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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보니 하니가 떠올랐다. 꿋꿋한 하니의 모습과 하니가 '엄마~' 하고 달리는 모습이 생각의 실타래를 타고 이어졌다. 하지만 하니와 아비는 엄연히 달랐다. 우선, 아비는 꿋꿋하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을 집에 남기고 집을 나간 일종의 도망자였으므로 꿋꿋할 수 없었다. 또한, 일정한 코스를 달리는 하니와는 달리 아비는 밑도 끝도 없이 달렸다. 오늘도 아비는 남겨진 딸의 머릿속에서 결승선을 배제한 채 끝이 없는 마라톤 코스를 달리고 있다.

남겨진 딸은 상상한다. 어딘가에서 계속 달리고 계실 아버지를. 분홍색 반바지 차림에 지구 위를 총총히 걷거나, 쉴 새 없이 달리고 계실 아버지를 상상하는 딸의 모습이 뭉뚱그려진다.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그렇게 태연하게 상상할 수 있을까? 내 눈에는 하니의 털끝만치도 사랑스럽지 않은 주인공의 아버지를 주인공 자신은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연민이나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냥 그 상황, 그 삶 자체에 순응하며 그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 이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괜시리 애처로웠다.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을 물려 받았다는 것은 곧, 자신을 연민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유산만큼은 제대로 물려받은 듯 하다. 주인공은 철저하게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소설이 내게 더 큰 감명을 준 것은 주인공의 현실 순응 속에 숨어있는 자그마한 상처때문이다. 그 상처를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숨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꿋꿋한 주인공이지만, 마음 속에는 자세히 들여다 보면 희미하게 비치는 자그마한 상처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 상처는 치유하기에 무척이나 힘들어 보인다. 적어도 나였더라면 그 상처는 점점 다른 곳곳에 퍼져 큼지막한 흉터를 남겼으리라. 하지만 주인공의 상처는 번지지 않았다. 상처가 흉터로 변해버리기 전에 주인공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그것을 '간단한 긁힘'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것의 효험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의 사망소식이 전해져온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는 영어로 빽빽이 채워져있다. 아버지의 또다른 딸은 편지를 집어들고 숨죽여 속으로 읽는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이후로 외국으로 나가 그곳에서 살림을 꾸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안한 일생을 보내셨다. 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는 집을 나갈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뜬금없이 죽어버렸다. 또,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어머니에게는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달랑 한 장의 사망소식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또다른 딸이 속으로 읽은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영어는 커녕 알파벳조차 모르는 어머니는 편지에 뭐라고 쓰여져 있느냐고  묻는다. "엄마... 아빠가 죽었대.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대." 어머니는 그 외에 내용을 묻는다. 딸은 거짓말을 한다. 위로의 거짓말일까.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한 적없는 위로를 어머니에게 해드리려는 것일까. "아버지가... 미안하대. 평생 미안해하며 살았대... 이 사람 말로는." 어머니의 눈망울이 흔들린다.  "그리고 엄마, 그때 참 예뻤대..."  어머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주인공은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한번도 울어본 적은 없으나 성대가 부어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택시 요금 할증이 다 풀릴 때 즈음에 들어온 어머니는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딸에게 말한다. "잘 썩고 있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머릿속에는 계속 아버지가 달리고 계신다. 여전히 분홍색 반바지 차림으로 총총히 걷고 계시거나, 쉴 새 없이 달리고 계신다. 그날 밤주인공은 결심한다.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씌어드리기로. ‹볕 아래 눈이 아프고 부셨을 아버지를 위해.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기대감에 부푼 그러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년 같다. 그리하여 이제 나의 커다란 두 손이, 아버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젠, 아마 더 잘 뛸 수 있으실 것이다. (달려라, 아비 中..)

아버지는 그 이후로 더 잘 뛰셨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니, 펄펄 날아다니셨을지도 모른다. 딸이 선물한 선글라스를 낀 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작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이다.

<달려라, 아비>에는 표제작 '달려라, 아비' 외에도 여러 단편들이 실려있다. 하지만 나는 '달려라, 아비'에 대해서만 말하련다. 이 단편소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은 빛을 발할 것이며, 이 단편소설 하나가 책 전체를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은 '우리의 삶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 이라고 조언해 주는 것 같다. 물론 소설 속의 인물들 대부분이 처지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된다. 아무리 아버지 없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 주인공에게 말이다. 아니,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말이다.

아니, 아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고마워요, 아비.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요. 딸에게, 부인에게 그런 방법을 터득하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부디 잘 달리고 계세요. 딸이 씌워준 선글라스는 잘 쓰고 있죠? 그럼 계속 달리세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그 무엇도 아비를 방해하지 못할거예요. 당신의 딸이 존재하는 한... 당신의 딸이 당신을 지켜주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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