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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에게 버스 운전은 맡기지 마세요! ㅣ 모 윌렘스의 비둘기 시리즈
모 윌렘스 글.그림 / 살림어린이 / 2009년 6월
평점 :
맛보기로 읽어본 몇 장은 대화체로 비교적 단순했고 그림 또한 밋밋해서 특별할 게 없는 책이었다. 게다가 평화의 상징에서 뒤룩뒤룩 게으름이 잔뜩 붙어 도시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비둘기 이야기라니...오래도록 리스트에만 담겨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받아들이는 아이의 모습은 왜 진작 이 책을 소개해주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다. 근래에 그림책을 읽는 아이의 얼굴이 이렇게 밝은 적이 없었던 듯하다. 이유가 뭘까?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금방 답이 나온다. 이 비둘기는 다름 아닌 바로 아이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놀다가 늦게 자려고 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담고 있는 <비둘기를 늦게 재우지 마세요!>,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어서 끈질기게 졸라대는 모습을 담은 <강아지가 갖고 싶어!>, 맛난 음식을 혼자 먹고 싶은 모습을 담은 <비둘기야, 핫도그 맛있니?>, 버스 운전기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버스를 운전해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담아낸 <비둘기에게 버스 운전은 맡기지 마세요.>가 바로 아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모 윌렘스의 ‘비둘기 시리즈’다.
버스 운전사 아저씨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면서 자리를 비운다. 돌아올 때까지 버스를 잘 지켜 달라면서 비둘기에게 버스 운전을 맡기지 말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비둘기가 그동안 오죽 귀찮게 졸라댔기에 그랬을까. 아니나 다를까 책 귀퉁이에서 살짝 고개만 들이밀며 운전사 아저씨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비둘기는 본격적으로 졸라대기 시작한다. 자신의 사촌 허브는 매일 버스 운전을 한다면서 비둘기도 운전을 능숙하게 잘 할 수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고, 버스를 조금만 움직이게만 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하고, 버스를 운전하게만 해주면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하고, 고함지르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하고 순간 포기하는 듯싶다가도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귀엽고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애교와 막무가내로 투정을 쏟아놓는다.
이 비둘기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며 화를 돋우는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습들이 그 화를 다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혼자 핫도그를 먹으려는 비둘기 옆에서 직접적으로 달라는 말은 안 하지만 계속 깐죽거리며 말을 거는 아기 오리에게 이건 ‘그냥’ 핫도그가 아니라 ‘내’ 핫도그임을 강조하다가 결국엔 아기 오리와 사이좋게 나눠먹는 비둘기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비둘기야, 핫도그 맛있니?) 강아지가 갖고 싶다 떼를 쓰다가 실제로 털이 북슬북슬하고 이빨도 뾰족뾰족하고 침도 질질 코도 질질 흘리는 덩치가 큰 강아지를 보더니만 이번엔 해마가 갖고 싶다고 금방 마음을 돌리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강아지가 갖고 싶어!) 반쯤 감은 눈으로 연실 하품을 해대면서도 하나도 졸리지 않다고 딱 오 분만 더 놀다가 자겠다고 부탁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내 아이의 모습이다.(비둘기를 늦게 재우지 마세요!)
비둘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이 된 아이는 그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동지를 만난 듯한 느낌이 우선일 것이다. 하고 싶은 일에는 여러 가지 할 수없는 이유들이 가로막고,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먼저 배우게 되는 아이들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요구하고 뻔뻔하게 부탁하며 시원하게 고함을 내지를 수 있는 비둘기를 통해서 짜릿한 대리만족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렇게 하트 눈망울로 애교 섞인 부탁을 해온다면 들어주지 않고 버틸 재간이 내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