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때로는 왜곡하며, 심지어 없던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불완전함이 인간을 약하게 만들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망각이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컴퓨터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 번 저장된 데이터는 삭제하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 있다. 정확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때로는 한계가 된다. 지나치게 특정 데이터에 의존하면 유연성을 잃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오히려 인간의 망각을 모방하려 한다. 의도적으로 일부 정보를 삭제하거나 무작위로 연결을 끊어 기계가 더 창의적이고 적응적으로 학습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결함이 기계를 발전시키는 열쇠가 된 셈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완벽해지려 애쓸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수하지 않으며, 최적의 선택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완벽함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잊고, 후회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상처는 아물며 흉터가 되고, 그 흉터는 우리가 살아온 증거가 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이런 경험은 가질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부분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요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둘러싸여 자란다. 말을 배우기 전에 터치스크린 조작법을 익힌다. 질문이 생기면 부모보다 유튜브에 먼저 묻는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될까? 정수근 교수는 단정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교육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 맞춤형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창의적 활동을 돕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있다. 지나친 의존은 깊이 사고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고, 인간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나는 조카가 AI 스피커와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헤이, 공룡은 왜 멸종했어?" 스피커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조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편리하긴 했지만 왠지 서운했다. 예전에는 그런 질문을 나에게 했을 텐데. 나는 완벽한 답을 주지 못했겠지만, 함께 백과사전을 뒤적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호기심을 키워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카는 정보를 얻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기다림, 탐구, 관계 맺음 같은 것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아이들에게 기술을 무조건 멀리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신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공지능이 주는 답을 맹신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무엇보다 인간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