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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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제 옮김

현대지성 펴냄


(...) 모든 친밀한 관계의 원천이자 아버지인 쿠피도는 어떻습니따? 정작 그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들어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듯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곤 하지만, 사실 인생을 즐겁게 만들고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랍니다.

66-67쪽


<우신예찬>, 미뤄둔 숙제같았던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미뤄둔 숙제라고 표현하기가 웃기지만, 좋아하지 않았던 윤리 선생님의 수업시간마다 <우신예찬>을 들으며 곧 죽어도 저 책만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읽을 기회가 생겼지만 기를 쓰고 피했던 이 책, <우신예찬>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다시 만난 <우신예찬>은 오히려 반갑기까지했다.

저자 에라스무스는 부모를 여의고 수도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하는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규칙과 관례를 지켜야할 수도원은 타락과 부패로 가득했다. 에라스무스 본인 또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한다. 당시 교회는 청빈한 삶을 지향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종교를 고착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돈과 명예를 추구해야했다. 그런 모순적인 배경과 인간에 대한 고찰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작품이 바로 <우신예찬>이다.


현자 = AI ?

(...)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모름지기 현자라면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 자체를 제거하고,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새로운 신을 '창조'해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감정이 결여된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을 현자라고 이름붙였습니다.

(...)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런 현자를 본다면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이 무서워하며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완벽한 현자란 인간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만일 투표를 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느 국가가 관리로 선출하겠으며, 어느 군대가 사령관으로 뽑겠습니까? 또한 어떤 여자가 그런 남편을 원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그를 손님으로 초대하겠으며, 어떤 노예가 그를 주인으로 모시려 하겠습니까? 그보다는 누구든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 중에서한 명을 선출해 자신들을 다스릴 자로 세우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어리석기에 어리석은 자들을 다룰 줄 알고,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 자기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을 기쁘게 해불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 30장 현자는 사람이 아니다 中

우신(愚神)이라 해서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음'을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 철학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학자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될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명목만 있는 스토아 철학을 전면으로 비판해 '어리석음' 또한 인간이 갖추고 있어야할 결함이자 덕목으로 지적하고 있다. 에라스무스가 정말 직관적이라고 느끼는 부분 중 하나는 스토아 학자가 주장한 '현자'의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대리석에 가깝다고 발언한 부분이다. 스토아 학자들이 원했던 현자는 현시대 AI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축적된 데이터와 다양한 변수들과 상호작용 하면서 예외성을 배제한, 그런 존재 말이다.

<우신예찬>의 30장 [현자는 사람이 아니다]를 읽고 어느 인간이 AI가 인간을 통치할 수 있도록 독려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재 스토아 학자들이 훌륭한 현자의 표본으로 원했던 존재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임에도 아무도 그를 현자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감정이 만들어내는 부스러기에 번뇌를 느끼는 사람들은 AI의 삶을 부러워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AI'가 된다는 것, 즉 <우신예찬>에서 언급했듯 '현자'를 추앙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현실성없는 우상에 가깝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다.


어리석음으로 하여금 온전해지는 삶?

(...)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들어갈수록 행복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신의 신체 기관을 적절히 사용하려 하지 않는 상태란 의심할 여지 없이 미친 것이고 광기이며,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그토록 갈망하는 천국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영혼이 더욱 힘이 세져 육체를 집어삼키고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 이 세상에서살아갈 때부터 천국에서일어날 변화에 대비해 육체를 정화하고 약화시켰왔기 때문에 그런 일을 쉽게 해낼 것입니다.

(...) 기독교인이 되어 삶이 변해도 우신인 나의 영역은 제거되지 않고 도리어 완전해집니다. 이런 삶의 변화를 아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일종의 광기 비슷한 것을 겪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거나 인간의 관습에 어긋난 말을 하고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가 하면 표정이 수시로 바뀝니다.

(...) 그렇게 광기에 빠져있는 동안 자신이 가장 행복했다는 것만 압니다. 그래서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한탄하며 그런 광기 가운데서 영원히 살아가게 되기만을 소원합니다. 미래의 행복을 살짝 맛보기만 해도 이렇습니다.

- 67장 기독교인이 받을 최고의 상은 광기다 中

르네상스 시대에 금서로 지정된 <우신예찬>의 '우신'의 연장선에 그들이 믿었던 '신'이 존재하고 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가 있었고, 지금은 잘 참석하지 않지만 종종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종교인 분들도 계시기에 일반화하기엔 어렵지만, 대부분의 이론은 현생은 죽음 뒤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 정도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현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제2의 삶이 완전히 갈리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신은 자애로우며, 온전히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삶보다 영혼이 떠난 뒤를 약속하며 절제하고, 순종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니. 에라스무스가 언급한 "제정신"은 "현실감각"이 아닐까 싶었다. 신의 요구대로라면 삶의 제한이 많아진다.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화를 밝혀서는 안 되고, 교리를 어길 수도 있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신은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어리석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리석은 자들만이 천국의 단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나도 모르게 비소가 지어졌다.


<우신예찬>이 딱딱하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지금도 통용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웠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이라는 존재 외에도 철학자, 수도사, 교황 등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이들 모두를 아주 시원하게 비틀고, 품격있게 꼬집어 비판했다. 에라스무스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을 시절, <우신예찬>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신에 빗댄 세상 이야기 정도로 읽혔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 대부분이 직접적인 단어는 피하며 은유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신예찬>이 요지경인 세상을 비꼰 작품의 대표격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읽으니, 에라스무스의 표현들이 예술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역시, 고전은 언제나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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