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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의 맛
그림형제 지음 / 펜타클 / 2025년 6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던지는 순간, 어깨에 올라탄 하루의 무게가 조금씩 내려앉는다. 회사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일들, 상사의 무리한 요구, 동료와의 미묘한 갈등, 끝나지 않는 회의와 메일들. 그 모든 것들이 문 밖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나는 냉장고 문을 연다. 무엇을 먹을까. 거창한 고민이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버텨낸 나 자신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을 고르는 시간이다. 때로는 간단한 라면 한 그릇이, 때로는 따뜻한 우동이, 혹은 매콤한 떡볶이가 그 역할을 해준다. 음식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먹는 순간의 나만의 시간이 소중할 뿐이다. 혼자 먹는 밥이 외롭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 종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살아온 나에게 혼밥은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다. 젓가락질이 서툴러도, 후루룩거리며 면을 먹어도, 국물을 조금 흘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시간. TV를 켜놓고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익숙한 프로그램에 멈춘다. 딱히 집중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적당한 소음이 필요할 뿐이다. 침묵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 종일 쌓인 생각들이 조용한 공간에서 더욱 또렷하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배경음이 필요하다. 나와 내 생각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주는 시간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힐링을 주는 신간을 읽었다. <퇴근의 맛>… 퇴근 시간이 기다려 지는 시간이다.
라면을 끓이면서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가 끓여주던 라면의 맛은 지금 내가 끓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왜 그때는 그렇게 맛있었을까. 아마도 배고픔의 질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배고픔은 단순했다. 몸이 원하는 영양소를 채우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의 배고픔은 복잡하다. 몸의 배고픔과 마음의 허기가 뒤섞여 있다. 짬뽕을 먹을 때면 매운맛에 눈물이 나지만, 그 눈물이 꼭 매운맛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하루 종일 참아온 감정들이 뜨거운 국물과 함께 조금씩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억지로 참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눈물 한 방울 정도는 허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직업과 환경은 다르지만, 하루를 견뎌내고 집에 돌아와 무언가를 먹으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회사원은 우동으로, 교사는 짬뽕으로, 간호사는 마라탕으로 각자의 방식대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옆 사무실의 동료가 어떤 저녁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비슷한 피로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로를 달래주는 것이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따뜻한 한 끼 식사라는 것도 공통분모다.
요즘 사람들은 '소확행'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거창한 성취나 큰 변화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기쁨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퇴근 후 먹는 저녁 식사도 그런 소확행 중 하나가 아닐까. 미슐랭 레스토랑의 고급 요리가 아니어도, 집 근처 분식점의 떡볶이 한 그릇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음식의 값이나 품격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순간의 마음가짐이다.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내일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식사는 소중하다. 혼자 먹는 식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1인 가구의 증가,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 바쁜 생활 패턴 등이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혼자 먹는다고 해서 모두가 외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더 소중할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각자 다른 공간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그 경험 자체는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으로 저녁을 먹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혼자 먹는 밥도 그리 외롭지 않다.
매일의 식사는 어떤 면에서 일기와 비슷하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날의 기분과 상황이 함께 기억난다. 스트레스가 심했던 날에는 매운 음식을 찾았고, 우울했던 날에는 달콤한 것을 원했다. 기쁜 일이 있던 날에는 평소보다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먹기도 했다. 음식은 우리의 감정을 기록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치유하기도 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한 그릇의 음식 안에 녹아든다. 그래서 어떤 날의 저녁 식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식사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오늘을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몸의 피로를 풀고, 마음의 긴장을 이완시킨다. 그리고 내일 또 다시 세상과 마주할 힘을 기른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였어도 괜찮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버텨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로 "고생했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성취가 아닐지도 모른다. 매일매일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으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먹는 따뜻한 저녁 식사 한 그릇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런 일상이 실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고, 그 인생을 지탱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다. 오늘 저녁, 무엇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것인가. 그 한 그릇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장마 시작이라 밤에 비가 올 것 같다. 따뜻한 식사와 함께 막걸리 한잔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