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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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제 옮김

현대지성 펴냄


(...) 모든 친밀한 관계의 원천이자 아버지인 쿠피도는 어떻습니따? 정작 그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들어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듯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곤 하지만, 사실 인생을 즐겁게 만들고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랍니다.

66-67쪽


<우신예찬>, 미뤄둔 숙제같았던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미뤄둔 숙제라고 표현하기가 웃기지만, 좋아하지 않았던 윤리 선생님의 수업시간마다 <우신예찬>을 들으며 곧 죽어도 저 책만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읽을 기회가 생겼지만 기를 쓰고 피했던 이 책, <우신예찬>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우신예찬>은 오히려 반갑기까지했다.

저자 에라스무스는 부모를 여의고 수도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하는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규칙과 관례를 지켜야할 수도원은 타락과 부패로 가득했다. 에라스무스 본인 또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한다. 당시 교회는 청빈한 삶을 지향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종교를 고착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돈과 명예를 추구해야했다. 그런 모순적인 배경과 인간에 대한 고찰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작품이 바로 <우신예찬>이다.


현자 = AI ?

(...)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모름지기 현자라면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 자체를 제거하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새로운 신을 '창조'해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감정이 결여된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을 현자라고 이름붙였습니다.

(...)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런 현자를 본다면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이 무서워하며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완벽한 현자란 인간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만일 투표를 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느 국가가 관리로 선출하겠으며, 어느 군대가 사령관으로 뽑겠습니까? 또한 어떤 여자가 그런 남편을 원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그를 손님으로 초대하겠으며, 어떤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모시려 하겠습니까? 그보다는 누구든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 중에서한 명을 선출해 자신들을 다스릴 자로 세우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어리석기에 어리석은 자들을 다룰 줄 알고,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 자기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을 기쁘게 해불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 30장 현자는 사람이 아니다 中

우신(愚神)이라 해서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음'을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 철학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학자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될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명목만 있는 스토아 철학을 전면으로 비판해 '어리석음' 또한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할 결함이자 덕목으로 지적하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정말 직관적이라고 느끼는 부분 중 하나는 스토아 학자가 주장한 '현자'의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대리석에 가깝다고 발언한 부분이다. 스토아 학자들이 원했던 현자는 현시대 AI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축적된 데이터와 다양한 변수들과 상호작용 하면서 예외성을 배제한, 그런 존재 말이다.

<우신예찬>의 30장 [현자는 사람이 아니다]를 읽고 어느 인간이 AI가 인간을 통치할 수 있도록 독려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재 스토아 학자들이 훌륭한 현자의 표본으로 원했던 존재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임에도 아무도 그를 현자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이 만들어내는 부스러기에 번뇌를 느끼는 사람들은 AI의 삶을 부러워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AI'가 된다는 것, 즉 <우신예찬>에서 언급했듯 '현자'를 추앙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현실성없는 우상에 가깝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다.


어리석음으로 하여금 온전해지는 삶?

(...)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들어갈수록 행복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신의 신체 기관을 적절히 사용하려 하지 않는 상태란 의심할 여지 없이 미친 것이고 광기이며,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그토록 갈망하는 천국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영혼이 더욱 힘이 세져 육체를 집어삼키고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 이 세상에서살아갈 때부터 천국에서일어날 변화에 대비해 육체를 정화하고 약화시켰왔기 때문에 그런 일을 쉽게 해낼 것입니다.

(...) 기독교인이 되어 삶이 변해도 우신인 나의 영역은 제거되지 않고 도리어 완전해집니다. 이런 삶의 변화를 아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일종의 광기 비슷한 것을 겪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거나 인간의 관습에 어긋난 말을 하고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가 하면 표정이 수시로 바뀝니다.

(...) 그렇게 광기에 빠져있는 동안 자신이 가장 행복했다는 것만 압니다. 그래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한탄하며 그런 광기 가운데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기만을 소원합니다. 미래의 행복을 살짝 맛보기만 해도 이렇습니다.

- 67장 기독교인이 받을 최고의 상은 광기다 中

르네상스 시대에 금서로 지정된 <우신예찬>의 '우신'의 연장선에 그들이 믿었던 '신'이 존재하고 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가 있었고, 지금은 잘 참석하지 않지만 종종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종교인 분들도 계시기에 일반화하기엔 어렵지만, 대부분의 이론은 현생은 죽음 뒤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 정도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현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제2의 삶이 완전히 갈리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신은 자애로우며, 온전히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삶보다 영혼이 떠난 뒤를 약속하며 절제하고, 순종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니. 에라스무스가 언급한 "제정신"은 "현실감각"이 아닐까 싶었다. 신의 요구대로라면 삶의 제한이 많아진다.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화를 밝혀서는 안 되고, 교리를 어길 수도 있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신은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어리석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만이 천국의 단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나도 모르게 비소가 지어졌다.


<우신예찬>이 딱딱하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지금도 통용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웠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이라는 존재 외에도 철학자, 수도사, 교황 등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이들 모두를 아주 시원하게 비틀고, 품격있게 꼬집어 비판했다. 에라스무스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을 시절, <우신예찬>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신에 빗댄 세상 이야기 정도로 읽혔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 대부분이 직접적인 단어는 피하며 은유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신예찬>이 요지경인 세상을 비꼰 작품의 대표격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읽으니, 에라스무스의 표현들이 예술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역시, 고전은 언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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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국내 최초 스페인어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6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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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김유경 옮김

현대지성 펴냄


단촐한 문장을 좋아한다. 문장이 간결하고 단호할수록 안에 담긴 의미가 잘 전달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문장을 작성할 때 장황하게 작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막상 적어두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사람을 얻는 지혜>가 그렇다. 단촐한 문장에 납득가는 설명, 제목부터가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제목은 <사람을 얻는 지혜>지만 사람을 얻는 일 뿐만 아니라 적당히 멀어지기도, 적당히 이용하기도 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몇가지 기억에 남는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마음에 새기기 위한 기록, 을이 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맞춰주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점을 숨길 수 없다면, 숨겨라

35쪽

치명적인 패를 보여주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도 없는 것 같다. 간혹 결점 혹은 단점을 드러내며 친분을 쌓으려는 경우가 있다. 상호 득실관계가 없는 경우나 무조건적인 애정이 수반되는 경우(예 : 가족) 결핍된 부분을 드러내면서 돈독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결점을 드러낸다면 공격받기 십상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운이 따르는 사람 곁에 서라

57쪽

맹목적인 운이 아니라 '불운의 전염성'에 대해 역설하는 구절이다. 불행은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불행의 늪에 빠지면 끊임없이 대부분의 상황을 불행으로 몰아간다. 발타자르는 가진 패를 버릴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불운을 끊어내는 것은 행운을 받아들이는 시작점임을 기억해야겠다.

최선을 다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

90쪽

처음부터 잘하면 끝까지 잘해야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백 번 잘하다가 한 번 못하는 것은 백 번 못하다가 한 번 잘하는 것보다 강렬하다. 발타자르는 낮은 일에서 탁월하면 하찮은 일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일의 경중을 따져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열을 쏟는 일을 지양해야겠다.

어리석은 자가 친구에게서 얻는 유익보다 지혜자가 적에게서 얻는 유익이 더 크다

142쪽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려웠다. 뒤에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이 적들 덕분에 위대해졌다"는 단락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혜로운 자는 아군의 곁에서 마음을 놓고 있는 것보다 적군의 옆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을 추구한다.

쉽게 믿는 사람은 금방 수치를 당한다

191쪽

"남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쟁이임을 보여주는 징표" 상황을 무작정 의심하는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발타자르는 쉽게 믿지 말것을 누군가를 의심하라는 의미가 아닌,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임을 언급했다. <사람을 얻는 지혜>에서는 본인에게 해로운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구절이 종종 등장한다.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거짓이 결과적으로 해롭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겠다.

한순간의 쾌락이 평생의 수치가 될 수 있다

247쪽

인내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구절이다. 일부 사람들은 참는 것을 미련하다고 여긴다. 발타자르가 강조하는 인내는 무조건 참아내는 선인의 인내가 아니다. 사사로운 정념에 순간 휩쓸리지 지혜를 말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순간적으로 넘어오는 충동을 다스리지 않으면 삶 속에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당신의 교활함을 현명함으로 바꾸라

259쪽

발타자르는 현명함이 교활함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런데 현명함과 교활함이 동일 선상에 있는 점이 조금 의아했다.

현명 : 어질고 슬기로워 사리에 밝음.

반의어 - 현명의 반의어는 없음

어질 현의 반의어 - 어리석을 우

밝을 명의 반의어 - 어두울 암

= 농매, 무지

교활 : 간사하고 꾀가 많음.

반의어 - 정직 :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

현명과 교활은 사리에 밝고 명민하다는 뜻을 포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교활의 반의어는 도덕적인 가치를 가진 "정직"인 반면 현명의 반의어는 "무지" 정도로, 어떤 가치도 들어있지 않은 空의 상태에 가깝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도덕적인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잘 감추고 극복해 현명함으로 변모할 것을 역설한 것이 아닐까?

반응하지 않는 것도 반응이다

325쪽

반박하는 사람에게 반응하지 말고 신중할 것, 발타자르가 꾸준히 언급하는 가치 중 하나는 중용인 것 같다.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말고 항상 주의할 것을 강조한다. 언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장단이 있다. 발타자르는 언쟁으로 인해 어려움에 빠지거나, 신세를 망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조건 이기는 것이 상책은 아니다. 그것을 승패가 갈리는 싸움이 아닌 사사로운 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을 당하는 쪽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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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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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인플루엔셜 펴냄


소설 <파친코 1>은 1부 <고향 1910-1933>과 2부 <모국 1939-1963>로 구성되어있다. 영도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행하게 살고 있는 선자, 그녀는 당차고 야무진 조선 소녀다. 1910년은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합병된 해로, 작은 이야기에도 예민해지던 시기와 동시에 여성의 삶이 지금보다 폐쇄적이었던 사회의 시대였다. 선자의 부모님은 작은 하숙집을 운영하며 살림을 일구고 계신다. 선자는 곧 시집을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런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등장하며 운명의 파도는 선자를 집어삼킨다.

선자가 어리석었다. 왜 한수 정도의 나이와 지위를 가진 남자에게 아내와 자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한수가 일자무식인 시골 처녀와 혼인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얼토당토않았다. 부유한 남자는 아내와 첩을 뒀고, 때로는 본처와 첩이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선자는 한수의 첩이 될 수 없었다.

불구였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하숙집 손님들이 밥을 먹고 나면 세 식구가 밥상 하나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여자들보다 먼저 먹는 법도 없었다. 밥을 먹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 그릇에 아버지랑 같은 양의 고기와 생선이 놓여있는지 확인했다.

여름에는 하루 종일 고기잡이를 하고 나서 또 수박밭을 돌보았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이어서였다.

겨울마다 새로 튼 솜을 구해와서 식구들의 겉옷에 넣었꼬 솜이 부족하면 본인 옷에는 새 속을 넣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우겼다.


매체에서 종종 "아직도 저런 분위기의 가정이 있다고?" 싶은 으악스러운 장면을 마주한다. 배우자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존재하건만, 선자의 아버지는 달랐다. 몸이 불편했지만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성실했던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선자의 아버지에겐 성별도, 가족간 위계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을 사랑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란 선자에게 한수는 변수였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수에게 삶은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한수는 똑똑한 여자와 건강한 아들을 낳고 싶었다. 한수에게 선자는 한눈에 봐도 명민한 여자였다. 서로를 아껴주는 부모님 아래 성장한 선자는 한수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첩이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허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세상은 남편없이 아이를 가진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선자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믿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무덤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가 더 잘 느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면, 백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백이삭의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에 했다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등장한 이삭, 이삭의 등장으로 선자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삭은 선자 어머니의 하숙집에 머물며 아픈 몸을 뉘인다.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선자와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병세가 나아진다. 이삭은 선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와 결혼할 의사를 내비친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선자는 이삭과 혼인해 오사카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 선자야. 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 각오하고 있는게 낫다. 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 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 뿐인 기라."


오사카로 향한 선자는 그곳에서 아주버님 요셉과 그녀의 아내 경희와 함께 살게 된다. 요셉과 경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요셉은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그에게 자신의 여자를 고생시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적부터 집안 일을 도와온 선자에게는 낯설었다. 후에 이삭이 형무소에 끌려가 징역생활을 했을 적에도 요셉은 경희의 바깥생활을 언짢아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랑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요셉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좋은" 남성으로 느껴졌다. 그는 보수적이지만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죽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경희와 요셉의 서사를 읽으며, 선자의 삶 못지 않게 경희의 삶도 풍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 삶은 하찮았어요." 이삭이 고통과 피곤이 가득한 선자의 눈을 읽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자신을 기다려줘서, 가족을 돌봐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선자에게 알려야했다. 자신이 식구를 부양하지 못할 때 선자가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낯을 들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남편도 없고 전쟁으로 물가까지 폭등했으니 돈이 빠듯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와서 당신 삶이 힘들어졌어요."

선자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이삭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어예.' 이 말 대신에 선자는 말했다. "어서 나으셔야지예." 선자는 더 두꺼운 이불을 이삭에세 덮어주었다. 이삭은 몸이 펄펄 끓는데도 오들오들 떨었다.


선자에게는 두 남자가 있다. 이삭은 속이 깊었지만 마른 갈대 같았고 한수는 비겁했지만 손해보는 법이 없었다. 이삭, 성경에서 이삭은 하느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바쳐졌다가 살아난 인물로 유대인과 예수의 조상이 된다. (곧 <파친코2>를 읽을 예정이며 각각 선자와 이삭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생각났던 부분이다.) 이삭이 죽을 뻔했을 때 선자와 선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갈 기회를 다시 한 번 얻었다. 이는 이삭이 선자의 구원자로 살아가야할 운명임을 내비치며 선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삭의 구원자였음을 보여준다.

나는 선자가 이삭과 영원한 이별이 가까워질 때가 제일 슬펐다. 이삭이 없었다면 선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아쉬운 소리만 하고 살았을 터였다. 속 깊은 이삭은 한수의 아들이었던 노아를 거두어 그가 이삭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 한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이삭은 진심으로 노아를 사랑했고 아꼈다. 그리고 이삭의 소생인 핏덩이였던 모자수를 두고 가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파친코1>의 마지막 부분부터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파친코2>를 구매했다.

<파친코>는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일전에 애플tv로 드라마화 되었을 때 기대에 찬 마음으로 시청했다가 다소 실망한 기억이 있다. 부족한 개연성, 조금은 가벼워보이는 오프닝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파친코>도 슬펐다. 다른 작품의 후기를 작성 할 때 '슬프다' 라는 심상은 우회해서 표현하곤 한다. 순수한 "슬픔"의 감정만 떠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친코>는 슬픔과 비통함이 너무 강렬해서 눈시울이 붉히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파친코>를 드라마로 먼저 접했기 때문에 <파친코 1>을 읽으며 자연스레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괜히 원작이 더 인기가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강인했다. 만약 <파친코>를 보게 될 사람이 있다면 시청자가 아닌 독자로서 먼저 선자를 만나볼 수 있기를 추천한다.

📚 본 서적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았습니다.



매체에서 종종 "아직도 저런 분위기의 가정이 있다고?" 싶은 으악스러운 장면을 마주한다. 배우자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존재하건만, 선자의 아버지는 달랐다. 몸이 불편했지만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성실했던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선자의 아버지에겐 성별도, 가족간 위계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을 사랑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란 선자에게 한수는 변수였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수에게 삶은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한수는 똑똑한 여자와 건강한 아들을 낳고 싶었다. 한수에게 선자는 한눈에 봐도 명민한 여자였다. 서로를 아껴주는 부모님 아래 성장한 선자는 한수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첩이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허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세상은 남편없이 아이를 가진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선자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믿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무덤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가 더 잘 느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면, 백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백이삭의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에 했다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등장한 이삭, 이삭의 등장으로 선자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삭은 선자 어머니의 하숙집에 머물며 아픈 몸을 뉘인다.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선자와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병세가 나아진다. 이삭은 선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와 결혼할 의사를 내비친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선자는 이삭과 혼인해 오사카로 향

"(...) 선자야. 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 각오하고 있는게 낫다. 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 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 뿐인

오사카로 향한 선자는 그곳에서 아주버님 요셉과 그녀의 아내 경희와 함께 살게 된다. 요셉과 경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요셉은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그에게 자신의 여자를 고생시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적부터 집안 일을 도와온 선자에게는 낯설었다. 후에 이삭이 형무소에 끌려가 징역생활을 했을 적에도 요셉은 경희의 바깥생활을 언짢아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랑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요셉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좋은" 남성으로 느껴졌다. 그는 보수적이지만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죽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경희와 요셉의 서사를 읽으며, 선자의 삶 못지 않게 경희의 삶도 풍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 삶은 하찮았어요." 이삭이 고통과 피곤이 가득한 선자의 눈을 읽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자신을 기다려줘서, 가족을 돌봐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선자에게 알려야했다. 자신이 식구를 부양하지 못할 때 선자가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낯을 들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남편도 없고 전쟁으로 물가까지 폭등했으니 돈이 빠듯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와서 당신 삶이 힘들어졌어요."

선자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이삭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어예.' 이 말 대신에 선자는 말했다. "어서 나으셔야지예." 선자는 더 두꺼운 이불을 이삭에세 덮어주었다. 이삭은 몸이 펄펄 끓는데도 오들

선자에게는 두 남자가 있다. 이삭은 속이 깊었지만 마른 갈대 같았고 한수는 비겁했지만 손해보는 법이 없었다. 이삭, 성경에서 이삭은 하느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바쳐졌다가 살아난 인물로 유대인과 예수의 조상이 된다. (곧 <파친코2>를 읽을 예정이며 각각 선자와 이삭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생각났던 부분이다.) 이삭이 죽을 뻔했을 때 선자와 선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갈 기회를 다시 한 번 얻었다. 이는 이삭이 선자의 구원자로 살아가야할 운명임을 내비치며 선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삭의 구원자였음을 보여준다.

나는 선자가 이삭과 영원한 이별이 가까워질 때가 제일 슬펐다. 이삭이 없었다면 선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아쉬운 소리만 하고 살았을 터였다. 속 깊은 이삭은 한수의 아들이었던 노아를 거두어 그가 이삭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 한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이삭은 진심으로 노아를 사랑했고 아꼈다. 그리고 이삭의 소생인 핏덩이였던 모자수를 두고 가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파친코1>의 마지막 부분부터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파친코2>를 구매했다.

<파친코>는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일전에 애플tv로 드라마화 되었을 때 기대에 찬 마음으로 시청했다가 다소 실망한 기억이 있다. 부족한 개연성, 조금은 가벼워보이는 오프닝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파친코>도 슬펐다. 다른 작품의 후기를 작성 할 때 '슬프다' 라는 심상은 우회해서 표현하곤 한다. 순수한 "슬픔"의 감정만 떠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친코>는 슬픔과 비통함이 너무 강렬해서 눈시울이 붉히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파친코>를 드라마로 먼저 접했기 때문에 <파친코 1>을 읽으며 자연스레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괜히 원작이 더 인기가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강인했다. 만약 <파친코>를 보게 될 사람이 있다면 시청자가 아닌 독자로서 먼저 선자를 만나볼 수 있기를 추천한다.

📚 본 서적은 출판사에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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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
레이죠 히로코 지음, 현승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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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

레이죠 히로코 지음, 현승희 옮김

해피북스투유 펴냄

'내가 퇴원을 하고 나면 손녀와 같이 살고 싶으니 집이랑 손녀를 잘 돌바줬으면 한다. 리리나는 부모를 여의어 마음이 아픈 아이니, 가능한 한 하고 싶다는 대로 해주고 밝게 지낼 수 있도록 애써줘. 리리나는 무척 똑똑하고 어르스러운 아이라 손이 많이 안 갈거야. 손녀를 돌보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생활비는 보내마. 너도 여러모로 일이 있겠지만, 아무쪼록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병약한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이런 이야기가 매우 세련되고 기품있는 문장으로 적혀있었다.

34쪽


미도리노는 <하이터치! 초-리얼 스쿨 라이프>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 작가다. 그는 애초에 문학작품도 별로 읽어본 적 없고, 글쓰기에도 취미가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신인상까지 받았다는 점은 그의 주변사람들도 여전히 미스테리다. 그런 미도리노는 먼 친척인 이에하라 할머니께 버찌관을 머물며 관리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는다. 가뜩이나 집필 활동을 위해 휴학까지 한 마당에, 제법 솔깃한 제안인걸?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이에하라 할머니의 손녀 리리나.

왠지 리리나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불쾌하고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미도리노는 시간이 흐를 수록 리리나를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자라서 어엿한 성인이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울컥하기도 한다. 미도리노는 평생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은 제멋대로에 철든 소녀 리리나를 지켜보며, 그 아이의 곁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어.

항상 잡고 있었지.

"우리 둘은 버찌야."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너무 잡았던 거야

처음 하는 진심 어린 사랑에 너무 흠뻑 빠졌던 거야.

손을 잡고, 잡고, 너무 잡은 나머지

버찌는 뭉개져 버렸어.

두 알의 열매는 서로 이어진 채 으깨져 버렸어.

기묘한 형태로 일그러지고 새빨간 과즙을 뿌리면서.

8쪽

<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는 한 청년 미도리노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잊어버린, 동시에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가 있다. 그가 버찌관에서 리리나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억의 파편 속 미도리노가 묻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도리노는 상실의 아픔이 깊어 상실 그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무의식에 남아있는 잊어버려서는 안 되었던, 소중한 존재가 그를 버찌관으로 이끈다.



벚꽃은 4월 초순부터 약 2주간 잠깐 피어있다. 간혹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면 더 일찍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사라지는 동안에도 흐드러지는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렇게 벚꽃이 지면 버찌 열매가 열린다. 그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간의 아름다웠던 벚꽃의 절경을 기억하며 일년간의 안녕을 고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며 후에 따라오는 것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송이의 버찌였던 미도리노와 잃어버린 그 사람의 소중한 관계도 절경의 순간을 지난 뒤에야 맺어질 수 있었다. 이제는 버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벚꽃을 더 아쉬워할지언정, 버찌의 소중함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벚꽃을 기다리며 남아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도.

일본 문학의 우연과 우연이 만나 필연이 되는 인과관계를 좋아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꼭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빛나기 때문이다. <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는 주인공 미도리노가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상처받은 자신을 보듬어가는 과정을 한 편의 동화처럼 표현했다. 가벼운 첫 장과 달리 작품을 읽을 수록 조금은 무겁고 깊은 이야기로 흐르지만 예상치 못한 반전과 따뜻한 마무리가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상실의 시간이 흐른 뒤엔 회복이라는 가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누군가는 그 믿음으로 아픈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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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4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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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딸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 펴냄


영국 요조숙녀의 복장들이 하나 둘 바닥에 쌓임과 동시에 그녀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세상으로 가차없이 한 발 한 발 내딛게 되었다. 엘리사는 이제 앞으로 펼쳐질 역사에서자기가 주인공인 동시에 화자(話者)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 운명의 딸 1, 227쪽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은 이사벨 아옌데의 여성 3부작이다. 출간한 순서대로는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이고 줄거리 상 순서는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이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세피아빛 초상>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을 때 처음 접했다. 이후 <영혼의 집>은 메릴 스트립이 주연인 동명의 영화로 보았다. (영화 <영혼의 집>이 소설 <세피아빛 초상>과 설정이 약간 다른 부분이 존재했는데, 이는 <세피아빛 초상>이 <영혼의 집>보다 늦게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운명의 딸>을 완독했다.

<운명의 딸>을 읽고나서 느낌은 처음 <세피아빛 초상>을 읽었을 때와 비슷했다. <운명의 딸>은 주인공의 고난과 역경의 정도가 좀 더 다채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이 다른 점 이외에는. <운명의 딸>은 소머스가의 집 앞에 놓인 비누 바구니 안에서 한 여자아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로, 소머스 집안에 입양되어 부족함없이 자란다. 그러나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여긴 호아킨을 만나며 엘리사의 파란만장한 여정이 시작된다.



<운명의 딸>에는 자주적이고 명민한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엘리사 소머스의 어머니이자 고모인 로즈 소머스, 기막힌 사업 감각을 가진 파울리나 델 바예, 남다른 포용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조 등이 그렇다. 인물들마다 특징과 한계점이 뚜렷해 <운명의 딸>의 여성들을 정리해보았다.

1. 엘리사 소머스

위에 언급했듯 출생이 불명확하며 소머스가의 집 앞에 놓인 비누상자 안에서 발견되었다. 로즈 소머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단 하나뿐이라고 여긴 사랑, 호아킨을 만나며 소용돌이같은 운명에 휘말린다. 그를 찾으러 캘리포니아에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코르셋 등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생활하며 단 한 명, 타오치엔만이 엘리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 그녀는 다양한 인종, 문화를 겪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해진다.

2. 로즈 소머스

엘리사 소머스를 거두어 그녀를 딸처럼 키우고 있고 단 하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이다. 엘리사의 출생이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회의 한 여성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로즈 소머스 본인이 겪은 불행을 엘리사가 겪지 않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매 존 소머스의 수입으로도 먹고 살만하지만 본인이 집필한 연애소설로도 수입을 만든다.

3. 파울리나 델 바예

존 소머스 선장의 업무 파트너이자 매의 눈을 가진 타고난 사업가. 그녀 역시도 남편 펠리시아노와 결혼하기 위해 용감하게 몸을 던진 이력이 있다. 그 이력으로 추문에 휩싸이지만 델 바예 가문의 초콜릿 몇 항아리로 명예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펠리시아노의 사업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며 그의 사업을 확장시키고 부를 증식하는데 큰 공을 들인다.

4. 무시무시한 조

펜실베니아 출신의 뉴질랜드 여성으로 자주적인 여성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사랑에 목매지 않는 인물이다. 엘리사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합류하는 매춘 카라반의 주인이다. 겉으로는 흉악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약자를 지키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따뜻한 인물이다. 매춘 카라반을 운영하지만 항상 타인을 도와주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의 마담행위를 지적하지 않는다.


이사벨 아옌데의 문학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에로시티즘'을 특징으로 꼽는다. 특히 그녀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동양과 남미 특유의 신비사상, 운명론적 사상이 섞여 다채로운 풍미가 느껴진다. 아마 외교관이었던 의붓아버지를 따라 세상 곳곳을 겪은 이사벨 아옌데의 경험으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남미 문학은 북미, 유럽문학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켜켜히 얽힌 복선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견하는 단락 등이 그렇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을 완독한 후에는 잠깐씩 등장했던 복선들과 후에 일어날 폭풍같은 사건들을 엮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세피아빛 초상>에서도 그랬지만 <운명의 딸> 또한 동양에서 통용되는 가치와 미신이 자주 등장한다. 토마스 만과 같은 작가의 '마술적 신비주의' 작품을 읽다보면 종종 우리 정서에 금방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과 반해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사벨 아옌데 소설이 괜히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니었군.


<운명의 딸>의 "운명의 딸"은 비단 엘리사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에 부딪쳐 본인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든 여성이 "운명의 딸"이다.

+

https://www.bbc.com/korean/63056828




<운명의 딸>을 읽으며 최근 이란 '히잡 시위' 이슈가 떠올랐다. 이란의 여성들은 이슬람 혁명 전 자유로운 삶을 누려왔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여성의 지위와 인권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혼하려면 '처녀 증명서'가 필요한 것도 모자라 얼토당토치도 않은 이유로 수많은 여성이 사형당해, 현재 여성 사형 최다 집행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다. 특히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가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돌아 이란 내에 혁명의 불씨는 점점 강렬해지는 중이다. 보수적인 사회와 여성에게만 들이대는 엄격한 잣대를 극복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란의 여성들 또한 "운명의 딸"이다. 엘리사에게 그러했듯, 승리의 여신이 이란의 여성과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의 손을 들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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