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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펠슈틸츠헨 ㅣ 베틀북 그림책 17
폴 젤린스키 글 그림, 이지연 옮김 / 베틀북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여느 창작 그림책보다 명작에 큰 재미를 붙이지 못하던 아이가 요즘 조금씩 명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다보니 선택의 기준은 자연스레 그림 작가에게로 기운다. 세계명작 전집을 살펴봐도 아이들 명작동화의 원전은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의 작품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이라는 작가들이 없었다면 동화는 참 빈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동화들도 여러 측면에서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의 다양한 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 <룸펠슈틸츠헨>은 그림 형제의 이야기에 칼데콧 상을 여러 번 수상한 폴 오 젤린스키의 그림으로 완성된 그림책이다. 폴 오 젤린스키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 아이 안젤리카(비룡소)>에 이어 두 번째다. 폴 오 젤린스키의 작품 목록에 칼데콧상을 받은 ‘라푼젤’과 칼데콧 아너상을 받은 ‘헨젤과 그레텔’이 올라 있기에 검색을 해봤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번역 작품은 <룸펠슈틸츠헨>과 <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 아이 안젤리카> 두 작품뿐이다. 다른 작품들의 그림도 근사할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아무 장이나 뜯어내 액자에 끼워도 회화 작품이 될 것 같은 멋진 그림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읽지 않았어도 한번쯤 들어본 듯한 이야기다. 왕의 행렬과 마주친 방앗간 주인이 자신의 딸은 물레로 짚을 자아서 황금 실을 뽑아내는 재주가 있다고 자랑을 한다. 왕은 소녀를 성으로 데려가 짚이 가득한 방에 가두고 황금 실을 뽑아내라고 명령한다. 곤경에 처한 소녀 앞에 작은 남자가 나타나 소녀 대신 황금 실을 뽑아주고 그 댓가로 목걸이며 반지를 가져간다. 눈앞에 그득한 황금 실들을 본 왕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황금 실을 뽑아준다면 아내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고 더 이상 작은 남자에게 줄 게 없었던 소녀는 왕비가 되어 낳은 첫 아기를 달라는 작은 남자의 제안에 당장의 상황을 모면할 생각에 덜컥 약속을 하고 만다. 그렇게 왕비가 된 소녀는 사내아이를 낳았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작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며 아이를 데려가려 한다. 왕비의 애원에 마음이 약해진 작은 남자는 사흘 안에 자신의 이름을 알아맞히면 아이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제안하다. 하지만 왕비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이름도 이 작은 남자의 이름은 아니었다. 괴상망측한 이름들까지 총동원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날 시녀의 도움으로 작은 남자의 이름을 가까스로 알아낸 왕비가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작은 남자는 사라져 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작은 남자의 이름은 바로 ‘룸펠슈틸츠헨’이다.
억세게 운 좋은 방앗간 집 딸은 작은 남자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이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 아름다운 외모를 제외하고는 특별할 것이 없다. 낙천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라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훗날 태어날 자신의 아이까지 저당 잡힐 정도로 경솔하기 짝이 없다. 그런 여자가 우연한 기회에 수수께끼의 열쇠까지 얻게 되니 아이를 빼앗기지 않아서 안도하는 정도일 뿐 솔직히 작은 남자 편에 서고 싶어진다.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하고, 약속에는 늘 신중해야 한다는 말만 덩그러니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