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6월
평점 :
일시품절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시리즈의 시작이 되는 이 책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살살 풀어 우리를 신화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출구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느 곳에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미궁 속 같은 신화의 세계로 유혹하는 이야기로 테세우스에게 미궁에서 빠져 나올 방법을 알려주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로 문을 연 것이 꽤 적절해 보인다. 게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과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과 영웅에게 반해 조국을 배신하는 공주 아리아드네라는 신화 속 매력적 요소를 고루 갖춘 인물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배신한 미노스 왕에 대한 포세이돈의 음모로 인해 황소와 수간을 나누는 파시파에 왕비, 그렇게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라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괴물을 잡으려고 크레타로 잠입해 들어간 아들 테세우스를 기다리는 아테네 왕의 슬픈 결말, 연극과 영화의 모티브를 제공한 파이드라까지 이 이야기가 뻗어낸 가지들은 어느 이야기보다 풍성하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로 유혹하고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의 짐받이를 필자가 뒤에서 잡아주겠으니 페달을 밟아보라고 재차 유혹하는 이윤기를 믿고 신화 속으로 힘차게 들어가 본다.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라는 부제가 얘기해 주듯 12가지 테마로 묶어 신화의 세계로 쉽고 흥미롭게 접근하는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컬러풀한 사진과 그림과 조각상들이 이야기에 생명을 입혀준다. 1권에서 소개하는 신화 이야기는 올림포스 산의 열두 으뜸 신들이 주축이 된 이야기들이라 비교적 잘 알려진 친숙한 이야기들이다. 카오스에서 세계가 만들어지고 티탄족과 전쟁을 거쳐 올림포스 신들이 알려진 바대로 제 위치를 찾게 되는 이야기, 아프로디테의 떠들썩한 애정행각, 에로스와 프쉬케의 고난을 이겨낸 아름다운 사랑, 아폴론의 다프네를 향한 안타까운 짝사랑,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왕비가 된 사연,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생을 넘나든 애달픈 사랑... 한번쯤 들어봄직한 이야기들로 신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날려주고 호기심으로 끌어줄 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다. 이야기에 보태서 신화 속 상징들에 대한 필자의 친절한 실타래는 앞서 만났던 지루하고 골치 아팠던 신화에 대한 기억을 싹 날려버린다.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영웅의 모험담이 있고 에로스와 프쉬케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이야기처럼 운명적 사랑이 있는 매력적인 세계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보다 더 비윤리적이도 비도덕적인 이야기는 없다. 근친상간은 보편적이고 인간과 동물과의 수간에 대한 묘사도 거침이 없다. 결혼의 서약은 일찌감치 내팽개쳐 버리고 한눈팔고 딴 짓하기에 여념이 없기도 하다. 배신에 대한 복수는 끔찍하리만치 무시무시하다. 이렇듯 윤리의 개념과 논리의 잣대로 꿰맞출 수 없는 황당함이 묵인이 되는 것이 아마도 신화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신화를 처음 읽던 시절의 내게 신화는 호기심의 창이었다. 서양의 문화와 예술에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웅장하고 용감무쌍하고 황당하고 에로틱하기도 한 이야기들의 시원이 어디일까 궁금한 마음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그 시절에는 거부할 수 없이 운명적이고 비장미 넘치는 드라마틱한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신화를 처음 만난 시기가 그런 이야기에 매료될 나이이기도 했다.^^ 신화 속 이야기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이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월의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읽어보는 것도 스스로에게 즐거운 신화 읽기가 될 것 같다. 물론 서양 문화와 예술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는 신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창으로 신화를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놀랍고 즐거운 경험이다.  


꼭 십 년 만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이윤기의 유작인 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올해 안에 끝낼 생각에 1권부터 되짚어 본 것이다. 원래는 지난해의 계획이었는데 해를 넘기고도 막판까지 몰린 상황이 됐다. 게으름은 세밑에 확실하게 날려주고 새해를 맞이하고픈 바램에서 속도를 올리고 있다. 흑백 삽화 몇 장 곁들인 지루한 옛이야기를 듣는 듯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읽었을 때는 읽은 책 목록에 제목을 올려놓고 그저 자기만족만 주는 정도였다. 그러다 만났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심봉사 개안 후 밝고 환하고 선명해진 세상을 만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머리를 쥐어짜며 읽었던 기존 이야기에 작은 길 하나를 내준 것 같은 책이었다. 책은 십 년 전과 똑같이 책꽂이에 꽂혀 있었는데 나는 그동안 주워들은 지식들이 조금 붙어 깊이 읽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얘기에 새롭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필자는 1권에서 살짝 언급한 ‘아르곤 원정대’의 모험 이야기를 남겨두고 레테의 강을 건너가 버렸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리바디아 산기슭에서 망각의 샘물과 기억의 샘물이 만나 이룬 아름다운 시내를 만난 필자가 현지의 그리스인에게 이 시내의 이름을 물으니 ‘라이프(인생)’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십 년 만에 다시 읽은 책 한 권이 인생이라는 강물이 훑고 지나는 느낌을 던져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