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
레이죠 히로코 지음, 현승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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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

레이죠 히로코 지음, 현승희 옮김

해피북스투유 펴냄

'내가 퇴원을 하고 나면 손녀와 같이 살고 싶으니 집이랑 손녀를 잘 돌바줬으면 한다. 리리나는 부모를 여의어 마음이 아픈 아이니, 가능한 한 하고 싶다는 대로 해주고 밝게 지낼 수 있도록 애써줘. 리리나는 무척 똑똑하고 어르스러운 아이라 손이 많이 안 갈거야. 손녀를 돌보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생활비는 보내마. 너도 여러모로 일이 있겠지만, 아무쪼록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병약한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이런 이야기가 매우 세련되고 기품있는 문장으로 적혀있었다.

34쪽


미도리노는 <하이터치! 초-리얼 스쿨 라이프>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 작가다. 그는 애초에 문학작품도 별로 읽어본 적 없고, 글쓰기에도 취미가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신인상까지 받았다는 점은 그의 주변사람들도 여전히 미스테리다. 그런 미도리노는 먼 친척인 이에하라 할머니께 버찌관을 머물며 관리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는다. 가뜩이나 집필 활동을 위해 휴학까지 한 마당에, 제법 솔깃한 제안인걸?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갑작스레 등장한 이에하라 할머니의 손녀 리리나.

왠지 리리나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불쾌하고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미도리노는 시간이 흐를 수록 리리나를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자라서 어엿한 성인이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울컥하기도 한다. 미도리노는 평생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은 제멋대로에 철든 소녀 리리나를 지켜보며, 그 아이의 곁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어.

항상 잡고 있었지.

"우리 둘은 버찌야."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너무 잡았던 거야

처음 하는 진심 어린 사랑에 너무 흠뻑 빠졌던 거야.

손을 잡고, 잡고, 너무 잡은 나머지

버찌는 뭉개져 버렸어.

두 알의 열매는 서로 이어진 채 으깨져 버렸어.

기묘한 형태로 일그러지고 새빨간 과즙을 뿌리면서.

8쪽

<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는 한 청년 미도리노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잊어버린, 동시에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가 있다. 그가 버찌관에서 리리나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억의 파편 속 미도리노가 묻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도리노는 상실의 아픔이 깊어 상실 그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무의식에 남아있는 잊어버려서는 안 되었던, 소중한 존재가 그를 버찌관으로 이끈다.



벚꽃은 4월 초순부터 약 2주간 잠깐 피어있다. 간혹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면 더 일찍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사라지는 동안에도 흐드러지는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렇게 벚꽃이 지면 버찌 열매가 열린다. 그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순간의 아름다웠던 벚꽃의 절경을 기억하며 일년간의 안녕을 고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며 후에 따라오는 것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송이의 버찌였던 미도리노와 잃어버린 그 사람의 소중한 관계도 절경의 순간을 지난 뒤에야 맺어질 수 있었다. 이제는 버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벚꽃을 더 아쉬워할지언정, 버찌의 소중함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벚꽃을 기다리며 남아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도.

일본 문학의 우연과 우연이 만나 필연이 되는 인과관계를 좋아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꼭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여정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빛나기 때문이다. <손을 잡은 채, 버찌관에서>는 주인공 미도리노가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상처받은 자신을 보듬어가는 과정을 한 편의 동화처럼 표현했다. 가벼운 첫 장과 달리 작품을 읽을 수록 조금은 무겁고 깊은 이야기로 흐르지만 예상치 못한 반전과 따뜻한 마무리가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상실의 시간이 흐른 뒤엔 회복이라는 가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 누군가는 그 믿음으로 아픈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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