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 산다는 것
오동명 지음 / 두리미디어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누나 방 한 편에는 10년도 더 된 낡은 갈색의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시흥으로 이사 오고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어머니는 건장한 아저씨 두 분을 데리고 오셨고, 바로 그 날부터 피아노는 줄곧 우리 집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 꽤 오래 된 피아노였는데, 곳곳에 긁힌 자국과 그리 신통치 못한 음색이었지만 그래도 피아노라는 이름 이였기에 둥당둥당 치는 맛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부모님은 나를 위해 매달 피 같은 돈을 학원비로 대신해야 했다.


부모님이 그 때 왜 피아노를 시키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또래 애들도 학원에 다니는 것을 보고는 나 역시 어딘가에는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러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부모님을 위해 작은 실력으로나마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 순간만큼은 부모님의 얼굴에 햇빛이 찬란했다. 평소에는 그늘이 살짝 드리워진 어두운 얼굴의 두 분이었는데, 나의 연주에 그리도 감격하시다니. 어린 나는 IMF로 인해 힘든 삶을 사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얼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래도 나를 마주할 때는 언제나 웃음으로 답하시던 부모님……. 나는 그런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두둥둥- 두둥둥- 둥당둥당- 그럴 때면 언제나 부모님의 얼굴은 날아다니는 음표들에 의해 기쁨으로 흠뻑 적셔지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피아노에 대한 추억이다. 어릴 적에는 그저 재밌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만 했지 부모님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식들을 위해 뒷바라지 해주시던 그 든든함. 힘들면서도, 정말 힘들면서도 자식을 마주할 때면 항상 입가에 웃음이 머물고 있었던 부모님의 얼굴. 책 속 예화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지금보다 더 젊은 부모님을 회상하게 되었다. 부모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련한 추억을 통해서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걸까. 나의 기억은 책과 회상과 그리움을 타고 피아노 선율에 맞춰 흔들흔들 춤추었다.


피아노 학원에는 5개의 피아노 방이 있었다. 유명한 음악가의 이름을 딴 5개의 방은 각각 헨델, 바흐, 슈베르트, 모차르트, 베토벤 이렇게 5가지의 이름으로 나뉘었다. 피아노를 어느 방에서 칠 것인가 선택할 수 없었고, 그냥 자리가 없는 곳에 들어가 한 곡당 다섯 번 내지 열 번의 연습을 하면 됐다. 나는 헨델 방에 자주 들어갔다. 그렇다고 그 방이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헨델 방은 소리도 잘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도 고장이 나 잘 닫히지 않았다. 그 방은 마치 아버지 같았다. 소리도 잘 나지 않으며 마음의 문도 고장이 나버린 아버지……. 일하느라 매일 밤늦게 돌아오시곤 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헨델 방처럼 조용하고 눅눅했다. 책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입니다.’ 언제나 힘든 일을 도맡아 하시던 아버지셨다. 정말로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었을까. 그 눈물을 왜 진즉에 닦아드리지 못했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던 방은 슈베르트 방이었다. 최근에 피아노를 새 것으로 바꾼 지라 소리가 아주 낭랑했고, 공기마저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꼭 어머니와도 같았다. 항상 힘이 넘치시던 어머니……. 가끔 아버지를 도와 부업으로 살림살이를 도우며 어머니는 견뎌내셨다. 그렇게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어머니는 더욱 힘차지셨고, 그럴수록 더욱 더 그 이면은 깊어만 갔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찌나 나의 어머니를 빼닮았는지. 슈베르트 방을 찾을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아 맞다. 슈베르트 방의 피아노는 이상하게도 자주 바뀌었고, 고장이 자주 났다. 평소엔 힘이 있다가도 가끔 흔들리는 피아노 선율. 어머니가 더 생각났다. 어머니는 그렇게 힘이 넘치시던 모습으로 흔들리는 것에 대한 자위를 하셨던 것이 아닐까.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아버지는 일할 적에는 아버지로서 강하게 일하셨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자로서 약한 마음을 다잡으셨다. 내가 처음에 헨델 방을 좋아하지 않았듯이 아버지와 나 또한 처음에는 거리가 상당했다. 매일 늦게 돌아오시니 함께할 시간이 없었고, 그저 어렵게 여겨지기만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부정이 내 가슴에 쌓였고 아버지의 술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헨델 방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헨델 방을 자주 찾던 나처럼 말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이 책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주었다. 항상 정성스레 생일상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일화와 가족을 짐에 진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 점점 늙어가는 부모님의 모습……. 너 때문에 산다. 우리에겐 너 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곤 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이제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 것 같다. 지금도 어린 아이들을 보며 희망을 얻는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그 당시 부모님 역시 우리들을 보며 희망을 품으셨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런 희망을 품고 계실 것이다. 그 희망이 작아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부모님의 마음속에 자리한 희망의 싹을 정성껏 돌보자고 다짐해본다. 쑥쑥 자라게 해드릴게요…….


오랜만에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본다. 예전 같지 않다. 벌써 손이 굳어버렸는지 툭툭 끊어지는 선율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계속 두드리고 있다. 내일 아침 부모님을 위해 연주회를 해드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그렇게 자주 해드리던 연주회를 이제 어엿한 소년이 되어 해드리려 한다. 두둥둥- 두둥둥- 둥당둥당- 부모님의 얼굴이 다시금 날개 단 음표들에 의해 기쁨으로 충만할 모습을 상상하며, 건반 위의 내 손이 점점 빨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