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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따라 공간 따라 역사 문화 산책 - 신병주 교수의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는 의미있는 여정이었다. 공간에 깃든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참 재미있다. 오래된 성벽을 손으로 쓸어내릴 때, 그 돌 사이로 흐르는 시간의 흔적을 느낀 적이 있는가? 아니면 수백 년 전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정자에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들의 생각에 잠겨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길모퉁이, 오래된 건물들, 마을 어귀의 고목 한 그루에도 사실은 수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신병주 교수의 <인물 따라 공간 따라 역사 문화 산책>은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는 여정으로 초대한다.
시간을 거슬러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선사해 준다. 역사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종종 까마득히 먼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이 숨 쉬고, 걷고, 생각했던 공간을 직접 방문하면 어떨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쌓기 위해 전국에서 동원한 32만여 명의 장정들과 2,000여 명의 장인들의 땀방울이 서린 성벽 위를 걸으며, 나도 그들의 일부가 된 듯한 감각을 느낀다. 또한 조선의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생활 중 사촌서실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던 그 공간에 서 있노라면, 그가 섬의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동시에 바다생물을 연구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유배지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이러한 역사적 인물들과의 만남은 교과서나 역사책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생생함을 준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겹치면서, 시간의 간극이 좁혀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공간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도 의미를 선사한다. 공간은 시간을 품고 있다. 서울 북촌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였고, 서촌은 중인들의 문화 공간이었다. 둘 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하지만, 그 역사적 맥락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북촌의 가지런한 한옥 사이를 거닐며 옛 양반들의 일상을, 서촌의 좁은 골목길에서는 중인들의 문화적 저항과 창조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담양 소쇄원에서는 조선 중기 선비들이 스승 조광조의 비극적 죽음 이후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학문에 침잠했던 그 고요한 시간을 만난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운 배치,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선비의 품격과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공간들은 우리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들이다. 역사의 아픔과 자존심역사는 영광스러운 순간만이 아닌, 아픔과 굴욕의 순간도 함께 담고 있다. 석촌호수 근처에 위치한 삼전도비는 그런 우리 역사의 아픔을 상징한다. 병자호란 패배 후 세워진 이 비석은 우리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명분만을 내걸고 치루는 잘못된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생가 '육우당'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는 사실 역시 우리 현대사의 또 다른 아픔을 보여준다. 발전과 보존 사이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럼에도 지켜내려 했던 노력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시간을 초월한 연결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 답사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와 ' 그때 '의 연결에 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있는 낙산공원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면, 600년 전 태조가 바라본 풍경과 오늘날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겹쳐진다. 물론 고층 빌딩들과 아스팔트 도로는 없었겠지만, 사방을 에워싼 산과 그 사이로 흐르는 한강의 모습은 여전히 같을 것이다. 또한 서울 행촌동의 딜쿠샤는 미국인 테일러 부부가 1923년에 지은 집으로, 이들이 3.1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들의 독립에 공감했던 역사적 현장이다. 이 공간에 서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우리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상상해볼 수 있다. 세계사와 한국사가 만나는 지점이자, 인간적 공감과 연대의 증거이다.
살아 숨쉬는 역사 교육 답사는 가장 효과적인 역사 교육의 방법이다. 책으로만 배우는 역사는 종종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오감을 통해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조선 시대의 건축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그 공간에 서서 바람을 느끼고, 때로는 그 시대의 음식을 맛보면서 역사는 지식이 아닌 경험으로 체화된다. 신병주 교수의 책이 특별한 점은 각 장소마다 찾아가는 길과 관련 정보를 꼼꼼히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 당장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라는 초대장과도 같다. 역사는 더 이상 박물관이나 교과서 속에 갇힌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쉬는 현재진행형이 된다.
일상 속의 역사적 시선을 새롭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역사 답사의 경험은 우리의 일상적 시선마저 바꾸어 놓는다. 한번 역사적 장소들을 방문한 후에는, 평범한 거리를 걸을 때도 ’이 땅에서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 하는 질문을 자연스 럽게 던지게 된다. 서울 종로의 카페에 앉아 있을 때도, '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어떤 공간이었을까? ' 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적 시선을 갖게 되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더 이상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가 쌓인 의미 있는 장소로 변한다. 아침에 출근길에 지나치는 골목, 주말에 산책하는 공원, 심지어 매일 드나드는 집까지도 그것이 위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역사 답사는 자신의 존재를 시간적으로 확장하는 경험이다. 내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존재했던 인물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나의 정체성은 현재라는 좁은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로 확장된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에서서, 그가 <세한도>를 그렸던 유배 생활의 고독과 절망, 그리고 그 속에서도 피어난 예술적 승화를 생각하면, 내 삶의 어려움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역사 속 인물들의 지혜와 용기, 그들의 실패와 한계까지도 오늘을 사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