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도둑 놈! 놈! 놈! 읽기의 즐거움 6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개암나무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상상력이 빚어낸 판타지를 현실 속에 능청스레 녹여내고, 대두되고 있는 현대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날카로움과 더불어 따스한 시선과 유머를 잃지 않는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글은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오이 대왕』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흉물스럽고 교활한 오이대왕으로 인해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사는 볼프강네 가족들의 비밀스런 뇌관을 건드려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머릿속의 난쟁이』에서는 이혼한 엄마 아빠, 서로를 싫어하는 양쪽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를 오가며 즐겁지 않은 성탄절 파티를 해야 하는 안나가 머릿속에 사는 난쟁이와 고민을 나누고, 『언니가 가출했다』는 이혼과 재혼으로 인한 가정의 해체와 재구성을 다루며 그 안에서 억압과 순종을 강요받은 열다섯 언니의 가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깡통 소년』은 부모의 조건에 맞는 아이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깡통에 넣어져 배달된 여덟 살 소년 콘라트를 엄마의 경험도 없고 게으르고 청소나 요리는 젬병인 바톨로티 부인에게 툭 던져놓는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작품 몇 개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현실과 밀착되어 있고, 유쾌하고 즐거운 구성을 보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는 유명한 어린이 청소년 문학 작가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독일 청소년 문학상,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상 등의 수상 목록이 유명세와 인기를 말해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아동 청소년 문학 작가들은 독일어권에 집중되어 있다. 미하엘 엔데, 에리히 케스트너, 제임스 크뤼스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은 제목의 책을 발견할 때마다 여행을 떠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읽곤 한다. 『우체국 도둑 놈!놈!놈!』은 저작권 표기란을 살펴보니 1986년 작품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만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책의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책의 삽화는 대개의 경우는 글의 한 장면을 재현하거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정도인데 이 책에서는 그림에 등장하는 만화의 말풍선 또한 글의 연장이라서 지나치면 이야기의 연결이 끊어져 버린다. 144쪽의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늘 그렇듯 즐겁고 유쾌하게 읽힌다.   


어린이들이 위기의 순간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짜릿한 모험 이야기는 동화작가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년탐정 칼레’, 에리히 케스트너의 ‘에밀과 탐정들’이 그랬듯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어린이 탐정단은 ‘무퍼파’이다. 지역신문 사건사고란에 실린 열한 살 소녀 이본카 피본카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로 결심한 무퍼파에 사건의 발단을 알고 있는 이본카의 친구인 리제가 합류해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리제에게는 쌍둥이 이모할머니가 계신데 두 이모할머니가 뺨을 맞대고 읽고 있는 책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목사관 살인 사건」인 것을 보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매력적인 탐정 할머니 ‘미스 마플’을 흉내 내면서 무퍼파의 사건 수사에 깊숙이 개입하게 됨을 미리 알 수 있다. 어린이 탐정단이 등장하는 이야기 속 악당의 모습들이 그렇듯, 이 이야기에도 어수룩하기 짝이 없어서 결정적 순간마다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세 명의 도둑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콧수염 오토, 뚱보 오토, 삐딱이 오토...이름이 모두 오토인 세 도둑은 우체국 현금수송차를 털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소녀 이본카에게 계획을 들키게 되자 이본카를 납치해 범행을 벌일 날까지 친구인 키티의 집에 감금한다. 하나씩 밝혀지는 사건의 단서를 쫓는 무퍼파 아이들과 ‘미스 마플’ 쌍둥이 할머니는 돈을 훔쳐 달아나던 세 도둑을 추격한다. 도둑들의 황당한 실수와 쌍둥이 할머니들의 기지로 우체국 현금 도난사건과 이본카 실종사건은 예상했던 방향으로 해결된다.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을 거의 벗어나본 적이 없는 미스 마플 할머니가 자신의 집 정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차를 마시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마을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꿰뚫고 있었듯이 리제의 이모할머니 두 분도 무퍼파의 그간의 행동들을 슬쩍 꼬집는다. 남의 체리나무에서 체리를 훔치고, 우유 가게 간판을 떼어가고 하수구를 막히게 하는 장난 또한 나쁜 짓이라는 부드러운 경고도 잊지 않는다. 신문에 무퍼파에 대한 특별기사까지 실리며 유명인사가 되었으니 심심하고 따분하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못된 장난이나 치던 무퍼파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         


나는 조악한 삽화와 제멋대로 각색한 명작과 전래 동화가 유년시절 책의 전부였던 시대를 살았다. 물론 그것마저도 귀했었다. 이어서 한국위인전, 세계위인전, 소년대삼국지,..이런 것들을 읽고 나서 읽을 책이 없으니 바로 고전 문학 작품들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졸라서 받은 세계문학 전집의 1권이 단테의 「신곡」이었던 이유로 예비 중학생이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이야기다. 그저 지면을 채운 글만 읽으면서도 읽었고, 어렴풋이 느낌만 잡을 수 있으면서도 읽었다. 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작가의 작품은 작가 소개글에 언급된 작품들을 찾아서 읽는 것으로 이어갔다. 빠듯한 용돈을 아껴서 삼중당 문고, 범우사르비아문고를 비롯한 문고판 책들을 사서 읽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닥치는 대로 많이 치열하게 읽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요즘 어린이 청소년 문학을 즐겨 읽는다. 그 시작은 내 아이보다 몇 년 앞서 아이가 읽을 책을 미리 읽어본다는 이유였지만 이제 여덟 살인 아이를 두고 청소년문학까지 와 있다는 것은 이미 발단이 됐던 이유는 뒷전으로 물러났다는 얘기가 된다. 책들이 열병식 하듯 늘어서 있는 어린이 서가를 거닐 때면 나는 책이 풍성한 요즘 아이들에게 한없는 부러움과 질투마저 느낀다. 나는 오늘도 그 시절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책들을 원없이 읽으며 열세 살에 단테의 「신곡」을 끌어안고 머리를 쥐어짰던 가엾은 내 청소년기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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