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시카고 대화재 이후 재건된 도시는 인류 건축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루이스 설리번의 오디토리엄 빌딩은 철골 구조라는 혁신 기술과 고전적 미학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이는 단순히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 도시에서 제한된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현실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카고파 건축가들이 창조한 마천루는 20세기 도시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수직으로 뻗어 오르는 건물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기술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동시에 이는 개인주의와 경쟁을 바탕으로 한 미국적 가치관의 건축적 구현이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아르누보 운동이 산업화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빅토르 오르타의 타셀 저택에서 볼 수 있는 유기적 곡선과 철재 구조의 결합은 기계 문명 속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장식적 취향이 아니라, 산업화로 인해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문화적 저항이었다.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이러한 경향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사례다. 직선이 전혀 없는 이 건물은 자연 그 자체가 건축이 된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것이고 곡선은 신의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기계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자연에 대한 종교적 경외심을 동시에 표현한 말이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이전의 모든 양식과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건축을 창조하려 했다. 아돌프 로스의 "장식은 범죄다"라는 선언은 단순히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은 건축,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건축에 대한 철학적 선언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명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사보아 저택에서 구현된 '근대 건축의 5원칙'은 건축을 귀족적 예술품에서 해방시켜 모든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필로티,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문, 옥상 정원, 자유로운 입면은 모두 인간의 건강하고 합리적인 삶을 위한 처방전이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이끈 바우하우스는 이러한 모더니즘 이념을 교육을 통해 체계화하려 한 혁명적 시도였다. 바우하우스 데사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선언문이었다. 장식을 배제한 기하학적 형태, 기능에 충실한 공간 구성, 산업 재료의 솔직한 사용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Less is more"라는 철학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대리석, 유리, 철이라는 최소한의 재료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공간적 경험의 질을 추구했다. 이는 소비주의 문화에 대한 은밀한 비판이자, 진정한 럭셔리는 과시가 아니라 정신적 만족에 있다는 메시지였다.
1930년대는 건축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된 시대였다. 스탈린 체제하의 소비에트 궁전 계획은 사회주의의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선전 도구였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건축 역시 무솔리니의 권력욕을 건축적 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주세페 테라니의 카사 델 파시오는 모더니즘의 합리성과 고전주의의 권위를 결합시켜 파시즘의 '현대적이면서도 권위적인' 이미지를 창조했다. 반면 미국의 아르데코 건축은 자본주의의 활력과 기술 문명에 대한 낙관을 표현했다. 크라이슬러 빌딩의 화려한 금속 장식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압도적인 높이는 대공황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려는 미국인들의 의지를 상징했다. 이는 이념적 대립이 건축을 통해서도 표현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가들은 혁명의 이상을 건축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 콘스탄틴 멜니코프의 소련관 파빌리온은 기존의 모든 건축 규칙을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창조했다. 이는 단순한 미적 실험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에 대한 탐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은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책에 의해 탄압받았다. 혁명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체제의 안정성과 충돌했고, 건축가들은 서구로 망명하거나 침묵을 강요받았다. 이는 예술과 정치권력 간의 긴장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