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제시한 사회 비전은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제도들의 원형이었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령연금, 실업수당, 8시간 노동제, 파업권 보장 등은 모두 이들이 먼저 주장한 것들이었다. 해방 후 북조선이 "1950년대 중반에 공식적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최초의 제3세계 복지국가 가운데 하나"가 된 것도 이러한 유산과 무관하지 않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남한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는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헌법은 처음부터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기본 정신으로 삼았다. 심지어 박정희의 경제 개발도 '경제 계획'이라는 사회주의적 개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사회주의적 사고가 훨씬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복지국가 개념,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적 발상 등은 모두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전 지구적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 변화, 심화되는 불평등, 민주주의의 후퇴, 파시즘의 부활 등이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들의 국제주의적 시각은 오늘날 전 지구적 과제 해결에 필요한 연대 의식을 제공한다. 기후 위기나 팬데믹 같은 문제는 일국적 해결책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전 지구적 협력이 필요하다. 식민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초국경적 연대 정신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둘째,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현재 한국 사회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강력한 혈통 중심 민족주의는 사회 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민족을 역사적 구성물로 이해하고 보편적 휴머니즘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각은 "포스트 종족-민족주의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셋째,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참여적 의사결정에 대한 강조는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유용하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 현장 민주주의, 시민의 정치 참여 확대 등은 민주주의를 더욱 실질적이고 포용적으로 만드는 방안이다. 넷째, 복지국가와 사회적 평등에 대한 비전은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상교육, 무상의료, 기본소득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들의 포괄적인 사회보장 구상은 여전히 유효한 참고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