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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안과 트랙터 막스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68
비네테 슈뢰더 지음, 엄혜숙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비네테 슈뢰더의 그림은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친숙한 듯하지만 낯설고, 괴이한 듯하지만 매혹적이다. 역동적인 장면을 담고 있지만 정지 화면의 느낌이 강하고,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안개에 싸인 듯 음울한 기조가 흐른다. 하고 싶은 말은 넘치고 제대로 정의내리기는 어려워 쩔쩔매는 모습에서 눈치 챘겠지만 나는 이 작가를 무척 좋아한다. 역시나 좋아하는 작가 미하엘 엔데의 글에 그림을 그린 『보름달의 전설』, 그림형제의 이야기에 그림을 입힌 『개구리 왕자』, 남편 페니 니클이 글을 쓰고 비네테 슈뢰더가 그림을 그린 『악어야, 악어야』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세계를 보여준 비네테 슈뢰더의 팬이 되었다. 『플로리안과 트랙터 막스』는 글과 그림 작업을 비네테 슈뢰더 혼자 해낸 그림책이다. 『보름달의 전설』은 미하엘 엔데의 환상적인 글에 찰떡궁합처럼 잘 어울리는 일러스트가 글의 맛을 오히려 배가시켰고, 『개구리 왕자』는 비네테 슈뢰더의 일러스트를 따를 책이 없고, 『악어야, 악어야』는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뽑힌 적이 있을 정도로 비네테 슈뢰더의 일러스트는 워낙 환상적이다. 그런데 『플로리안과 트랙터 막스』를 보니 이야기를 구성해가는 솜씨도 좋아서 앞으로도 글과 그림을 병행해서 작업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늙은 얼룩말 플로리안이 쟁기를 끌고 농부 클라아스 클라아센이 쟁기를 밀면서 밭을 갈지만 이 둘은 노쇠해서 하루 종일 밭의 절반도 채 갈기 힘들다. 하지만 내일이면 젊고 힘이 좋은 트랙터 막스가 오기로 되어있었다. 플로리안은 트랙터 막스와 좋은 친구가 되는 꿈까지 꾸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트랙터 막스는 농장 식구들의 반가움도 외면한 채 오자마자 밭으로 향하더니 하루 종일 일만 한다. 플로리안은 우리에서 하루 종일 트랙터 막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자신의 농장 일을 대신해 줄 노동력으로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는 친구를 기다렸던 플로리안에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트랙터 막스는 시커먼 벤진 연기만 확 내뿜어버리곤 창고 구석으로 가버린다. 플로리안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 보지만 벽 쪽으로 싹 돌아서기까지 하면서 상대조차 하려하지 않는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면서 플로리안은 마음을 다쳐서 시무룩해하고, 농부 클라아스 클라아센은 그런 플로리안이 안쓰러워 위로하지만 트랙터 막스는 계절이 몇 번 바뀔 때까지도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는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지만 비가 계속 내려 땅이 진창이다. 워커홀릭 트랙터 막스는 밭을 갈러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서 잠깐 비가 그친 새를 놓치고 않고 밭으로 나간다. 질척거리는 땅은 트랙터 막스를 곤경에 빠트리게 되고 막스의 희미한 구조신호를 들은 플로리안과 농부 클라아스를 비롯한 농장 식구들은 트랙터 막스를 구하러 총출동한다. 플로리안의 도움으로 진창에서 빠져나온 트랙터 막스가 플로리안과 단짝친구가 되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젊고 의기양양한 트랙터 막스에게 늙고 볼품없는 말 플로리안과 왕왕 짖어대는 개 레오와 고양이 미와 파이프 담배로 소일거리나 하는 늙은 농부가 시답잖게 보였을 것이다. 막스 자신이 곤경에 처할 일도 그래서 그들의 손을 빌릴 일도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위험한 상황에서 이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게 되니 그동안 융화를 거부했던 도도함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세상엔 댓가 없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터무니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이 있고, 사회악이라 불릴 만큼 민폐만 끼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공짜로 주어지는 것도 싫고 내 것은 물질적인 것이든 하다못해 겉치레 인사조차 남에게 주는 것도 싫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 벽을 쌓아두고 일체의 교류나 간섭을 피하는 사람들 말이다.
벽을 허물고 스스로의 고립무원에서 빠져나와 적당한 소란스러움과 적당한 번잡함 속에서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한지 비네테 슈뢰더의 그림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계절과 상관없이 꽃이나 열매나 이파리 없이 앙상했던 나무가 플로리안과 막스의 화해 이후로 물이 오르고 꽃이 피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분위기도 화사해진다. 한해가 지나도록 막스 때문에 서러웠던 플로리안은 마음의 상처가 컸을 텐데도 너그럽게 막스의 수줍은 사과를 받아준다. 젊은이의 치기 어린 행동을 현명하고 연륜 있는 어르신이 받아주는 것처럼 늙은 말 플로리안과 트랙터 막스의 우정은 신구세대의 조화로 받아들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순전히 “엄마, 플로리안은 구식이고 막스는 신식이에요.”라고 말하는 아이에게서 얻은 힌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