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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49
유리 슐레비츠 글, 그림 | 강무홍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 작가의 경우 보통 자신만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그림만 봐도 자연스레 작가를 떠올릴 수 있는 스타일을 기본으로 해서 작품마다 약간의 변주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유리 슐레비츠는 자신의 작품들을 시기적으로 단절시켜서 확실한 변화를 보여준다. 유리 슐레비츠의 작품군(群)을 살펴보면 소재면에서나 화풍에서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분위기가 보인다. 『새벽』이나 『비오는 날』은 간결하고 함축적인 시적 언어로 여백을 채운 잔잔한 풍경화를 보는 듯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와 하늘을 나는 배』『황금 거위』『보물』은 옛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거나 동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세계를 보여준다. 『비밀의 방』은 여느 작품들과 차별화된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탈무드 분위기의 지혜나 동양적인 정서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아교나 달걀노른자 따위로 안료를 녹인 불투명한 그림물감’ 템페라를 이용한 그림은 불투명한 원색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황량함 속에 화려함을 더한다. 폴란드에서 유태인 부모사이에 태어나 폴란드 침공을 피해 프랑스로, 이스라엘로, 그리고 미국에 정착하기까지의 녹록치 않은 삶의 잔영들이 작품들 속에 비친다.
무기와 마실 물을 완벽하게 꾸려 뒤따르는 신하들을 대동하고 자신만의 햇빛가리개를 하고 낙타등위에 올라앉은 임금님이 사막을 지나고 있다. 작은 짐 보퉁이와 나무 지팡이에 의지해 샌들을 신고 허름한 옷차림의 머리칼은 허옇고 수염은 검은 노인을 만나 그 이유를 묻는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임금님은 자신의 얼굴을 아흔아홉 번 보기 전에 아무에게도 그 얘길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궁전으로 돌아가 우두머리 대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약삭빠른 우두머리 대신은 임금님의 행선지를 알아내 사막의 그 노인을 찾아내 대답을 들으려 한다. 협박하고 금화 천 냥으로 달래기도 하는데 노인은 뜻밖에도 동정 아흔아홉 냥과 그 대답을 바꿔준다. 임금님의 명을 어긴 노인은 임금님께 불려가고 임금님의 얼굴이 찍힌 동전을 보고 나서 대답해준 것이니 명을 어긴 게 아님을 얘기한다. 노인은 영리함으로 임금님에게서 그리고 우두머리 대신에게서 목숨을 구한 셈이다. 임금님은 노인에게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기고 일마다 노인의 조언을 구하고 후한 상도 내린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움을 느끼던 우두머리 대신은 노인이 임금님의 보물창고에서 금을 훔쳐 집에 숨겨뒀다는 모함을 한다. 임금님과 신하들이 노인의 집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문이 잠겨있는 비밀의 방을 발견한다. 훔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 기대한 비밀의 방은 텅 비어있다. 구석에 앉을 수 있는 자리와 옹이가 툭툭 불거진 노인의 오래된 나무 지팡이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날마다 이 방에 와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소인이, 언젠가 사막에서 폐하와 만났던 흰 머리에 검은 수염을 지닌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를.”
오롯이 삼라만상과 교류하고 묵언수행을 통해 자신의 정신 수양에만 힘을 쏟던 사막의 현자로 살아가던 이전의 삶과 임금님의 총애를 받으며 무소불위의 위치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는 현재의 삶 사이에서 고뇌한 흔적이 엿보인다. 비밀의 방은 하루 종일 마음속에 스멀거리는 물욕과 명예욕과 세상 온갖 유혹에 젖은 마음을 씻어내고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방편이 되어준 것이다. 텅 빈 방에 들어가 무거운 욕심들 내려놓고 가뿐하게 문을 나서면 또 하루를 지탱할 힘을 얻는 곳, 누구나의 마음속엔 이런 비밀의 방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유혹에 미혹되지 않고 욕심이 지나쳐 넘쳐흐름을 경계할 수 있는 보루와도 같은 자신만의 신성한 영역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