리니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가 결국 우리를 정의한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사랑하고, 상처받고, 꿈꾸고, 후회하는 건 여전히 우리 몫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답고, 연약하지만 강인하며, 유한하지만 의미 있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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