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4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운명의 딸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 펴냄


영국 요조숙녀의 복장들이 하나 둘 바닥에 쌓임과 동시에 그녀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으며,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세상으로 가차없이 한 발 한 발 내딛게 되었다. 엘리사는 이제 앞으로 펼쳐질 역사에서자기가 주인공인 동시에 화자(話者)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 운명의 딸 1, 227쪽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은 이사벨 아옌데의 여성 3부작이다. 출간한 순서대로는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이고 줄거리 상 순서는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이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세피아빛 초상>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을 때 처음 접했다. 이후 <영혼의 집>은 메릴 스트립이 주연인 동명의 영화로 보았다. (영화 <영혼의 집>이 소설 <세피아빛 초상>과 설정이 약간 다른 부분이 존재했는데, 이는 <세피아빛 초상>이 <영혼의 집>보다 늦게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운명의 딸>을 완독했다.

<운명의 딸>을 읽고나서 느낌은 처음 <세피아빛 초상>을 읽었을 때와 비슷했다. <운명의 딸>은 주인공의 고난과 역경의 정도가 좀 더 다채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이 다른 점 이외에는. <운명의 딸>은 소머스가의 집 앞에 놓인 비누 바구니 안에서 한 여자아이가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로, 소머스 집안에 입양되어 부족함없이 자란다. 그러나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여긴 호아킨을 만나며 엘리사의 파란만장한 여정이 시작된다.



<운명의 딸>에는 자주적이고 명민한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엘리사 소머스의 어머니이자 고모인 로즈 소머스, 기막힌 사업 감각을 가진 파울리나 델 바예, 남다른 포용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조 등이 그렇다. 인물들마다 특징과 한계점이 뚜렷해 <운명의 딸>의 여성들을 정리해보았다.

1. 엘리사 소머스

위에 언급했듯 출생이 불명확하며 소머스가의 집 앞에 놓인 비누상자 안에서 발견되었다. 로즈 소머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단 하나뿐이라고 여긴 사랑, 호아킨을 만나며 소용돌이같은 운명에 휘말린다. 그를 찾으러 캘리포니아에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코르셋 등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생활하며 단 한 명, 타오치엔만이 엘리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 그녀는 다양한 인종, 문화를 겪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해진다.

2. 로즈 소머스

엘리사 소머스를 거두어 그녀를 딸처럼 키우고 있고 단 하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이다. 엘리사의 출생이 불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회의 한 여성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로즈 소머스 본인이 겪은 불행을 엘리사가 겪지 않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매 존 소머스의 수입으로도 먹고 살만하지만 본인이 집필한 연애소설로도 수입을 만든다.

3. 파울리나 델 바예

존 소머스 선장의 업무 파트너이자 매의 눈을 가진 타고난 사업가. 그녀 역시도 남편 펠리시아노와 결혼하기 위해 용감하게 몸을 던진 이력이 있다. 그 이력으로 추문에 휩싸이지만 델 바예 가문의 초콜릿 몇 항아리로 명예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펠리시아노의 사업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며 그의 사업을 확장시키고 부를 증식하는데 큰 공을 들인다.

4. 무시무시한 조

펜실베니아 출신의 뉴질랜드 여성으로 자주적인 여성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사랑에 목매지 않는 인물이다. 엘리사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합류하는 매춘 카라반의 주인이다. 겉으로는 흉악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약자를 지키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따뜻한 인물이다. 매춘 카라반을 운영하지만 항상 타인을 도와주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의 마담행위를 지적하지 않는다.


이사벨 아옌데의 문학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에로시티즘'을 특징으로 꼽는다. 특히 그녀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동양과 남미 특유의 신비사상, 운명론적 사상이 섞여 다채로운 풍미가 느껴진다. 아마 외교관이었던 의붓아버지를 따라 세상 곳곳을 겪은 이사벨 아옌데의 경험으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남미 문학은 북미, 유럽문학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켜켜히 얽힌 복선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견하는 단락 등이 그렇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을 완독한 후에는 잠깐씩 등장했던 복선들과 후에 일어날 폭풍같은 사건들을 엮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세피아빛 초상>에서도 그랬지만 <운명의 딸> 또한 동양에서 통용되는 가치와 미신이 자주 등장한다. 토마스 만과 같은 작가의 '마술적 신비주의' 작품을 읽다보면 종종 우리 정서에 금방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과 반해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사벨 아옌데 소설이 괜히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니었군.


<운명의 딸>의 "운명의 딸"은 비단 엘리사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에 부딪쳐 본인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모든 여성이 "운명의 딸"이다.

+

https://www.bbc.com/korean/63056828




<운명의 딸>을 읽으며 최근 이란 '히잡 시위' 이슈가 떠올랐다. 이란의 여성들은 이슬람 혁명 전 자유로운 삶을 누려왔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여성의 지위와 인권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혼하려면 '처녀 증명서'가 필요한 것도 모자라 얼토당토치도 않은 이유로 수많은 여성이 사형당해, 현재 여성 사형 최다 집행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다. 특히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마흐사 아미니가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돌아 이란 내에 혁명의 불씨는 점점 강렬해지는 중이다. 보수적인 사회와 여성에게만 들이대는 엄격한 잣대를 극복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란의 여성들 또한 "운명의 딸"이다. 엘리사에게 그러했듯, 승리의 여신이 이란의 여성과 자유를 갈망하는 목소리의 손을 들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