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
서술기법으로 반격!
:『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 민음사, 2004) 을 읽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내 이름은 빨강』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였는지. 책 뒷부분 판권면을 펼쳤다. 초판 1쇄 발행해는 2004년. 그래, 대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그해 어느 날, 학교도서관에서 신문 책 소개 면을 보다가 이 소설 첫 부분을 인용한 기사를 읽었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1「나는 죽은 몸」)

죽은 이의 입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발상에 놀랐다. ‘소설’이라서 지닐 수 있는 독특한 서술방식이었다. 영화나 드라마가 내세우기 어려운 서술자를 소설은 비교적 쉽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첫 대목에 매료되어 제목과 작가를 기억해두었다. 꼭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일상에 치여 차츰 미루고 말았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고 가끔씩 떠올리는 다른 많은 책들과 결국 같은 신세가 되었다.

2006년 겨울, 다시 그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들었다. 군대에서 3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두고 있는 때였다. 바깥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는데 아마도 일요일 종교행사에 참석한 다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해 노벨상 수상 작가를 알리는 뉴스를 들었다. 바로 내가 기억하고 있던 터키 사람 오르한 파묵이었다. 그 이름을 듣자마다 『내 이름은 빨강』이 머릿속에서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

줄곧 빚쟁이처럼 따라붙었던 그 소설을 임관하고 이듬해 초에 읽었다. 하지만 군 생활의 긴장과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른 뒤 올해, 한국어 번역본 발간 10주년이 지나가기 전에 빚잔치를 끝냈다.

이 작품은 시대와 정치 상황의 변화 속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소설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화원 소속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전통화풍을 고수하는 것과 서양화풍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정체성을 찾아가며 장인정신을 구현하고자 한다. 그러다가 두 세력 사이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술탄의 명에 따라 주인공 카라가 살인범의 정체를 파헤친다. 서사만 보면 움베르트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의 매력은 서사보다는 서술방식에 있다. 앞서 말했듯 죽은 이의 목소리로 소설을 시작하며 그밖에도 금화, 나무, 그림 속 개 등이 서술자로 등장한다. 각 챕터마다 서술자가 바뀌어 다양한 관점에서 사건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은 이 작품을 ‘나의 모든 소설 중 가장 색채감 있는 소설’이라고 일컬었다. 터키의 세밀화가 주요 소재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동감 있는 묘사를 읽으면 낯설고 신비로운 이슬람 회화들을 직접 감상하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궁정 화원의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설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다들 영상이나 웹툰에만 관심을 쏟는 것 같아 속상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을 읽은 뒤 괜히 어깨를 우쭐 흔들고 싶었다. 영상과 웹툰의 세계에게 외치고 싶다.

‘해볼 테면 해봐라. 너희들의 세계에서 『내 이름은 빨강』을 구현할 수 있겠냐? 어림도 없을 걸?`

소설이여, 영상과 맞짱 떠라. 『내 이름은 빨강』으로 선빵을 날려라. 반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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