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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답사 0번지 영암 - 월출산의 신령스런 기운이 가득한 고장
송일준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영암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어 펼쳐진 풍경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평야 한가운데 갑자기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산, 월출산은 그렇게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월출산의 위용은 수많은 여행지를 다녀봤음에도 가장 강렬한 첫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래서일까. 월출산을 오를 때마다 그 첫 만남의 감동이 되살아나곤 한다. 바위의 산, 바위의 땅 영암이란 이름 그대로 이곳은 '신령스러운 바위'의 땅이다. 영암이 곧 월출산이고, 월출산이 곧 영암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영암 어디를 가든 월출산은 항상 시야에 들어오고, 그 존재감이 지역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한다. 영암을 좋아하는 일인으로 이번에 영암을 답사한 기록을 이야기하는 신간을 익을 기회가 있었다. 송일준님의 <남도 답사 0번지 영암>이었다. 저자와 함께 영암으로의 여행을 떠나 본다.
산행을 위해 매달 한 번씩은 영암을 찾는 나에게 월출산은 다양한 모습을 선사해 준다.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가 산 전체를 물들이고, 여름이면 울창한 숲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가을이면 형형색색의 단풍이 바위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겨울이면 하얀 눈꽃이 바위 능선을 덮는 월출산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 웅장한 바위의 기운이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서 만나는 기암괴석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천 개의 부처가 모여 있다는 천불봉, 거대한 얼굴 형상의 큰바위얼굴, 구름이 걸려 있는 듯한 구름다리까지. 이런 바위들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지켜온 이 땅의 이야기들을 상상하면, 내 작은 발걸음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밟고 있는 듯한 경외감이 든다.
산 기슭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의 현장들과 마주하게 된다. 도갑사에서 만난 도선국사의 흔적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내게 말을 건넨다. 국토를 살아있는 몸으로 보고 치료하려 했던 도선의 비보풍수 사상은 현대의 환경 위기 속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그것이 도선이 천 년 전에 남긴 메시지가 아닐까. 또한 구림마을에서 왕인박사의 자취를 따라가며, 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한 인물이 일본 아스카 문화의 초석을 놓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천자문을 들고 바다를 건넌 왕인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연결고리를 상기시키며, 영암이 동아시아 문명의 교차로였음을 깨닫게 한다. 월출산 자락의 죽림정에서는 난중일기의 주인공 이순신 장군의 숨결도 느낄 수 있다. 전쟁의 와중에도 이곳에서 전략을 논의하고 병참 물자를 구했다는 기록은 이 고요한 정자가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목격했음을 말해준다. 삼도수군통제사의 막중한 책임을 안고 이 땅을 밟았을 이순신을 상상하며, 나는 잠시 400년 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본다.
영암은 예술의 땅이기도 하다. 영암이 배출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이 지역의 문화적 깊이를 증명한다. 목판화가 김준권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백두대간의 기운, 가수 하춘화의 트로트에 녹아든 남도의 정서, 작곡가 김지평의 서정적인 멜로디까지. 모두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 영감의 결실이 아닐까. 특히 기생 시인 홍랑의묏버들가를 떠올리며 월출산을 바라볼 때면, 이 산이 품은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바람결에 실려온다. "뫼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 줄 여기소서." 순수한 우리말로 사랑의 그리움을 표현한 이 시조는 제 아무리 화려한 현대 가요도 따라갈 수 없는 절절함을 담고 있다. 홍랑과최경창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알고 나면, 월출산의 바위 하나하나가 그들의 사연을 품고 있는 것만 같다.
영암을 찾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은 독천낙지거리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요즘 세태와는 달리, 이곳의 낙지 요리는 트렌드가 아닌 역사와 전통을 품고 있다. 간척사업 이전 지천으로 나던 낙지로 만든 갈낙탕의 깊은 맛은 도시의 어떤 고급 요리도 따라올 수 없는 진정성이 있다. 또한 임금님 수랏상에 오르던 영암어란의 이야기는 내게 이 지역 식문화의 깊이를 새삼 일깨운다. 장인의 혼이 담긴 예술품 같은 이 특산물은 영암 사람들의 섬세함과 끈기를 보여주는 증거다. 산행을 마치고 들르는 작은 찻집에서는, 도예가들이 빚은 도자기에 담긴 차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풀곤 한다. 지역의 공예 전통이 살아 숨쉬는 소박한 찻잔에서 마시는 차는 도시의 고급 카페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월출산을 오르내리며 보낸 수많은 시간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 느낀 감동들, 역사의 흔적을 찾아 걸었던 여정들이 쌓여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도시의 번잡함에 지칠 때마다 나는 영암을 떠올린다. 월출산의 거대한 바위들, 구림 마을의 고즈넉한 한옥들, 독천의 낙지 요리 냄새, 도갑사의 풍경 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안식과 위로를 준다. 인생 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영암'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곳, 역사와 문화의 깊이를 느끼며 사유할 수 있는 곳,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겸손해질 수 있는 곳. 영암은 그런 곳이다. 매번 영암을 떠나올 때면 아쉬움이 남지만, 곧 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그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월출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때로는 신비로운 안개에 휩싸여, 때로는 맑은 햇살을 받아 빛나는 모습으로. 영암, 나의 마음속에서도 영암에 대한 애정은 오래오래 변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