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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왜 죽었을까? - 오심과 권력, 그리고 인간을 심판한 법의 역사 / 자유기업원 2026 추천도서 50권 | 법경제와 규제개혁 부문
김웅 지음 / 지베르니 / 2025년 6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초유의 비상계 선포와 그에 따른 대통령 탄핵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목격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법과 제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들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법이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대중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한가?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의 한 철학자가 독배를 마시며 죽어갔을 때부터 인류는 같은 고민을 해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법과 정의, 대중과 권력 사이의 영원한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24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법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 시작은 놀랍도록 인도적이었다. 4천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남므 법전부터 함무라비 법전에 이르기까지, 고대 법전들의 진정한 목적은 질서 유지가 아니라 약자 보호였다. 우리가 잔인하다고 여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 조차도, 실제로는 강자가 약자에게 과도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법이 없다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법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법은 약자가 강자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은 대부분 기득권층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을 만들리는 없다. 따라서 법은 태생적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그의 제자들이 독재에 협력했다는 사실이 그를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로 만들었다. 법적으로는 청년 부패죄와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 아테네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대중의 감정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러한 대중의 광기가 역사상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중세의 마녀사냥, 20세기의 홀로코스트까지, 인류사는 집단 광기의 어두운 기록들로 가득하다. 특히 중세 마녀사냥의 참혹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신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21세기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대중의 분노는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그 파괴력도 커졌다. 2017년 240번 버스 사건은 현대판 마녀사냥의 전형을 보여준다.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분노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했고,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사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다.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편견에 휩쓸리며,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때 가장 위험해진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현대 형사사법제도의 지혜가 시작된다. 무죄추정의 원칙, 미란다 원칙, 영장주의, 공개재판 등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러한 제도들은 사실 수천 년간 인류가 쌓아온 실패와 희생의 결과물이다. 이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으면 그의 자백이 무효화될 수 있다. 이는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겉으로는 비효율적이고 범죄자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자를 보호하는 정교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실체적 정의가 아니라 절차적 정의다. 실체적 정의란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이고, 절차적 정의란'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실체적 정의에 대한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공정한 절차를 통해 내린 판단이라면, 그 결과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수용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옳은 결과라도 부당한 절차를 통해 도출되었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 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개혁 논의들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검찰개혁, 사법개혁 등의 이슈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기관이나 인물의 선악이 아니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완벽한 제도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권력을 갖게 되면 그것을 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는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양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수처, 검수완박 등의 이슈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어떤 기관이 수사를 담당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관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느냐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딜레마가 있다. 견제 기관을 만들면 그 견제 기관을 누가 견제할 것인가? 권력을 분산시키면 효율성이 떨어지고, 집중시키면 남용의 위험이 커진다. 이는 완벽한 해답이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 한 딜레마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언론은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언론 자체도 권력이 될 수 있고, 그 권력이 남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들어서면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그 정확성과 신뢰성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가짜뉴스, 선동적 보도, 편향된 해석 등이 범람하면서 시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언론을 규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그렇다고 방치하면 민주주의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완벽한 해답보다는 끊임없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문제를 완화시켜 나가야 한다. 시민들 역시 책임이 있다. 정보를 받아들일 때 비판적 사고를 하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며, 성급한 판단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져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사회는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정치적 이념, 세대 간 차이, 경제적 불평등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사회 통합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감정에 휩쓸려 성급한 판단을 내리거나, 극단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더 큰 비극으로 이어졌다. 대신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완벽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지만,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다. 소크라테스는 죽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중의 목소리는 언제나 옳은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 그리고 더 나은 답을 찾 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고, 우리가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도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정한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정의의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다. 그리고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의 질문을 계속 던지고,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