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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 - 문자도 ㅣ 우리 문화 그림책 15
박연철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진정한 엄펑소니 박연철 작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 언급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팬이다. 작품이 거듭될수록 좋아하는 작가에게 거는 기대치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을 내놓는 작가다. 늦게까지 잠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의 협박용으로 시작한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부터 <어처구니 이야기>를 거쳐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로 이어진 작품들은 틀이나 한계를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시도가 엿보인다. 조금씩 더 과감해지고 자신이 하고 싶은 방향으로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의지도 읽을 수 있다.
사실,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를 읽었을 때만 해도 아이가 즐겨본다는 것과 독특한 자기소개글 때문에 ‘박연철’이라는 이름만 입력해둔 정도였다. 2005년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의 타이틀로 출간된 <어처구니 이야기>도 작가 소개글을 먼저 읽었을 정도였으니 이 작가의 독특한 자기소개가 호감도를 상승시켰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어처구니 이야기>는 궁궐 기와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어처구니들을 소재로 한 전통창작동화가 전통적 색채의 그림들과 어우러져 꽤 재미있게 읽혔다. 단순히 옛이야기를 현대적인 옷을 입혀 재해석한 게 아니라 전통적인 소재를 끌어들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역량을 보여주기 시작했던 작품이었다. <개미와 물새와 딱따깨비>라는 옛이야기 그림책도 작가의 작품 목록에 있지만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물유래담이라서 비슷한 이야기들이 어림잡아 너댓 작품은 될 정도로 흔한 순수창작품이 아니기에 빼놓고 얘기해야 할 것 같다.
가장 최근작품인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는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맘껏 펼쳐 보인 느낌이 들었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우선 판형부터 국내 그림책에서 보기 드문 세로로 긴 형태다. 이야기의 소재가 여덟 폭 병풍 형태로 된 ‘효제문자도’여서 그런지 병풍책 형식의 미니 병풍 모습이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나타내는 글자들을 그림으로 그려 집안에 걸어두거나 병풍을 만들어 세워두었던 민화문자도가 이 그림책의 주된 소재다. 단순히 글자의 의미를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실었다면 참 재미없는 이야기책이 되었을 것이고, 민화를 비롯한 전통적인 색만을 고집했다면 그저 소장용 그림책으로 먼지만 쌓여갔을 것인데 이야기도 일부러 비틀고 그림 또한 민화문자도를 소재로 했다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동서양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뒤섞여 있다. 마그리트,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 내기쟁이 할아버지라는 화자로 나선 알프레드 히치콕까지.. 나에게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더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는 장치들이 넘쳤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림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많을 텐데 나의 한계를 느끼며 과제를 던져준다.
부족한 지식을 작가의 습작노트에서 궁금한 것들을 채웠다. 우선 화자를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었다. 히치콕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 중에 ‘맥거핀 효과’ 라는 것이 있다. 작품의 줄거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둠으로써 공포감이나 의문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를 말한다. 작가는 이 용어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을 찾아 국어사전을 ㄱ부터 뒤졌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낸 말이 ‘엄펑소니’였다. 엄펑소니란 ‘의뭉스럽게 남을 속이거나 골리는 짓, 또는 그런 솜씨.’를 뜻한다. 이런 기법을 영화에 자주 사용한 히치콕을 화자로 등장시켜 책을 읽는 독자와 내기를 제안한 거다. 내기의 상품으로 제안한 것이 바로 커다란 ‘엄펑소니’였으니 독자들은 ‘엄펑소니’의 정체가 뭔지 모르면서 내기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엄마 잉어와 아이 잉어가 살았는데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죽순이라는 음식을 한번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병든 엄마 잉어를 두고 자기 혼자 배부르게 죽순을 다 먹어버린 아이 잉어의 마음을 ‘효(孝)’라고 한다는 식으로 여덟 가지 덕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 속은 사람은 내기쟁이 히치콕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고 속아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엄펑소니를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펑소니는 피노키오가 꿀꺽 해버렸으니 피노키오의 몸을 잘 살펴보라며 발뺌을 해버린다. 내기에 졌을 경우 내기쟁이 할아버지의 부탁이란 것이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니 거짓말쟁이 피노키오나 속임수 기법을 즐기던 영화감독 히치콕 보다 박연철 작가가 한수 위 ‘엄펑소니’가 아닐런지..^^
내기쟁이 할아버지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가지 않았으니 ‘엄펑소니’라는 것을 받아야 할 텐데 바코드 비슷한 문양의 피노키오의 몸은 도대체가 뭘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한쪽 눈을 감고 책을 기울여 봐.”라는 친절한 설명서를 따라 이리저리 책을 돌려보고 들어보고 세워보니 오호? 글자들이 보인다. ‘엄펑소니는 의뭉스럽게 남을 속이는 짓을 말해’...이런 제대로 속았다. 이런 그림을 뭐라고 부르는지 또 호기심이 동한다. 물어물어 찾아보니 ‘아나몰포시스’ 라고 부른다 한다. 일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그림이 뒤틀려 보이지만 특별한 각도에서 보거나 거울에 비춰보면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그리는 그림의 기교를 말한다고 한다. 아이도 신기해서 책을 갖고 한참을 논다. 엄펑소니를 꿀꺽했으니 이제 더 이상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한다. 기특하기도 하지.^^ 우선 그림책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평소 내 생각인데 자칫 교훈적인 방향으로 풀어낼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반대로 비틀어 놓은 이야기와 시각적인 재미까지 거하게 차려놓은 이 그림책이 내가 원하는 그림책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박연철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작을 하는 작가도 아니고 이 작품도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기다림이 길어질 것 같다.
유쾌한 엄펑소니 작가 박연철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박연철 만세’를 숨겨놓으며 위트를 잊지 않는 작가 박연철이 나는 정말 좋다.^^
이 그림책의 작가 소개글도 옮겨본다.
(다른 작품들의 작가소개글은 여기에 http://blog.aladin.co.kr/706324166/3147304)
박연철
어느 날, 콧구멍을 파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 참 많은 것이 엄펑소니란 것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나중에 화장실에서 똥을 누다가 문득 또 깨달았지요.
엄펑소니를 엄펑소니가 아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난 예술가가 되었고 이 책을 만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