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을 지워라
빌 톰슨 그림 / 어린이아현(Kizdom)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글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고, 글이 없을 때 하나의 이미지는 더 여유 있는 개념적 공간을 가질 수도 있고, 독자의 관심을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다. 글이 있다면 독자는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설명글에 의해 상상력을 지배당할 수도 있다. -숀 탠-


 

숀 탠의 <도착>이 전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나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가 안내하는 환상적인 세상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이다. 글자 없는 그림책인 <도착>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글과 그림 어느 것 하나를 빼놓고는 미궁에 빠져버리게 되는 <위고 카브레>를 두고 2008년 뉴베리와 칼데콧 위원회가 고민에 빠졌었다는 후일담은 그들의 고민과 상관없이 듣기에 즐거운 얘기다. 그해 최고의 어린이 문학 글 작가를 선정하는 뉴베리상과 최고의 그림 작가를 선정해야하는 칼데콧이 <위고 카브레>를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할 지 고민했다는 애긴데 결국 2008년 칼데콧 상이 <위고 카브레>를 차지했지만 말이다.^^

 

그림책을 시작한 것이 아이에게 읽어주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언제나 책 선택에 스토리가 우선이었다. 그러다 내가 글자를 읽어가는 동안 옆에서 책에다 얼굴 디밀고 그림을 쳐다보는 아이의 시선을 생각하며 그림이 전하는 이야기가 풍성한 탄탄한 책들에 눈을 돌리게 됐다. 물론 글이 전하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흥미로워야 하고 그림이 그 이야기를 한껏 담아내면 좋고 숨은 이야기까지 전하면 더욱 좋다는 정도였다. 일러스트는 멋진데 아이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고 엄마인 나 혼자 즐기는 몇 작품 때문에 굳어진 기준이었다. 더군다나 글자가 없는 그림책은 관심 영역 밖이었다. 아이에게 그림만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이야기를 맘껏 불어넣어보라고 하니 아이는 글자 없는 세상이 낯설고 재미없기만 하고, 상상력을 쥐어짜서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려니 창작의 고통(?)에 수고스럽고 성가셨다. 그래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나마 작가와 엄마인 나와 아이가 함께 교감할 수 있었던 글자 없는 그림책의 작가는 ‘데이빗 위즈너’가 유일했던 것 같다. 그런데 눈높이를 위대한(나는 이 작가를 이렇게 부른다.^^) 데이빗 위즈너에게 맞춰놓았으니 다른 글자 없는 그림책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데이빗 위즈너의 세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앞의 글이 너무 길었는데 빌 톰슨의 <공룡을 지워라>가 글자 없는 그림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순간적으로 느꼈던 실망감의 배경은 이랬다. 하지만 책을 펼쳐 읽는 순간 이 정도면 꽤 완성도 높은 글자 없는 그림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글인데 오히려 그림책 서두에 적은 몇 줄 글이 사족(蛇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빌 톰슨의 그림은 근접 촬영한 사진 같은 느낌을 준다. 사건 언저리의 잡다한 것들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오로지 사건의 중심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바짝 들이댄 카메라가 피부의 세세한 감정들을 놓치지 않듯 세 아이의 표정에 놀람과 공포 등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피부의 자연스런 주름, 옷의 구김, 사물의 음영, 빗방울과 빗방울이 그려내는 동심원, 햇빛과 구름까지 살아있는 표정들을 담아내고 있다. 도대체 이 물감의 정체가 뭘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빌 톰슨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고 한다.

<공룡을 지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바짝 들이댄 시선처럼 하나의 사건에만 집중한 무난한 전개를 보인다. 비오는 날 공원에 간 세 아이들이 색색의 분필이 들어있는 가방을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태양을 그리면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나비를 그리면 나비가 공원 한가득 팔랑거린다. 뭔가 짓궂은 표정의 사내아이가 그린 공룡 그림으로 인해 공원은 공포에 휩싸인다. 살아있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아이들의 뒤를 쫒는다. 하지만 해결책 또한 마법의 분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마법의 분필이 들어있는 가방을 그대로 공원에 남겨두고 돌아가며 미련이 남은 듯 돌아보는 사내아이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하다.

단순히 시간이나 계절의 흐름을 그려낸다든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화를 감상하는 듯한 글자 없는 그림책은 지루하고 재미없다. 글자 없는 그림책의 최대의 이점, 그 공간 안에 상상력을 가득 채운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안에 독자가 오래도록 머물면서 과거로 혹은 미래로 세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는 열린 세상이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데이빗 위즈너나 손탠의 <도착>과 같은 걸작을 그래도 가끔은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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