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조지무쇼 지음, 서수지 옮김, 와키무라 고헤이 감수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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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위대한 영웅들의 업적이나 전쟁의 승패, 혁명의 성공과 실패로 기억한다. 그러나 역사책 한 켠에 작은 글씨로 적힌 전염병의 발발은 때로 그 어떤 왕이나 장군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류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의 투쟁 속에서 사회 구조를 바꾸고 문명의 방향을 전환해왔다. 감염병은 사람을 죽일뿐만 아니라, 권력의 지형을 바꾸고, 경제 시스템을 재편하고, 인간의 사고방식까지 뒤흔들었다. 이번에 조 지무쇼의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을 읽으며 역사속의 감염병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을 기회를 가졌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재앙 중 하나였다.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통해 전파된 이 질병은 감염자의 몸을 검게 변색시켜 '흑사병'이라는 공포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200년 가까이 인구 증가가 멈춰 섰다. 도시와 마을이 텅 비었고, 들판에는 곡식을 거둘 사람이 없었다. 시체를 묻을 사람조차 부족해 길가에 방치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재앙은 역설적으로 중세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농노제로 대표되는 중세의 신분제는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전제 위에 성립했다. 그러나 인구가 급감하자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귀한 존재가 되었다. 영주들은 농민을 붙잡아두기 위해 임금을 올려주고 처우를 개선해야 했다. 힘의 균형이 역전된 것이다. 이전까지 땅에 묶여 평생 영주를 섬기던 농민들은 이제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다.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시작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 변화였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왕도 귀족도 농민도 똑같이 페스트에 쓰러졌다. 신분이나 재산이 죽음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깨달음은 중세의 위계질서에 균열을 냈다. 사람들은 신에게만 의존하는 대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갖기 시작했다.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관료가 교회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페스트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놓인 디딤돌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전혀 예상치 못한 적이 나타났다. 스페인 독감으로 불린 인플루엔자 팬데믹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불과 몇 년 만에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감염시키고 최소 4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독감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병의 이름에 스페인이 붙게 된 경위다. 실제로는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먼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전쟁 참전국들은 사기 저하를 우려해 언론을 통제했다. 반면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은 언론 자유가 보장되어 독감 확산 소식이 공개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과적으로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쟁이 정보의 흐름마저 왜곡시킨 사례다. 독감은 전선의 양측 모두를 강타했다. 참호 속에서 비좁게 생활하던 병사들 사이에서 감염이 급속도로 퍼졌고, 전투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결국 전쟁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고, 종전이 앞당겨졌다. 역설적이게도 수천만 명을 죽인 감염병이 전쟁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 시기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처음 시행되면서 흥미로운 사회 현상도 나타났다. 마스크를 쓰면 담배를 피울 수 없었기에 담배 산업 매출이 절반으로 급감했다. 일부 의사들과 시민들은 '마스크 반대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안전이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논쟁이 벌써 한 세기 전에 시작된 셈이다.


19세기는 콜레라의 시대였다.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서 유래한 이 질병은 물을 통해 전파되며 극심한 설사와 탈수를 일으켰다. 하루에 수십 리터의 물 설사가 나오면서 환자는 급속도로 쇠약해지고 사망에 이르렀다. 콜레라는 교역로를 따라 빠르게 퍼져나가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콜레라의 가장 큰 유산은 도시 위생 시스템의 혁명이다. 런던의 의사 존 스노는 브로드 스트리트에서 발생한 콜레라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사망자 발생 지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특정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에게서 감염이 집중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질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역학 조사였다. 파리는 콜레라 발생 이후 도시 전체의 상하수도 시스템을 재설계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깨끗한 수돗물과 하수 처리 시설은 사실 콜레라와의 싸움에서 얻은 산물이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 역시 콜레라 대책에 사활을 걸었다. 근대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감염병 관리 능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콜레라는 단순한 질병을 넘어 국가의 선진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침략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현지 군대가 아니라 모기였다. 말라리아와 황열병이라는 열대성 감염병은 유럽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옮기는 기생충 질병으로, 적혈구를 파괴해 심각한 빈혈을 일으킨다. 황열병 역시 모기를 매개로 하며 간 손상으로 인해 피부가 노랗게 변하는 증상을 보인다. 19세기 프랑스가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도했을 때 수만 명의 노동자가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공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나중에 미국이 이 사업을 인수했다. 미국은 모기가 황열병의 매개체라는 사실을 밝혀낸 후 대대적인 모기 박멸 작전을 펼쳤다. 습지를 메우고 고인 물을 제거하며 방충망을 설치했다. 그 결과 황열병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고 운하를 완공할 수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단순한 토목 공학의 승리가 아니라 감염병 관리의 승리이기도 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은 제국주의 확장의 핵심 도구였다. 기나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이 약물 덕분에 유럽인들은 열대 지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기나나무 산지를 점령하자 연합군은 퀴닌 부족에 시달렸고, 급히 합성 대체제를 개발해야 했다. 작은 나무 껍질 하나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것이다.


16세기 스페인이 불과 몇백 명의 병력으로 남미의 거대한 아스테카제국과 잉카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기의 우월함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인들이 가져온 천연두가 원주민들을 초토화시켰다. 유럽인들은 오랜 세월 천연두에 노출되어 어느 정도 면역을 갖고 있었지만, 고립되어 살아온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인구의 90퍼센트가 감염병으로 사망했다는 추정도 있다. 천연두는 무기로도 활용되었다. 영국군은 북미 원주민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연두 환자가 사용한 담요를 선물로 주었다. 생물학적 병기의 초기 형태였다. 천연두는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며 전 세계에 유럽인의 지배를 확산시켰다. 다행히 천연두는 인류가 완전히 퇴치한 최초의 감염병이 되었다. 18세기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종두법이 시작이었다. 소에게서 발생하는 우두에 감염되면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한 제너는 우두를 사람에게 접종하는 예방법을 고안했다. 이것이 현대 백신의 원형이다. 20세기 들어 세계보건기구가 주도한 대대적인 백신 접종 캠페인 끝에 1980년 천연두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국제 협력과 과학의 힘이 감염병을 이긴 역사적 사례다.

결핵은 '하얀 페스트'로 불리며 산업혁명기 유럽을 괴롭혔다. 공장과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환기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분진과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결핵에 쉽게 노출되었다. 도시의 빈민가는 결핵균의 온상이었다. 흥미롭게도 결핵은 낭만주의 시대에 일종의 '예술가의 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창백한 얼굴과 쇠약한 모습이 고상하고 감성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쇼팽, 키츠, 카프카 같은 예술가들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들의 죽음은 작품에 비극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은 "나는 결핵에 걸려 죽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핵의 실상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이는 가난과 열악한 노동 환경의 산물이었다. 20세기 중반 스트렙토마이신을 비롯한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선진국에서는 결핵이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위협적이며, 최근에는 약제 내성 결핵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결핵은 여전히 에이즈, 말라리아와 함께 3대 감염병으로 분류된다.


역사상 수많은 전투에서 실제 전투보다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았다. 이질과 티푸스는 군대를 괴롭힌 대표적인 질병이다. 이질은 세균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을 통해 전파되며 극심한 설사를 일으킨다. 위생 상태가 열악한 전선에서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백년전쟁 시기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이질로 큰 피해를 입었고, 전투의 승패가 어느 쪽이 이질을 더 잘 견디느냐에 달려 있기도 했다. 티푸스는 이가 옮기는 발진티푸스와 물을 통해 전파되는 장티푸스로 나뉜다. 발진티푸스는 특히 추운 지역에서 사람들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목욕을 하지 못할 때 이가 번성하면서 퍼졌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에도 티푸스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60만 대군이 러시아로 진격했지만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티푸스로 대부분이 죽었다. 결국 파리로 돌아온 병력은 몇만 명에 불과했다. 레닌은 "이가 이기느냐, 사회주의가 이기느냐"라고 말하며 러시아 혁명 후 티푸스 퇴치에 사활을 걸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면 먼저 감염병을 이겨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DDT 같은 살충제가 보급되면서 발진티푸스는 크게 줄어들었다.

매독은 성적 접촉을 통해 전파되는 세균성 질병이다. 초기에는 피부에 궤양이 생기지만 치료하지 않으면 뇌와 심장까지 침범해 결국 죽음에 이른다. 15세기 말 유럽에 갑자기 나타난 매독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콜럼버스의 선원들이 아메리카에서 가져왔다는 설과 유럽에 원래 존재했다는 설이 대립한다. 흥미로운 점은 매독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이다.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에는 매독에 걸린 것이 '좀 놀아본 남자'라는 증거로 여겨져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매독으로 생긴 얼굴 자국이 미남, 미녀의 조건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이는 감염병에 대한 인식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6세기 독일의 푸거 가문은 매독 치료제라고 속여 과이악 나무를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실제로는 효과가 없었지만 절박한 환자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했다. 20세기 초 독일의 과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살바르산이라는 최초의 합성 항생제를 개발하면서 비로소 매독 치료가 가능해졌다. 이는 현대 화학요법의 시작이기도 했다.


감염병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이 드러난다. 인류는 결코 감염병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생물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항생제가 개발되면 내성균이 등장하고, 백신이 만들어지면 변이 바이러스가 나타난다. 이는 진화생물학자 리 밴 밸런이 제시한 '붉은 여왕 가설'과 일맥상통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같은 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달려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생명체는 주변 환경과 경쟁자에 맞춰 계속 진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인류가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면 미생물도 그에 적응해 진화한다.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한 페니실린은 감염병 치료에 혁명을 가져왔다.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한 이 물질은 세균의 세포벽을 파괴하면서도 인체에는 무해했다. 수많은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은 현대 의학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만에 페니실린 내성균이 나타났고, 이제는 다양한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가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감염병은 사람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 구조를 바꾸고, 과학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고, 인간의 세계관까지 변화시켰다. 페스트는 중세의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적 노동 관계를 만들었다. 콜레라는 도시 위생의 혁명을 가져왔고, 천연두는 백신이라는 위대한 발명을 낳았다. 감염병과의 싸움은 또한 국제 협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병원균은 국경을 인식하지 못한다. 한 지역의 발병은 곧 전 세계의 위협이 될 수 있다. 천연두 퇴치는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 이룬 성과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지금, 우리는 감염병이 여전히 진행형의 위협임을 실감한다. 기후 변화로 모기의 서식 범위가 넓어지고, 산림 파괴로 야생동물과의 접촉이 증가하며, 전 지구적 이동이 일상화된 오늘날, 새로운 감염병이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감염병은 막을 수 없지만 대비할 수는 있다. 과학적 연구, 공중보건 시스템의 구축, 국제 협력 체계의 마련이 필요하다. 또한 감염병은 사회의 약한 고리를 드러낸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지역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다. 감염병 대응은 곧 사회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인류의 공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완전히 없앨 수 없지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고, 과학과 연대의 힘을 믿으며,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것이 감염병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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