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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ㅣ I LOVE 그림책
캐드린 브라운 그림, 신시아 라일런트 글,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04년 11월
평점 :
우연히 건진 보물 같은 책이다. 우선 그림책을 선택할 때는 여기저기서 구한 추천목록들을 참조하거나 즐겨보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편인데 이 책은 정말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그림책들 속을 산책하다가 집어든 책이었다. 수채화풍의 그림이 눈을 끌어 집어든 책은 그림처럼 따스하고 예쁘기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약간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껴안은 따스함이랄까? 아이보다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책 리스트에 또 한권 올려놓겠다 싶었던 책이었는데 아이는 예상을 깨고 즐겨 본다. 물론 저변에 깔린 잔잔한 외로움을 가슴 깊이 공감하지는 못할 테지만 할머니의 행동이 외로움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서슴없이 말할 정도의 공감은 이끌어낸 것 같다.
너무 오래 산 탓에 친구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우편물이라고는 세금 고지서가 전부인 할머니는 주변의 사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시작한다. 낡은 집을 비롯해서 의자, 침대, 자동차, 옷장, 외바퀴 손수레, 정원의 조각상까지...하지만 할머니의 이름 짓기에는 철칙이 있다. 할머니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들에게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돌쩌귀에 녹이 잔뜩 슬어서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은 출입문은 그런 이유로 이름이 없다. 그런 할머니 집에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매일 찾아온다. 사람보다 오래 살지 못할 강아지에게 이름 지어주기를 거부하지만 어느 날 자취를 감춘 갈색 개는 할머니를 더욱 허전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유기견 보호소를 찾아가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과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이별 후에 홀로 남겨질 두려움에 관계 맺기를 차단시켜버렸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할머니는 갈색 개에게 ‘러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헤어짐에 익숙할 법도 하지만 수많은 이별을 겪어온 탓에 그 두려움과 쓸쓸함 또한 너무나 잘 알기에 더욱 지독하게 싫을 수 있다. 이름만 지어주지 않는다면 책임이나 의무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믿은 할머니는 이미 할머니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갈색 개의 존재를 개의 부재를 통해서 인정하게 되지만 할머니에게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김춘수의 ‘꽃’과 많이 닮아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 그저 갈색 개로 잊어버렸다면 ‘러키’와의 추억마저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죽을 날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양새로 늙어가는 여생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이와 엄마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은 책...괜찮은 그림책을 발견했을 때 엄마가 느끼는 그 사랑스러움을 글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엄마지만 아이는 할머니처럼 자기 맘대로 이름 짓기를 재미있어 하고,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들을 용케도 잘 연결시킨다. 꽃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할머니의 집 ‘프랭클린’이 마음에 든다고 이곳으로 이사 가자고 하니 도시를 떠나고픈 마음이 또 잠시 스멀거린다.
덧붙임) 글을 쓴 신시아 라일런트는 ‘칼데콧 상’과 ‘뉴베리 상’을 각각 두 번씩이나 수상한 작가란다. 글도 무척 마음에 들지만 캐드린 브라운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른 책들을 검색해 봤지만 아쉽게도 이 책 한 권 밖에 찾을 수 없었다. 신시아 라일런트의 다른 작품들은 그림이 주는 분위기 탓인지 이 책만큼 대번에 마음을 사로잡는 책들이 없다. 이 책 속에 신시아 라일런트의 작품으로 소개된 <감자 하나 감자 둘>이 마음에 들어 검색해 보니 신시아 디펠리스라는 이름이다. 처녀때 성인가 싶어서 저자 약력도 살폈는데 신시아 라일런트와는 다르다. 지금으로선 동일인인지 누구의 착오인지 알 길이 없다. 보물창고에 문의를 해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