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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해요 ㅣ 사계절 성장 그림책
전미화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평점 :
어느 밤에 터진 아이의 울음은 아무리 달래도 끝나지 않았다. 조숙한 여섯 살이랄까,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로 나름대로 죽음이란 것에 대한 궁금증을 내 앞에서 쏟아내더니 결국 서럽게 울고 만다. 토미 드 파올라의 ‘위층 할머니, 아래층 할머니’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확실하게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유한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사실적인 설명을 나름대로 충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서 얘기를 해도 아이의 울음은 더 높아만 갔다. 아이는 엄마가 세상에 없으면 자신은 살 수 없다는 주장의 되풀이였다. 엄마는 아들이 죽을 때까지 꼭 같이 살겠다는 답을 달라는 울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냐고 묻기에 몸에 좋은 음식들도 골고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가족끼리 마음 다치게 하는 일 없이 신경을 써줘야 한다고 했더니 아빠를 불러다놓고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후에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한편으로는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대견하기도 했고, 자기 혼자 큰 줄 알게 될 만큼 자라게 되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에피소드지만 아이에게 부모의 자리란 그만큼 절대적이라는 뜻이리라.
<씩씩해요> 책속에 등장하는 아이의 슬픔이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그 슬픔과 상실감과 치유의 과정들이 내게도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달려든다. 이 책은 온통 붉은 배경에 자동차 두 대가 충돌하는 그림으로 시작한다. 차 한 대는 공중에 붕 떠서 한 바퀴를 돌고 있는 듯한 자세다. 그리고 몸에 무수한 호스들을 연결하고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과 수술실 앞 엄마와 아이의 기다림도 붉은 바탕색에 거친 먹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세련된 기교를 부린 그림도 아니고 글 또한 과장되게 흐르지 않고 잔뜩 멋 부린 흔적이 없다. 그렇게 담아낸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 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떠난 빈자리가 아이에게는 너무나 컸다. 아빠의 자리뿐만 아니라 엄마의 자리마저도 변화가 생겼다.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져야 할 엄마 또한 아이의 슬픔을 위로해줄 여유가 많지 않다. 등을 닦을 수가 없는 혼자 하는 목욕, 혼자 타는 그네, 깜깜할 때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엄마를 향한 기다림. 제 색깔을 내지 못하고 그저 배경색 안에서 선으로만 존재를 확인하는 집안의 가구들처럼 아이와 엄마 또한 그냥 그렇게 슬픔 속에 던져져 있다. 아이의 꿈속에서만 알록달록한 풍선 속에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급변한 환경에 힘들어하던 아이는 이부자리에 오줌을 싸게 되고 아이처럼 힘들었을 엄마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아이를 꼭 끌어안아 준다. 그리고 이어진 아이와 엄마의 산행, 산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이의 꿈속처럼 알록달록한 색을 뽐내고 있다. “이제부터 씩씩하게 사는 거야. 알았지?” 엄마의 말 한마디는 엄마와 아이를 조금씩 씩씩하게 만들어간다. 아이와 엄마의 집도 제 색깔들을 찾아가고 아이와 엄마는 아빠의 부재마저 끌어안으며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느닷없이 닥친 죽음이나 병상에서 몇 년간의 병치레 끝에 맞이한 죽음이나 그 상실감과 슬픔의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대비책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도 따뜻한 미소로 내게 웃음 짓던 가족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그 느닷없음의 충격이 조금 더 크다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아빠가 2년여의 시간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투병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병이 점점 아빠를 갉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들이 잠든 깊은 밤에 부둥켜안고 숨죽여 우는 부모님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집 안 곳곳에 스며드는 죽음의 냄새를 느끼면서 그렇게 맞이한 아빠와의 이별이었는데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수시로 쑤시고 아픈 상처다. 그런데 이 책, <씩씩해요>을 만나면서 내게도 뒤늦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누구의 위로도 차단시켜 버렸고 스스로 상처가 아물 거라고 믿으며 덮어두려고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슬픔은 충분히 슬퍼했어야 했고 그 상처를 다양한 방식의 치유 과정을 통해서 달래줬어야 했다.
책과 책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는 모양이다. 이 책 <씩씩해요>를 읽을 즈음에 읽은 어느 작가의 산문집을 읽게 됐다. 10년도 훌쩍 넘게 이삿짐에 얹어서 끌고 다니던 추억의 상자를 정리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었다. 자잘한 기념품들과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물건들과 기억도 나지 않는 수집품들과 쓰다만 재떨이 같은 별로 소용되지 않는 잡다한 추억의 물건들을 보관했던 상자들이었다. 몇 시간에 걸쳐 지난 추억들을 쓰레기처럼 정리하고 산책을 핑계 삼아 배회하다 문득 든 생각.
‘오늘 난 상자에 가둬뒀던 내 과거의 시간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이다. 오늘 버려진 것들이 앞으로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게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이제는 자유롭게 풀어줄 묵은 감정이 있음을 느꼈다. 웃자란 애어른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멈춰버리게 만들었던 아빠의 죽음. 아빠의 기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가끔씩 들춰서 상처들을 확인하고는 도로 덮어두곤 했던 그 마음을 꺼내서 맘껏 다독여 주려고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풀어주려 한다. 그리고 이제는 씩씩한 척이 아니라 진짜 씩씩해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