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23 -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조가람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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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음악은 언어 이전의 말이라고 한다. 말로는 다 닿지 못하는 마음의 여백에, 음악은 조용히 내려앉아 그 사람의 내면을 껴안는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어떤 선율을 들을 때 이유도 없이 가슴이 저리거나, 한없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경험한다. 하지만 음악이 온전한 예술로 남기기 위해서는, 아름다움 뒤에 깃든 체계와 질서가 필요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라틴어로 ‘작품’을 의미하는 Opus, 줄여서 Op..

우리가 흔히 듣는 “쇼팽의 Op.9”, “베토벤의 Op.27” 같은 표현은 음악을 구분하기 위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한 음악가가 남긴 시간의 층위, 그리고 그가 세상에 내어놓은 창조적 세계의 차례이자, 음악 인생의 한 조각이다. 음악가의 인생이 선율로 녹아든 작품을, 인류는 번호를 매겨 기록했다. Opus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Opus의 기원은 고대 라틴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동’, 혹은 ‘일’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창작자의 땀과 시간, 고뇌와 희열이 담긴 결과물을 통칭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음악이 점차 인쇄되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작곡가의 작품들을 정리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그리하여 가장 널리 퍼진 방식이 바로 출판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이는 ‘Opus number’였다.

물론 이 번호는 항상 작곡된 순서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늦게 출판되어 숫자가 뒤로 밀리고, 또 어떤 작품은 생전에 출판되지 못해 ‘WoO’(Werke ohne Opuszahl, 작품번호 없는 작품)라는 이름을 달기도 한다. 하지만 Opus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시간의 무게를 품은 음악들을 다시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많은 작품번호 중에서, ‘Op.23’이라는 숫자에 이끌리는 순간이 있다. 그 짧은 조합은 내게 하나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어두운 밤, 운명처럼 다가오는 선율의 첫 음. 불안과 열정, 비극과 격정 사이를 넘나들며 사람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곡. 바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의 10개의 전주곡 Op.23이 떠오른다.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고통과 사랑, 고독과 희망이 응축된 ‘작품집’이다. 특히 Op.23 No.5, 우리가 흔히 “라흐마니노프 행진곡”이라 부르는 곡은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로 남았고, 듣는 이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열정과 감동을 선사해왔다. 숫자 하나가 불러낸 깊은 울림. 그것이 바로 Opus의 마법이다. 이번에 이 opus를 제목으로하는 신선한 책을 읽었다. <Op. 23>이었다. 피아니스트인 조가람님의 음악 에세이....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감성이 느껴진다..

모든 생에는 각자의 박자와 조율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 또한 마치 한 편의 악보처럼, 선율로 엮여 있으며 음표처럼 의미를 품는다. 누군가는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기억하고, 또 누군가는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내지만, 나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음악’이었다. 울퉁불퉁한 리듬 속에서 조용히 흐르던 일상도 있었고, 전주 없이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격정의 순간도 있었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은 쉼표 같았고, 어떤 날은 마치 라르고(Largo)처럼 더디지만 단단하게 흘러갔다.

그런 내게 'Op.23'이라는 숫자가 말을 걸어왔다.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Op.'가 ‘Opus’, 즉 ‘작품 번호’를 뜻한다는 것을 안다. 이는 작곡가가 세상에 내놓은 자신의 창작물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는 방법이다. 이 간단한 숫자와 약어가 품고 있는 것은 단순한 순번이 아니라, 작곡가의 인생 그 자체다. Op.1에서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삶의 경험, 슬픔, 사랑, 고뇌, 기쁨이 모두 담긴 시간의 궤적이며, 그 번호 하나하나에는 어떤 계절의 숨결과, 한 시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쇼팽의 Op.23은 발라드 1번, 차이콥스키의 Op.23은 피아노 협주곡 1번, 슈만의 Op.23은 밤의 노래, 라흐마니노프의 Op.23은 전주곡, … 그러니 나 또한 나의 인생에 Op.23이라는 번호를 붙여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이 시기는 내가 내 삶의 첫 번째 발라드를 쓰는 시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쇼팽이 그렸던 내면의 불꽃일 수도 있고, 차이콥스키가 터뜨렸던 격정의 선언일 수도 있으며, 슈만이 밤의 정적에 띄운 고백일 수도 있다. 혹은 라흐마니노프가 노트마다 심장을 새기듯 남겨놓은 전주곡처럼, 묵직하고 깊게 울려 퍼지는 나만의 이야기일 수 있다.


책은 음악에 대한 해설이나 작곡가의 생애를 서술만 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을 삶으로 번역하는 이야기’이며, ‘인생의 순간들을 음악의 언어로 그려낸 시적 고백’이다. 저자는 피아니스트로서, 청자로서, 예술가로서의 경험을 오롯이 펼쳐 보이며 말한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고유한 '작품 번호'를 붙일 수 있으며, 그것은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자기만의 악보’임을 말이다.

나도 오늘,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인생의 Op.23 앞에 서 있다. 이 번호는 나의 전환점이며,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이 맞닿는 교차점이다. 여기서 나는 고백처럼 써 내려가고 싶다. 쇼팽과 함께 울고,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기다리고, 포고렐리치와 함께 외로워하며, 브람스와 함께 묵묵히 버텨낸 시간들을 말이다. 음악은 결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의 모든 감정과 호흡, 희망과 상처에 깃들어 있었고, 이 Op.23이라는 이름 아래, 나는 나만의 연주를 이어가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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