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할아버지의 붉은 뺨 ㅣ 웅진 세계그림책 94
하인츠 야니쉬 지음, 얄료샤 블라우 그림, 박민수 옮김 / 웅진주니어 / 2006년 8월
평점 :
눈물이 살짝 핑 돌면서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오르게 되는 그런 책이다.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기억에 없고, 돌 무렵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기억난다고 우기기는 하지만 얼마만큼 남아있는 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사진 속의 외할아버지 모습은 주변에서 흔히 보는 할아버지들처럼 흰머리, 주름 가득한 얼굴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쇠한 모습이 아니라 아빠의 모습처럼 싱싱하기만 해서 어리둥절해 한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내 아이에게 “할아버지도 너 만한 손자가 있는데 너도 할아버지가 있지?”하고 말씀하시는데 아이가 “우리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계세요.”하니까 친할아버지냐 외할아버지냐 재차 물으셨다. “두 분 다 하늘나라에 산다니까요.”하고 아이가 대답하니 아이쿠 아픈 얘기를 했다고 많이 미안해 하셨던 적이 있다. 죽음으로 인한 부재에 대해서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가끔 그림책 속에서 죽음을 만나면 할아버지들이 계신 하늘나라와 연관 짓는 정도... 존 버닝햄의 <우리 할아버지>나 토미 드 파올라의 <위층 할머니 아래층 할머니> 같은 책들을 권할 때 조심스러워지는 건 어른들의 몫일뿐 무거운 슬픔이라든지 쓸쓸한 이별을 알아버리기에는 아이의 일상은 한없이 따스하고 밝기만 해서 슬픔도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하긴 함께 한 세월의 깊이가 깊을수록 쌓인 이야기들이 많을수록 이별의 슬픔이 묵직하게 다가온다는 사실도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긴 하다. 할아버지의 빈 의자가 이야기하는 슬픔을 어렴풋이 느끼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죽음을 삶의 단절이 아니라 소통의 단절로 느끼는 것 같다. 생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 라는 곳에서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 다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와 함께 소통할 수 없는 것일 뿐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아니, 가끔 소통을 하고 싶어 하는 것도 같다. 투명인간이 되어서라도 나타나시면 좋겠다고 하는 걸 보면...
지금처럼 그림책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던 우리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이야기 한두 번 들어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 책 속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소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다. 축구공을 높이 차 올려서 비구름을 맞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든지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강을 만나 다리 하나를 뚝딱 지었다든지 전쟁 중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 낙하산에서 뛰어내렸더니 고향 집 흔들의자 위였다든지 숲에서 날개 한 쌍을 발견해 하늘을 날아봤다든지 겨울 산에서 눈사나이를 만나서 함께 썰매를 탔다든지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책 속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배꼽 속에서 빨간 버튼을 찾아내서 버튼을 누르자 귓속에서 빨간 불꽃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다. 손자는 가끔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할아버지가 그랬다면 그런 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가 스물일곱 날을 병상에서 보냈던 일을 꿈에서 세계 일주를 했다는 할아버지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어른들의 말보다 투명인간이 되어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할아버지가 실재하는 존재라고 믿고 있다.
평생 동안 아들에게 엄청난 애정을 쏟으셨던 아버님은 분명 손자에게 그 사랑을 옮기셨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아이는 지나치다 싶게 풍족하게 누리는 것들이 많았겠지만 불행히도 ‘할아버지’ 소리도 못 들어보시고 서둘러 가셨다. 우리 아이는 가끔 이런 소리를 한다. “하늘나라에서 할아버지가 손자 밥 잘 먹고 있나 보고 계실껄?” 두 분 할아버지...그곳에서 부디 건강하시고 손자들 잘 크고 있나 잘 살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