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이라는 이름 뒤에 숨는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악한 범죄 뒤에 꼭 따라 붙었던 병명들. 덕분에 그들에게 가벼운 형량이 내려지는 걸 종종 보면서, 그 병은 면죄부를 가져다주는 특효약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구색 좋은 변명이 듣기 싫었다.세상이 얼마나 편집되어 보이는가를 알게 해 준 글들이었다. 모든 걸 아는 듯 살아가지만, 내가 보는 것은 어떠한 것의 작은 단면에 불과하단 걸 다시 깨닫게 된 것 같다.정신질환과 범죄. 다루기 힘든 두 세계가 공존하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다름 아닌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들의 죄의 무게가 아니라 아픔의 언어를 기록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뜻이 무척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작가가 다시 꺼내봐야 했던 감정의 소용돌이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범죄가 합리화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아픔이 또 다른 아픔을 낳고 있는 현실들이 참 슬펐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에 밀려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들의 가치가 퇴색 되어가는 우리의 인생들이 새삼 아프게 다가왔다. 아이에게 퍼붓는 나의 잔소리가 건강한 마음을 위한 일이었을까를 반성해 본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지지않기를.책 속의 문장들우리는 언제나 누구든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렇다고 병든 당신의 마음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p.20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때로는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멈추지 않고 묻고 살피는 일. 그것이 또 다른 죽음과 상처를 예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대일 것이다. p.51‘처벌’과 ‘교화’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의 궁극적 목적이 ‘사회 안전’이라면, ‘치료’와 ‘회복’에 대한 접근을 간과하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한다. p.156-157나는 그를 병마에 시달리는 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변질된 신앙과 범죄로 인한 적의와 경멸을 넘어 눈앞의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인 내 믿음이었고,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였다. p.180어쩔 수 없이 장애물 앞에 잠시 멈춰 선다. 머뭇거리는 사이 안개의 밀도는 더 높아지지만 이제 와 되돌아설 수는 없다. 수용자의 인권을 위해서 자신의 인권을 내놓아야 하는 교도관의 하루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으므로. p.199
마냥 책이 좋은 사람의 이야기다. 나도 그런 부류라서 이분의 얘기가 다 좋았다. 좋아하는 게 같은 사람이랑 창가에 같이 앉아서 하염없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줄줄이 단점을 쏟아내면서도, 그래도 거기서 막 좋은 점을 찾고 같이 웃고. 막 그런 느낌.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사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는 작가의 말이 참 근사했다. 백화점에서 수백만원어치 뭔가를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무사하고 평온하고 여유롭다는 증거가 된다. 마음이 와장창 무너져 내려도 백화점에서 비싼 물건은 살 수는 있지만,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참 신비로운 일 같다.장례식 다음 날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었으면, 고통에 자기 발로 설 수 없을 때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에 너무너무 공감했고, 사람들이 쫓기지 않고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모두가 무사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램도 참 좋았다.깊은 터널을 지나오면서, 내 상태를 체크하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책을 읽을 수 있는가 였던 것 같다. 첫 한해는 읽을 수 없었고, 그 다음 해부터 책을 다시 펼쳤던 것 같다. 나는 어쩌면 훨씬 전부터 괜찮았구나, 다시 한 번 지나온 시간을 더듬었다.우리 아이들도 책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딱 그 나이에 읽어야할 책들만이라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들었다.
‘잠비나이’를 몰랐다. 그저 음악 하는 사람의 얘기라 솔깃했고, 전통악기지만 생소해서 더 궁금했다. 작가의 음악이야기도 참 좋았지만, 삶을 대하는 자세가 참 맘에 들었다. 작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읽다가 ‘잠비나이’를 검색했다. 이정도의 대단한 밴드 연주자가 이렇게 소박하고 솔직한 글을 썼다는 것에 더 놀랬다.한 길을 꾸준히 간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한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는 것은, 삶의 수많은 브레이크와 후진에도, 그 어떤 주저앉을 만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라는 게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작가가 말하는 음악과 삶이 닮아 있다는 얘기도 참 공감이 갔다.끊임없이 한계와 마주하고 싸우고 이겨내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고, 무척 외롭다고 느껴지지만 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과 동행하였음을 알게 된다는 얘기. 너무너무 좋았다.클라리넷을 몇 년간 배운 적이 있다. 너무 다른 고음과 저음이 잘 배합되어 있는 그 악기 소리에 푸욱 빠졌었다. 악기를 계속하고 싶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시작해도 충분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내가 느낀 나의 나이가 너무 많기도 했고, 현실의 벽도 꽤나 높았다. 악기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 그때의 마음이 생각났다.나는 꽤나 현실적어서 멈춤에 능하다. 그 편이 내가 덜 다친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장점인걸까 단점인걸까. 헷갈렸다.각 나라마다 음악에 반응하는 정서가 달랐다는 얘기도 참 재밌었다.
내 눈앞에서 사라진 쓰레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딘가 소각장이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태워질 쓰레기는 합법화 된 곳이라는 것까지만 생각한 것 같다. 가끔 이런 책이나 영상을 본다 해도 현상유지편향이 작동되어 이내 잊어버리는 게 우리다. 인간이란 수십 년 뒤에 동네가 물에 잠기는 것보다 지금 코밑의 땀이 더 괴로운 존재라는 작가의 말이 무척 서글펐다. 지금보다 훨씬 더 환경잔소리를 해도 될 것 같다. 더 강조하고 더 강조해도 괜찮을 것 같다.앞 다투어 발전하고 더 편해지는 세상만 강조하는 이면에 감춰진 진실들이 너무 무겁고 슬펐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이 가는 곳도 우리가 살아가야할 자연이며, 여전히 누군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절절히 배웠다.정수기 계약이 끝나서 오늘 아침에 새 정수기가 집에 설치되었다.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새 정수기에 더욱 눈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쓰고 있었던 멀쩡한 정수기가 잘려나가는 걸 보고 물었다.“이건 폐기되나요?”“네 그렇죠. 아님 쓸 사람 있으면 그냥 주셔도 되는데 요즘 세상에 이걸 쓰겠다는 사람이 없어요.”“아깝네요. 계약기간을 좀 더 늘려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고서야 뒤늦게 좀 더 쓰겠다고 할 걸 싶었다.작은 소비자일 뿐인 우리가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란 참 어렵다.텀블러를 쓰고, 재활용을 잘하고, 음식물을 덜 버리고, 옷을 덜 사는 등의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덜 버리고 덜 사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 참 공허하고 아프게 들렸다. 우리의 노력들이 티끌일지라도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다.우리의 티끌이 더 많이 모여서 태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말하지않는지구 #김가람PD #환경책 #옷을위한지구는없다 #환경스페셜 #쓰레기 #쓰레기문제 #기후위기 #이상기후 #제로웨이스트 #르뽀 #서평 #책추천
종이가 카운슬러였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는 작가의 말이 무척 좋았다. 종이를 빼고 추억을 얘기할 수 있을까.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에 매일매일 그렇게도 열심히 써내려간 추억의 페이지들이 떠올랐다. 나는 (심각하게) 잘 버리는 사람이라서 그 추억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쏟아놓을 수 있는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삶의 고비마다 주저앉지 않고 지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지금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시 들여다볼 용기는 없지만, 내 삶의 많은 순간들을 종이에 기록한 것은 그때의 지금을 살아내는 무척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진하게 느꼈다.늘 우리 일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가치를 잘 모른다. 종이도 그렇다.책을 읽으면서, 핸드폰으로 대체되어버린 다이어리를 사고 싶었고, 쓰다만 필사노트도 다시 꺼내보았고, 이것저것 끼적거리다만 메모들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냥 지나가버릴 우리 삶을 훨씬 더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갈수록 SNS가 종이를 대신하게 되어가는 것은 조금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은 종이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의 재발견이 소소하게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