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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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인플루엔셜 펴냄


소설 <파친코 1>은 1부 <고향 1910-1933>과 2부 <모국 1939-1963>로 구성되어있다. 영도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행하게 살고 있는 선자, 그녀는 당차고 야무진 조선 소녀다. 1910년은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합병된 해로, 작은 이야기에도 예민해지던 시기와 동시에 여성의 삶이 지금보다 폐쇄적이었던 사회의 시대였다. 선자의 부모님은 작은 하숙집을 운영하며 살림을 일구고 계신다. 선자는 곧 시집을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런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등장하며 운명의 파도는 선자를 집어삼킨다.

선자가 어리석었다. 왜 한수 정도의 나이와 지위를 가진 남자에게 아내와 자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한수가 일자무식인 시골 처녀와 혼인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참으로 얼토당토않았다. 부유한 남자는 아내와 첩을 뒀고, 때로는 본처와 첩이 같은 집에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선자는 한수의 첩이 될 수 없었다.

불구였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하숙집 손님들이 밥을 먹고 나면 세 식구가 밥상 하나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여자들보다 먼저 먹는 법도 없었다. 밥을 먹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 그릇에 아버지랑 같은 양의 고기와 생선이 놓여있는지 확인했다.

여름에는 하루 종일 고기잡이를 하고 나서 또 수박밭을 돌보았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이어서였다.

겨울마다 새로 튼 솜을 구해와서 식구들의 겉옷에 넣었꼬 솜이 부족하면 본인 옷에는 새 속을 넣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우겼다.


매체에서 종종 "아직도 저런 분위기의 가정이 있다고?" 싶은 으악스러운 장면을 마주한다. 배우자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존재하건만, 선자의 아버지는 달랐다. 몸이 불편했지만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성실했던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선자의 아버지에겐 성별도, 가족간 위계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을 사랑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란 선자에게 한수는 변수였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수에게 삶은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한수는 똑똑한 여자와 건강한 아들을 낳고 싶었다. 한수에게 선자는 한눈에 봐도 명민한 여자였다. 서로를 아껴주는 부모님 아래 성장한 선자는 한수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첩이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허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세상은 남편없이 아이를 가진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선자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믿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무덤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가 더 잘 느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면, 백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백이삭의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에 했다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등장한 이삭, 이삭의 등장으로 선자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삭은 선자 어머니의 하숙집에 머물며 아픈 몸을 뉘인다.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선자와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병세가 나아진다. 이삭은 선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와 결혼할 의사를 내비친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선자는 이삭과 혼인해 오사카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 선자야. 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 각오하고 있는게 낫다. 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 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 뿐인 기라."


오사카로 향한 선자는 그곳에서 아주버님 요셉과 그녀의 아내 경희와 함께 살게 된다. 요셉과 경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요셉은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그에게 자신의 여자를 고생시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적부터 집안 일을 도와온 선자에게는 낯설었다. 후에 이삭이 형무소에 끌려가 징역생활을 했을 적에도 요셉은 경희의 바깥생활을 언짢아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랑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요셉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좋은" 남성으로 느껴졌다. 그는 보수적이지만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죽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경희와 요셉의 서사를 읽으며, 선자의 삶 못지 않게 경희의 삶도 풍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 삶은 하찮았어요." 이삭이 고통과 피곤이 가득한 선자의 눈을 읽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자신을 기다려줘서, 가족을 돌봐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선자에게 알려야했다. 자신이 식구를 부양하지 못할 때 선자가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낯을 들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남편도 없고 전쟁으로 물가까지 폭등했으니 돈이 빠듯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와서 당신 삶이 힘들어졌어요."

선자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이삭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어예.' 이 말 대신에 선자는 말했다. "어서 나으셔야지예." 선자는 더 두꺼운 이불을 이삭에세 덮어주었다. 이삭은 몸이 펄펄 끓는데도 오들오들 떨었다.


선자에게는 두 남자가 있다. 이삭은 속이 깊었지만 마른 갈대 같았고 한수는 비겁했지만 손해보는 법이 없었다. 이삭, 성경에서 이삭은 하느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바쳐졌다가 살아난 인물로 유대인과 예수의 조상이 된다. (곧 <파친코2>를 읽을 예정이며 각각 선자와 이삭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생각났던 부분이다.) 이삭이 죽을 뻔했을 때 선자와 선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갈 기회를 다시 한 번 얻었다. 이는 이삭이 선자의 구원자로 살아가야할 운명임을 내비치며 선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삭의 구원자였음을 보여준다.

나는 선자가 이삭과 영원한 이별이 가까워질 때가 제일 슬펐다. 이삭이 없었다면 선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아쉬운 소리만 하고 살았을 터였다. 속 깊은 이삭은 한수의 아들이었던 노아를 거두어 그가 이삭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 한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이삭은 진심으로 노아를 사랑했고 아꼈다. 그리고 이삭의 소생인 핏덩이였던 모자수를 두고 가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파친코1>의 마지막 부분부터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파친코2>를 구매했다.

<파친코>는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일전에 애플tv로 드라마화 되었을 때 기대에 찬 마음으로 시청했다가 다소 실망한 기억이 있다. 부족한 개연성, 조금은 가벼워보이는 오프닝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파친코>도 슬펐다. 다른 작품의 후기를 작성 할 때 '슬프다' 라는 심상은 우회해서 표현하곤 한다. 순수한 "슬픔"의 감정만 떠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친코>는 슬픔과 비통함이 너무 강렬해서 눈시울이 붉히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파친코>를 드라마로 먼저 접했기 때문에 <파친코 1>을 읽으며 자연스레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괜히 원작이 더 인기가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강인했다. 만약 <파친코>를 보게 될 사람이 있다면 시청자가 아닌 독자로서 먼저 선자를 만나볼 수 있기를 추천한다.

📚 본 서적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았습니다.



매체에서 종종 "아직도 저런 분위기의 가정이 있다고?" 싶은 으악스러운 장면을 마주한다. 배우자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존재하건만, 선자의 아버지는 달랐다. 몸이 불편했지만 그 누구보다 온화하고 성실했던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선자의 아버지에겐 성별도, 가족간 위계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을 사랑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란 선자에게 한수는 변수였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수에게 삶은 치열한 생존의 연속이었다. 한수는 똑똑한 여자와 건강한 아들을 낳고 싶었다. 한수에게 선자는 한눈에 봐도 명민한 여자였다. 서로를 아껴주는 부모님 아래 성장한 선자는 한수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첩이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허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다. 세상은 남편없이 아이를 가진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선자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는 영혼이 존재했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았지만 선자는 믿었다. 선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제사를 지내러 아버지 무덤에 가면 아버지의 존재가 더 잘 느껴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세상에 신들과 죽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면, 백이삭의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백이삭의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친절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 되에 했다면 더욱 그랬다.

그리고 등장한 이삭, 이삭의 등장으로 선자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이삭은 선자 어머니의 하숙집에 머물며 아픈 몸을 뉘인다.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선자와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병세가 나아진다. 이삭은 선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와 결혼할 의사를 내비친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선자는 이삭과 혼인해 오사카로 향

"(...) 선자야. 아낙네 삶이라는 게 끝없이 일하고 고생하는 기다.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온다꼬. 각오하고 있는게 낫다. 이제 니도 여자가 된다 아이가. 그러니까 이 말을 해야겠다. 여인네가 잘 살고 못 살고는 혼례 올리는 사내한테 달려 있다.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 뿐인

오사카로 향한 선자는 그곳에서 아주버님 요셉과 그녀의 아내 경희와 함께 살게 된다. 요셉과 경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요셉은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그에게 자신의 여자를 고생시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릴적부터 집안 일을 도와온 선자에게는 낯설었다. 후에 이삭이 형무소에 끌려가 징역생활을 했을 적에도 요셉은 경희의 바깥생활을 언짢아했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랑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요셉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좋은" 남성으로 느껴졌다. 그는 보수적이지만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 죽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경희와 요셉의 서사를 읽으며, 선자의 삶 못지 않게 경희의 삶도 풍파가 많다고 생각했다.


"내 삶은 하찮았어요." 이삭이 고통과 피곤이 가득한 선자의 눈을 읽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자신을 기다려줘서, 가족을 돌봐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선자에게 알려야했다. 자신이 식구를 부양하지 못할 때 선자가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낯을 들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남편도 없고 전쟁으로 물가까지 폭등했으니 돈이 빠듯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 "내가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와서 당신 삶이 힘들어졌어요."

선자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이삭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어예.' 이 말 대신에 선자는 말했다. "어서 나으셔야지예." 선자는 더 두꺼운 이불을 이삭에세 덮어주었다. 이삭은 몸이 펄펄 끓는데도 오들

선자에게는 두 남자가 있다. 이삭은 속이 깊었지만 마른 갈대 같았고 한수는 비겁했지만 손해보는 법이 없었다. 이삭, 성경에서 이삭은 하느님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바쳐졌다가 살아난 인물로 유대인과 예수의 조상이 된다. (곧 <파친코2>를 읽을 예정이며 각각 선자와 이삭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생각났던 부분이다.) 이삭이 죽을 뻔했을 때 선자와 선자 어머니의 도움으로 살아갈 기회를 다시 한 번 얻었다. 이는 이삭이 선자의 구원자로 살아가야할 운명임을 내비치며 선자 또한 마찬가지로 이삭의 구원자였음을 보여준다.

나는 선자가 이삭과 영원한 이별이 가까워질 때가 제일 슬펐다. 이삭이 없었다면 선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아쉬운 소리만 하고 살았을 터였다. 속 깊은 이삭은 한수의 아들이었던 노아를 거두어 그가 이삭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단 한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이삭은 진심으로 노아를 사랑했고 아꼈다. 그리고 이삭의 소생인 핏덩이였던 모자수를 두고 가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파친코1>의 마지막 부분부터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파친코2>를 구매했다.

<파친코>는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일전에 애플tv로 드라마화 되었을 때 기대에 찬 마음으로 시청했다가 다소 실망한 기억이 있다. 부족한 개연성, 조금은 가벼워보이는 오프닝이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파친코>도 슬펐다. 다른 작품의 후기를 작성 할 때 '슬프다' 라는 심상은 우회해서 표현하곤 한다. 순수한 "슬픔"의 감정만 떠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친코>는 슬픔과 비통함이 너무 강렬해서 눈시울이 붉히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파친코>를 드라마로 먼저 접했기 때문에 <파친코 1>을 읽으며 자연스레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괜히 원작이 더 인기가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는 놀랍도록 치밀하고 강인했다. 만약 <파친코>를 보게 될 사람이 있다면 시청자가 아닌 독자로서 먼저 선자를 만나볼 수 있기를 추천한다.

📚 본 서적은 출판사에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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