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왜 예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하나요?


정창일: 우리에겐 공자님이나 불교의 가르침이 가까이 있는데, 구지 지리적으로도 멀고 우리와 인종과 문화가 다른 예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강훈: 아주 중요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복합적 질문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4대 성현, 즉,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이 네 분이 다 삶에 유익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 분들 중에서 왜 예수만 특별하다고 하는가?”둘째로, “우리와 유대인의/예수의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우리의/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I.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신앙은 팔레스틴이라는 작고 특수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앙입니다. 어떻게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그들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하나님의 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문화의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뭐죠? 서양식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 계신 여러분의 느낌이 어때요? 편안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고유의 복장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기르고, 한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그런 복장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느낌이 어떨 것 같습니까? 몹시 불편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구지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구한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복장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문화가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던졌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왜 내가 머리를 잘라야 하는지”, “왜 서양식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묻지 않고, 그냥 당연한 듯이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의 옷을 입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문화/종교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종교가 어디에서 발생했건, 어느 민족/인종에 의해 시작되었건 간에, 다른 문화권/민족에게로 이동해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 한국, 일본에서 더 융성해졌습니다. 사실 인도에선 불교인들이 minority입니다. 오히려 힌두교인들이 majority를 차지하죠. 또 그리스도교도 팔레스틴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전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더 융성해졌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문화/종교는 바람처럼 어디로든지 옮겨 다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아무도 문화/종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양식으로 머리를 잘랐다” 해서, “서양식으로 옷을 입었다” 해서, 문화적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은 그들이 했지만, 이 문화는 이미 우리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양 사람들이 우리더러, “야, 왜 너희들 허락도 없이, 우리처럼 머리 자르고 옷 입었어?”하고 묻는다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왜죠? 문화/종교에 관해서는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교나 유교도, 근원적으로 따지면 우리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석가는 인도 분이고요, 공자는 중국 분입니다. 중국 사람은 “한(漢)족”이고 우리는 “몽고족”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생긴 것도 한참 다르죠. 오늘날 불교와 유교를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작은 남의 나라에서 되었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정착이 되었으면, 이미 우리 것이 된 것이죠. 자장면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보다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습니다. 시작은 중국에서 되었지만, 이젠 엄연히 한국음식이 되어버렸습니다. 피자는 이태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젠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구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틴 땅에서 유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걸 가지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는 우리 거다”하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구요, 우리도 “그리스도교는 걔네들 거다”하고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미 우리에게 들어와서 정착이 되었으면, 그건 이미 우리 것입니다.


II.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님의 가르침도 다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불교 경전을 읽어보면, 복음서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중 아무거나 믿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예수를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계시”가 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인간이 신(神)에 관해 다 알 수 있을까요? 다 알 수 있다면, 신(神)을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냥 연구하고 이해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종교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있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알려면,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알려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려주시는 사건”을 가리켜서, 우리는 “계시”라 부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자연계시. 제가 어렸을 때, '지구는 둥글다'하는 자연과학적 진리에 관해 배운 바 있습니다. '삼십 몇 도의 기울기를 가지고서 지구가 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서 있는 곳이 위쪽 (↑)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만약 제가 서 있는 곳이 아래쪽 (↓)에 가 있으면 어쩌나?'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죠. 지구의 당기는 힘 때문에, 제가 아래쪽에 가 있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죠. 이걸 알기 전까지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 이것이 아이직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이렇게 각자 책상 주위에 빙 둘러앉지 못하고, 우리 열 명이 달라붙어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우리가 산이나 나무나 건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코에 달라붙는다고 상상해보세요! 당기는 힘이 너무 커도 좋지 않는 것이죠. 물체마다 서로 당기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은, 지구가 돌아도 우리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가 서로 마주 앉아도 달라붙지 않을 만큼, 적절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야, 누가 이 우주를 이처럼 오묘하게 만들었을까? ‘우연’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정밀해! 아마 이 우주는 어떤 지혜로운 분이 만드시고 그 뒤에서 조종하고 계실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읽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실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자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자연 속에 두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에서는 자연계시라 부릅니다.


2. 특수계시. 사람들 가운데는 자연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과 만난 특별한 경험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서는 이런 특별한 하나님 경험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여기서 “특별하다”는 의미는, “나/우리에겐 경험되었지만 다른 사람/그룹에겐 경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자연계시의 경우, 사람들이,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우주의 오묘한 질서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신론자건 유신론자건, 비그리스도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간에, 모두 한 가지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이 우주에는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질서”는 보편적인 것이며, 누구에게나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특수계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험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험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그냥 구름만 보았습니다. 두 그룹의 경험은 상반되지만, 각자에게는 진실된 경험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경험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특수한 하나님 경험들을 가리켜서, “특수계시”라고 합니다. 성서에는 이런 특수한 하나님 경험들, 특수한 계시들로 꽉 차 있습니다.


3. 중요성 (Importance)의 개념.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특별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는데요, 그러면 그 계시들이 똑같이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것은 더 중요하고 다른 것은 덜 중요하겠습니까? 모든 계시가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들 중에, 예수의 계시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계시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K가 S와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크게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K는 "S 그 친구 믿을 사람 못되는구먼!"하고 생각하며 다시는 상종을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전에 S가 베푼 사랑도 속임수로 생각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S가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친절을 베풀어 봅니다. 그러나 K는, '저거 다 가식이구먼!'하고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참 좋았다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도 좋을 거라고 그렇게 기대하며 살아왔는데...쓰라린 배신을 맛보고나니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배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니까, 과거의 좋았던 관계도 속임수로 보이고, 미래의 친절과 웃음도 가식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K는 S가 선물을 준 것, 비올 때 우산을 받쳐준 것, 생일을 기억해 준 것...이런 일들을 통해서, '아, S가 날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쓰라린 배신이 모든 해석을 온통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성서에는 수많은 계시들이 있는데. 이 계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계시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그려온 하나님 이해를 온통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힘이 무한한 분으로 이해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이 무한하신 분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계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그래서 그 계시로 다른 모든 계시들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교 말고도 여러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논리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보다 더 우수한 편입니다. 유교는 풍부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거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계시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예수의 계시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계시에 비추어서,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의 가르침을, 과학과 예술을, 다른 종교와 문화를, 성서의 여러 계시들과 우리 자신의 체험을 재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삼위일체란 말은 과연 맞는 것일까요.


전종규: 저는 교회의 여러 가지 면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 율법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척했던 생각 떠오릅니다. 현시대에도 삼위일체란 말을 믿으면 정통이고 믿지 않으면 이단일까요? 성경외의 말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성경보다 앞서 있으면 그 교리는 정당한가요?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 66권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습니다. 삼위일체란 말에 잡여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을 예로 들어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말씀만으로 삼위일체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자체를 재해석하여 사람의 생각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미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 말씀으로도 삼위일체를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고 천국 못가고 이단이 될 수 있을까요?


이강훈: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 중 가장 난해한 이슈에 대해 질문해 주셨군요. 이 문제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정통 (orthodox)과 이단 (heresy)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2세기에 시작되어 4-5세기에 활발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어떤 정형화 된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리”가 아닌] “고백” 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고백을 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유형은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그 이상한 고백들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적극적으로 선언하기보다는] “그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라고 방어적으로 (defensively) 해석을 내리게 된 것이 교리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단 (heresy)”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지칭할 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통 (orthodoxy)”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주류의 (mainline) 고백/사상과 다른 고백/사상을 가진 어떤 집단”을 가리킵니다.


2. 삼위일체 교리의 딜레마


내용적 딜레마


삼위일체 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셋이 하나다.” 이겁니다. 그러니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셋이 하나라면, 각각이 1/3이란 말이냐? 만약 각각이 1/3이 아닌 온전한 하나라면, 셋은 셋이 되어야 하질 않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통주의자들 (Orthodox Christians)은, “그래서 '셋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 (the mystery)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셋은 하나다.' 이건 분명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래 놓고, "그게 무슨 뜻이냐? 어떻게 가능하냐?"하고 물으니까, "그건 신비다"하고 모호한 답변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권위의 딜레마


“교리란 무엇이냐? 교리가 성서와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 것이냐? 아니면 성서보다는 하위의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교리의 등장과 더불어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다.”는 것이 정통 교회 (=카톨릭 교회)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 반발하는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발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을 최초로 이끈 루터는 세 가지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솔라 피데, 솔라 그라시아, 솔라 스크립뚜라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가 곧 그것입니다. 이 말을 한글로 옮기면,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성서로만"이 됩니다. 이 원칙에 입각해 보면, 종교개혁자들에겐, 어떤 교리나 신조도 성서보다는 하위의 권위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에 성서와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거나, 교리에 성서보다 더 상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개신교 신앙원리 (the Protestant principle of faith)에 위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삼위일체의 교리'를 성서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개신교 신앙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3. 교리의 중요성과 위험성


중요성


미국에선 지도 한 장만 가지면,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생전 가보지도 않은 지역의 주소를 주고 “찾아와 보라”고 해도, 지도만 가지고 있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지도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는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습니다. 영혼의 순례에 안내를 제공하는 길잡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교리가 없이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난다는 건, 우리를 곁길로 새게 하거나 엉뚱한 곳에서 맴돌게 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위험성


몇 년 전에 미국에선 몇 명의 teenager들이 술을 먹고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 세워진 도로표지판을 재미로 망가뜨린 일이 있습니다. 몇 시간 후 그 곳을 지나던 두 차량이 충돌하여, 3명의 젊은이가 그 자리에서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teenager들은 각각 10년, 20년, 무기징역 등에 해당하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잘못된 교리는 얼마든지 수많은 영혼들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안내자로서 좋은 교리를 필요로 합니다.


4. 구체적인 것 (the concrete)과 추상적인 것 (the abstract)


성경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적어놓은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교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성서를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성서는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을 만난 구체적인 사건들이고, 교리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추상적 체계인 셈입니다.


한 어린이가 잔잔한 연못에 돌맹이를 하나 던졌습니다. 돌맹이가 연못 한 가운데 떨어지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돌맹이가 물에 떨어진 순간부터 1초 후, 2초 후, 3초 후...의 물결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릴 수 있습니다. 이때 파도가 이는 현상은 “구체적인 사건 (a concrete event)”이며, 그것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작성한 그래프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추상화 (an abstraction)”입니다. 이때 그래프는 옆에서 본 단면으로 표시될 수도 있고, 위에서 본 전면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은 각각 다른 모양을 보여주지만, 둘 다 파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다 거짓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추상화의 과정이 진실이라면, 그 추상화는 지어낸 것이나 가짜가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교리가 정말로 성서에 근거하고, 성서적 증언에 부합하다면, 그것은 지어낸 얘기도 가짜도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서의 증언들이 교리보다 더 앞선다는 주장은 철학적/물리학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것입니다.]


5. 삼위일체 교리는 과연 성서적인가?


성부, 성자, 성령은 분명 성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분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보니까, 서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자가 성령을 대적한다든지, 성령이 임의로 행동한다든지 하는 것이 성경에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성서적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진술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둘째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을 “성삼위 일체”라는 추상적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삼위일체보다 더 나은 추상적 표현을 찾아낸다면, 그리고 그 표현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고백--[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 [세 분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을 충족시키실 수 있다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표현 대신 새로운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도는 구체적 지형에 대한 추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도를 보고 “가짜다!” 그러지 않습니다. 지도가 우리의 삶에 유용하듯이, 삼위일체 교리 또한 우리의 영혼의 순례에 유익합니다. 삼위일체는 성서적 증언들의 추상화입니다. 이 말은, 성서에는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성서적 진술에 부합하는 추상적 표현입니다. 성서에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배격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성서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것만큼이나 위험스런 태도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표준이요, 교리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 좋은 길잡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I.      Introduction


        The aim of this paper is to discuss the relevance of revelation to morality in H. Richard Niebuhr.  At the first glance of this topic, some may ask, Why should we require to deal with revelation when we speak of morality?  Niebuhr's succinct answer is that revelation is "the foundation of a rational moral life," without which we become fools in our search for ethical life.1)  In this respect we must speak of morality with reference to revelation.  Here lies the importance of our topic.

        Our research for the relevance of revelation to morality in H. Richard Niebuhr concentrates on the two sections ("Revelation and the Moral Law" and "Human Value and the God of Revelation") of the last chapter of The Meaning of Revelation.  This investigation, however, needs to be dealt altogether with Niebuhr's other writings--such as "The Center of Value" and "Faith in Gods and in God" in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the first and the last chapter of Christ and Culture, "Value Theory and Theology" in The Nature of Religious Experience, and The Responsible Self--because his illustrations of our topic are sometimes well developed in those writings. 

        For this reason we are required to reconstruct Niebuhr's teaching on our topic partially, while largely following up with the stream of his logic flowing in the two important sections of The Meaning of Revelation.  In research of this topic, my stance is not a faultfinder but a learner.  Before examining the main issue, we need to sketch Niebuhr's idea of revelation briefly in order to investigate the relevance of revelation to morality.


II.      Preliminary Remarks


        Niebuhr accepts the conclusion of historical relativism that "all knowledge is conditioned by the standpoint of the knower" in the sense that any human understanding involves not only the spatio-temporal point of view but also human resources, such as languages, patterns, images, which are all under historical changes and limitations.2)  However, this does not lead Niebuhr to agnostic relativism because he believes that, in spite of historical conditioning and conditioned, we can and do know something objective, universal, absolute.3)  In a sense it is an act of faith to accept the reality of our experience as psychologically and historically conditioned.  For this reason Niebuhr points out "animal faith"  in natural and social sciences.4)  As for knowledge of God, Niebuhr calls for the radical faith as total commitment to God.  This informs that "neutrality and uncommittedness are great delusions where God and the gods of men are concerned."5)

        According to Niebuhr, we have two types of history: the external history of dead things and the internal history of living selves.  Simultaneously both pure and practical reasoning operate on the 'brute data' given in historical experience.  Our talk of revelation does not entail the rejection of the external views of ourselves because, just as sense-perception does not occur without sensational data, so the internal experience does not emerge without external embodiment.6)  However, each of perspectives concerns revelation from its peculiar perspective.  The immediate data of pure reasoning are the sensations of the mere body, while those of practical reasoning are 'affections of the responsive self' such as joys and sorrows, loves and hates, fears and hopes.  As far as ethics concerns the latter, it must seek the meaning of such immediate feelings.

        How can the moral self find the meaning of immediate feelings?  A typical answer may be that it is through reason that we can seek meaning behind our immediate feelings.  Niebuhr, However, replies that "the heart reasons with the aid of revelation."7)  He takes into consideration one more element, namely imagination as the section title "Imagination and Reason"8) insinuates. 

        For Niebuhr, imagination is a capacity to symbolize his experience by employing "concepts, images, patterns," without which "reason does not dispense."9)  While pure reasoning investigates the complexity of reality as such by using the impersonal, effectual, and descriptive patterns, practical reasoning deals with it by employing the personal, valuational, and dramatic images.  Problematic is not that both science and theology use imagination in terms of their interpretation of empirical data but that they employ false conceptions, images, and patterns.10)  Therefore, our moral theology requires adequate imagination for its right understanding of immediate feelings.

        What is an adequate imagination?  Niebuhr answers that it is revelation.  Through revelation moral selves can get to "a pattern of dramatic unity," which "brings rationality and wholeness into the confused joys and sorrows of personal existence ad allows us to discern order in the brawl of communal histories," rather than "the conceptual patterns of the observer's reason."11)  From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e can abstract 'dramatic images' which help us to illuminate and reconstruct our own beings and deeds in the remembered and anticipating present. 

        However, this rational value of revelation is not primary but instrumental in the sense that the illumination and reconstruction of our beings and actions are derived from the intrinsic value of revelation, not vice versa.  In this respect, the value of revelation cannot be determined apart from the revealer himself.  In other words, we cannot know personal and social selves here and now unless we are known by God.12)  As far as a self is known by another and so knows itself through another's eyes, the self is the one committed to a certain person. 

        Who is the person by whom we are known and so whom we come to know?  It is God the self-revealer as "our knower, our author, our judge and our only savior."13)  This character of revelation informs that "we find ourselves to be valued rather than valuing and that all our values are transvalued by the activity of a universal valuer."14)  In this respect, our valued character is the foundation of our valuing character.

        Nevertheless, since the meaning of revelation does not occur without our "responsive acts" to God as self-revelatory, "revelation...is realized in us only through the faith which is a personal act of commitment, of confidence and trust..."15)  Without response there happens no revelation in responsive selves, even though revelation always happens in nature.  In this respect, the meaning of revelation does require our response to God the source of being and the center of value, and we must think and speak of Christian ethics in conjunction with God the revealer by whom we are known and so whom we come to know.  Then, what relevance does revelation have to moral laws?  The answer to this question is given in the following chapter.


III.     Main Issue


        Traditionally, Christians have confessed "the content of the Gospel as the 'saving truth and moral discipline'" manifested in the Council of Trent, the Westerminster Confession, the Formula of Concord, even though there are more or less differences among those beliefs.16)  According to Niebuhr such creeds state that revelation informs that our understanding of God and our moral law are closely tied to God himself; but it does not explicate how they are interrelated.  In order to answer to this question Niebuhr begins his argument by his analysis of our memory:

We carry in our personal memory the impress of moral laws; in our personal memory no less there are the long traditions of what ought and ought not to be done.  As the latter tradition is embodied in laws, constitutions and institutions available to the external view, so the former doubtless has its physical counterpart in the structure, the neutral pattern of our organism.  In both cases the external view does not understand these laws as we do from within.17)

This passage denotes two points: first, that moral law for Christians is mediated by both communal monuments which objectively embody those meanings out of the past and living persons who critically appropriate this legacy in the present; second, that moral laws mediated by our personal and social memory have been formed in the complex of internal history.  These points affirm that it is erroneous to identify our moral law with our permanent imperatives because such identification is to confuse the true source with its ramification.  For this reason Niebuhr accepts positively the criticism of philosophers and sociologists, the criticism that moral law is derived from the spatio-temporal realm of existence and that moral law is the "literal, habitual and institutional embodiments."18)

        However, both of groups don't feel the necessity to refer to revelation in an account for the moral law.  Niebuhr briefly criticizes that the case of philosophers is "confusion of views of the universal with universal views" and that of sociologists is "the totalitarian tendency which inclines us to believe that our outlook yields not only truth but all the truth there is."19)  Niebuhr rejects the Kantian assertion that the moral law can be spoken and established without reference to revelation. He criticizes this assertion in two respects: our confessor-ship and our Christian context.

        At first, Kantian duty "does not represent the self-analysis of the Christian confessor," nor does Kantian God deduced from the imperative reflect "the relativity of our historical reason, of our interest in the maintenance of selves and of our wishfulness for the preservation and victory of this particular individual or social self."20)  In addition, Kantian assertion does not fit into the Christian context which concerns the will21) of God behind the moral law, recognizes the moral law as God's will, and sees the moral law as moving.22)  Based upon these general criticisms, Niebuhr makes further his criticism about the Kantian presupposition that the moral law can be understood and established without regard to revelation of God.

        First, he asserts that the true 'imperativeness' of the moral law is not derived from finite sources but from God the infinite.  His explanation is this: if what we ought to do is to achieve what we ought to be, it can be avoided by the question, "why we ought to be anything else than we are; if the moral law is the demand of reason, it can be evaded by indicating that even "the best reason of the best men" is under "our doubt of reason's power and of the goodness of our best reasoners"; if the moral law is defined as "the demand of our society," it can be avoided by getting out of our society; if it is understood "the decree of life," the law can be evaded by "voluntary or involuntary death."23) 

        All of these finite sources of the moral law cannot be its true imperativeness because they are all evasive and finite.  However, revelation informs that the true source of the moral law is nothing but God himself as far as the law is understood as God's demand upon us.  Hence, the imperative behind the law is the imperative of God the demander.

        Second, Niebuhr points out that "the moral law is changed, furthermore, by the revelation of God's self in that its evermore extensive and intensive application becomes necessary."24)  His explication is why the law is a changing thing: while the Kantian duty is confined to some human beings at least or to all human beings at best, God's revealed will is extensively applied to all creatures, human and non-human, any of which is not excluded from the whole nexus of moral relations to God; while the Kantian law observes the good in such a way that "we love those who love us or who share our principles and do no harm to our values," the demand of God is applied not only to our friends, the oppressed, victims, but intensively to our enemies, oppressors, victimizers.25) 

        As far as a moral law goes on toward its extensive and intensive application, the changeless succession of moralities is illusionary because God's demand is freshly commanded upon us and understood by us in every new moment.  For this reason, "when God becomes the will behind the moral law...a revolutionary transvaluation occurs because of it [revelation]".26)  This moving character of the moral law is the clue to its corruptible character which connotes that the moral law is always a corruptible thing tainted by false imaginations and interested mind. 

        How can we be saved from such corruption?  It is possible through our faith relationship to God the creator of all creatures.27)  When we have faith in God the creator, we don't need to have false imaginations which glorify our worth and defend our distinctiveness from others.  We don't need to fall into self-centeredness which seeks self-preservation amidst the fear of loss of our selves.28)

        Then, how can we come to such faith?  It is through revelation of God.  Revelation of God is not a disclosure of the moral law but of the law's sin.  Hence, it is our turning point from the imperative to "an indicative," from the law of love to "a free love of God and man."29)  Through revelation of God Christians can continue to re-organize their law and to transform their life.  For this reason, Niebuhr calls revelation of God as the "republication of the moral law."30)  This implies that, as far as we respond to the demand of God the original author in revelation, our moral law continues to be re-articulated freshly and our moral life continues to be re-shaped creatively without resort to self-defensiveness.  Therefore, revelation is the re-organizing principle of the moral law, as part of our understanding of God's will, and the transforming power of the moral life. 31)

        In appendix A, The Responsible Self, Niebuhr maintains that our confessional theology finds the re-organizing principle and transforming power in the revelation of God through Jesus Christ.  Such general principle and power image are not the purely conceptual but the symbolic principle and image because they are abstracted from Jesus Christ the person.32)  For this reason, Niebuhr calls Jesus Christ as "the symbolic form."33)

        Similar to Paul Tillich, Niebuhr understands one of functions of symbol as a reference to something transcendent beyond it.  Jesus Christ as the symbolic form points to the transcendent God beyond himself and draws us into the transcendent One before whom we are unique selves.  In our effort to appropriate the symbolic form we find ourselves in a new dimension or context.  The God whom Jesus Christ called 'my father' becomes our father and we become his children. Here our self-understanding including our moral law is reconstructed radically.  

        Such renewed understanding allows our ultimate trust and loyalty to move from something finite to God the infinite who is worthy of such complete commitment.  What was for Jesus Christ a response to God becomes for us as his followers a revelation of God.  Through mediation of Jesus Christ, we are reconciled to the One on whom we including the many are absolutely dependent.  This reconciliation makes us transform our moral life in every new moment.  As Jesus interpreted "all actions upon him as signs of the divine action...and so responds to them as to respond to divine action," so may we do so.34)  Therefore, we necessarily require revelation of God and confess that Jesus Christ as the symbolic form is the re-organizing principle for our morality, as part of our self-understanding of God's will, and the transforming power of our moral life.

        Here it can be asked, "Is there other way to knowledge of God and the establishment of moral law from it?"  Niebuhr answers 'yes.'  He does acknowledge our natural capacity to discern moral laws and establish moral principles without the aid of revelation in that "we know an act to be our duty before we know it to be the will of God" and that without such pre-knowledge our cognitive procedure can not proceed.35)  Then, is a natural knowledge of God sufficient enough that we can do discern moral laws and establish moral principles?  Is revelation unnecessary and illusionary?  Niebuhr answers 'no' in his confessional position.

        According to Niebuhr, when they deal with values and moral law, Kantian philosophers recognize a source of value in the sufficient cause and "a being who unites worthiness to exist with existence."36)  For them, God is demanded as the guarantor who will preserve all their values, existences, and goods.  Some social scientists contend that God is the projection of religious need, behind which lies "the fear of death, of loss of goods and the desire for self-maintenance, and the "divine law is the projection of social custom" based upon natural faiths.37)  Both of cases does not need to refer to "a source in special revelation."38)

        Against philosophers Niebuhr argues that our God is not a personless god, pure abstraction, hypothetical apparatus.  Such a god may meet our anticipation and permit "the static unity of established order."39)  Our God revealed in Jesus Christ is beyond all our expectations, relativizes all finite values including moral law, and empowers us to proceed toward the growing unity of moral life.  For this reason, Niebuhr maintains: "And so the oneness which the God of Jesus Christ demands in us is not the integration of our purposes and values but our integrity, singleness of mind and purity of heart."40)  Here Niebuhr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our faith relation to the living God in our self-understanding and moral life.  Truly, we cannot worship the dead god of philosophers but totally commit ourselves to the living God of Jesus Christ who created, sustains, redeems us.

        Against social scientists Niebuhr argues the value of deity in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According to Niebuhr, every human being is a theist because she/he needs that which makes life worth living.   Rejecting one god is accompanied by accepting another.  Hence, to exist as a human being is to have faith in gods, or a god, or God.  Polytheism and henotheism are frustrating and divisive because their answer to the inquiries of life's meaning always remains unanswered or partially answered, because their causes and their centers of value exclude other causes and other centers of value or contend with each other.  All gods are derived from something finite, so will perish someday.  God the One beyond the many alone is the ultimate cause and the ultimate center of value, does sustain our life worth living.

        Here some may ask to Niebuhr, how can you say that such a living God, such a transcendent God is not a hypothetical apparatus, the projection of human need?  Niebuhr answers that our living, transcendent God is neither hypothetical apparatus nor human projection because we find some image and pattern about such God in the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 life-death matter is beyond our control.41)  For this reason, faith is understood a personal commitment to "something...that has power or is power."42)  As far as that something has and is power, it requires us a total devotion to it more than a simple knowledge or an intellectual assent, although the former is closely related to the latter. 

        On the cross Jesus met God the enemy, the slayer, before whom all finite powers, such as existences, morality, values, are destroyed.  Some may think death as the ultimate power and distrust God in face of death.  However, Jesus trusted the ultimate power behind the power of death.43)  Unto death Jesus Christ trusted God the last power rather than overwhelmed by the fear of his ultimate destiny believing his everlasting faithfulness to all his creatures.  God kept his faithfulness to Jesus by "the raising of the temporal plane."  On the cross God is known the enemy, the ultimate power, the inscrutable One, while we are known sinners, unbelievers.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is the victory of universal trust over suspicion, of universal loyalty over disloyalty.  This victory is won whenever and wherever we are reconciled to God.  In this manner Jesus as revelation works as the reorganizing principle and transforming power of our morality, value, and life in our amidst to the end that we may respond to the One beyond the many as our friend.

        In this final context we find that the will of God revealed in Jesus Christ stands beyond our expectations, moral law and principle.  A god or gods may bestow us some integration of purposes and values, allow us to establish some universal moral law and principle, and guide us to the unity of moral life.  However, this is simply an instrumental good, namely the good-for-us.  The intrinsic goodness of God belongs to God himself.  God as powerful enough for his goodness and good enough for his power refuses to serve our all our expectations and morality which have been made from the good-for-us perspective.  Rather, he 'ministers' all our expectations, moral principle and law in a creatively transforming way.  

        Through the revelation in Jesus Christ the powerful and good God demands us "the sacrifice of all we would conserve and grants us gifts we had not dreaded of--forgiveness of our sins..., repentance and sorrow for our transgressions..., faith in him..., trust in his mercy."  This is what Niebuhr calls "the revolution of the religious life" through revelation.44)  Thus, it is evident that the true binding force of all beings and actions is derived from neither the self, nor the law, but the living God revealed in Jesus Christ.45) It is only when we see morality in light of the revelation of God in Jesus Christ that our human-centered ethics is reconstructed into God-centered ethics and our morality is empowered to proceed out of the foolish and sinful self-defenses toward its endless transformation.  Therefore, we become fools in our search for morality without conjunction with revelation as "the foundation of a rational moral life."46)


IV.     Conclusion


        Similar to traditional theologians, Niebuhr begins his teaching of revelation and morality with the Christian conviction that revelation is the normative foundation of our morality.  Unlike to them, Niebuhr rejects their identification of revelation with morality because he is well aware that our truths of revelation is subjected to historical relativism.  In this respect, he accepts historical and Kantian criticisms.  However, he doubts whether historical and metaphysical methods are sufficient enough for discussing the morality issue.

        From his confessorship Niebuhr maintains that any universal imperative underived from the will of God is evasive and finite.  In the Christian context he discovers that moral law is a moving thing, so that it should be applied extensively and intensively to changing everyday situations.  Thus, he assert the changeless succession of morality to be illusionary and calls for faith in the revealed God in Jesus Christ.

        In interpreting the will of God revealed in Jesus Christ Niebuhr abstracts the symbolic images and concepts from this revelation rather than the conceptual ideas and patterns from the established truths or order.  Of course, he acknowledges a natural knowledge of God and the establishment of morality based upon it.  For Niebuhr this approach is, however, not sufficient enough for our discussion of morality because in this rational but finite context we cannot understand and define the true feature of morality adequately.  For this reason, Niebuhr falls for the ultimate and infinite context illuminated by the revelation of God in Jesus Christ.  In the ultimate and infinite context of the special revelation Niebuhr finds adequate images, such as enemy, friend, and general principles for re-organizing and re-shaping our morality.

        Throughout this entire work Niebuhr coherently and successfully opens the theological foundation for reassessment and transformation of morality in light of revelation.  Specifically, his discoveries of relativism as the principle of limitation and conditioning, of faith relationship to the living God, of imagination and symbol in our reasoning process, of revelation's re-organizing and transforming power deserve to be praised. 

        Without the discovery of relativism we cannot discern morality from the will of God as its true source; without the discovery of faith relationship to the living God we fall into self-worship or supernaturalism by replacing the will of God by the established truths or miracles47); without the discovery of imagination and symbol we are astray according to the guidance of foolish reason led by false imaginations; and without the discovery of revelation's re-organizing we cannot come to the new but renewable understanding and the creative transformation of morality.  Based upon such discoveries, it is, therefore, concluded that Niebuhr constructs his ethics and argument of morality fairly coherently, even though we can find that some ideas and issues are not fully developed.


Bibliography


Niebuhr, H. Richard, The Meaning of Revelatio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0)

___________________, "Value Theory and Theology," The Nature of Religious

        Experience: Essays in Honor of Douglas Clyde Macintosh, ed. com.: J.S.

        Bixler, R.L. Calhoun, H.R.Niebuhr (New York: Harper & Brothers, 1937)

___________________, Christ and Culture (New York: Harper Torchbooks,1951)

___________________, "The Responsibility of the Church for Society," The Gospel,

        The Church And The World, ed. Kenneth Scotte Latourette (New York: Harper,

        1946)

___________________, The Responsible Self (New York, Evaston, and London: Harper

         & Row, 1963)

___________________,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60)


1)      H. Richard Niebuhr, The Meaning of Revelation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60) p. 132.


2)      Ibid., p.7, 8-18.


3)      Niebuhr states that "the recognition and acknowledgement of our relativity, however, does not mean that we are without an absolute"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New York: Harper Torchbooks,1951), p.194].


4)      The Meaning of Revelation, p.22.


5)       Ibid.. p. 36.   


6)       Ibid., pp. 89, 84-7.  See: "The Responsibility of the Church for Society," The Gospel, The Church And The World, ed. Kenneth Scotte Latourette (New York: Harper, 1946), pp. 116-17.  See also The Responsible Self (New York, Evaston, and London: Harper & Row, 1963), p.63-65.


7)       Ibid., p. 131.


8)       This is the first section of chapter III.


9)       The Meaning of Revelation, pp.96-7.


10)      Niebuhr explicates false imaginations by three examples: an example of mental insanity, of social misunderstanding, and of egoism (Ibid., pp.99-101).


11)      Ibid., pp. 109, 110.


12)      This known-knowing process continues to happen between a self and its object, while in science it is performed in such a one-sided way from a subject to an object (Ibid., p. 145).


13)      Ibid., p. 152.


14)      Ibid., p. 153.


15)      Ibid., p. 154.


16)      Ibid., p. 156, 156-58.


17)      Ibid., p. 159.


18)      Ibid., p. 161.


19)      Ibid., p. 162.


20)      Ibid., p. 164.


21)      Niebuhr is reluctant to attribute the term 'lawgiver' to God because it has a possibility of misuse in that the moral law is the consequence of the self's interpretation of God's actions upon it in the personal and social memory, that the law is not given without mediation in any way.  For this reason, Niebuhr prefers doer to lawgiver in his other writings.  Here the term 'the will [of God]' signifies God as doer who is the true source of the moral law.  Cf. The Responsible Self, p. 67.


22)      In The Responsible Self, Niebuhr maintains that deontological ethics tend to preclude the question of what is going on because it fails to see that living reality is moving and so may betray the universal law (The Responsible Self, p. 67).


23)      Ibid., p. 165.


24)      Ibid., p. 166-67.


25)      Ibid., p. 167.


26)      Ibid., p. 168.


27)      Niebuhr asserts that "knowledge of God is available only in religious relation to him" ["Value Theory and Theology," The Nature of Religious Experience: Essays in Honor of Douglas Clyde Macintosh, ed. com.: J.S. Bixler, R.L. Calhoun, H.R.Niebuhr (New York: Harper & Brothers, 1937) p.115].


28)      Ibid., p. 173.  Cf. The Responsible Self, p. 100.


29)      The Meaning of Revelation, pp. 170, 171.


30)      Ibid., p. 171.


31)      In the conclusion of "The Center of Value,"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Niebuhr maintains that the radical faith in God the One beyond the many transforms our knowledge and action adequately (See "The Center of Value,"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pp. 125-26).


32)      In Christ and Culture, Niebuhr locates Jesus' practice of faith, hope, love, obedience, and humility virtues in his relation to God.  Each virtue abstracted from the others manifests a personal identity before God that accounts for the excellence of that virtue and the other as well.  For this reason, Niebuhr maintains that "the strangeness, the heroic stature, the extremism and sublimity of this person, considered morally, is due to that unique devotion to God and to that single-hearted trust in Him which can be symbolized by no other figure of speech so well as by the one which calls him Son of God (Christ and Culture, p. 27).


33)      See appendix A, "Metaphors and Morals," of The Responsible Self (pp. 154-59).


34)      The Responsible Self, p. 167,


35)      The Meaning of Revelation., pp. 163, 175-76.


36)      Ibid., p. 179.


37)      Ibid., p. 181.


38)      Ibid., p. 181.


39)      Ibid., p. 184.


40)      Ibid., p. 185.


41)      The Responsible Self, pp. 114-15.


42)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p. 117.


43)      Ibid., p. 187.


44)      Ibid., p. 190.


45)      The Responsible Self, p. 122.


46)      Ibid., p. 132.


47)      Niebuhr distinguishes his dogmatic faith in God from "uncritical dogmatism" which is "the practice of those explicit or disguised relational systems of thought about the good which arbitrarily choose some limited starting point for their inquiries and either end with the confession that value is an irrational concept which must nevertheless be rationally employed because nature requires this, or otherwise rule out of consideration great realms of value relations as irrelevant"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60), p. 1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당신안에 잠재된 리더십을 키우라
존맥스웰 / 두란노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2005 04 19 화 서평

제목: 당신안에 잠재된 리더십을 키우라

원제: Developing The Leader Within You

저자: 존 맥스웰 (John Maxwell)

역자: 강준민

서평: 이강훈



서론


축구 팀 성적이 좋지 않을 때는, 선수를 교체한다. 그러나 팀 전체의 분위기가 문제가 될 때는, 코치를 갈아 치운다. 모든 성공의 열쇠는 리더에게 달려 있다. 리더십은 타고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리더가 다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리더십의 많은 부분은 습득될 수 있는 것이다. 리더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있다.


“사람들은 절대로 관리되길 원치 않는다. 인도되길 원한다.”


사람을 관리하고 통제하기보다는 매혹하고 기꺼이 인도받게 해야 좋은 리더라 할 수 있다.


당신은 말을 물가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관리하길 원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관리해야만 한다. 그러면 결국 당신은 자신이 관리되기보다는 인도되길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 리더십의 정의: 영향력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추종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지극히 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일생 동안 최소 일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지도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생이란 내게 영향을 준 사람들에 의해서 전개되어 나간다. 그들은 매일 나의 약점을 지적해 주었고, 내가 높은 vision을 갖도록 감동을 주었으며, 현재의 내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이 영향력이란 개발될 수 있는 기술이다. 세계적인 광고기관인 Hill and Knowlton의 중역 로버트 딜렌슈나이더 (Robert Dilenschneider)는 최근 『Power and Influence』, 한국말로, 『힘과 영향력』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앞서가는 지도자가 되려면, communication, 의사소통, recognition, 인식, influence, 영향력,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은 영향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향력은 낮은 단계에서부터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Maxwell은 영향력을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5

인격

존경 사람들은 내 인격과 행동을 통해서 존경한다.

주의 여기에 이르려면, 생명보다 귀한 헌신을 해야 한다.

4

인물개발

재생산 사람들은 내가 행한 일로 인해 나를 따른다.

주의 이 단계에서는 광범위한 성장이 이루어진다. 여기에 이르려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3

성과

결과 사람들은 내가 이룬 성취로 인해 나를 따른다.

주의 이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을 긍정한다. 그들은 나를 좋아하고,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비록 작은 문제가 발생해도 성공의 여세로 잘 카버 된다.

2

허용

관계 사람들은 자신이 원해서 지도자를 따른다.

주의 사람들은 주어진 권위의 한계 이상으로 나를 추종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고 이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추종자들의 열정이 식어버린다.

1

지위

권리 사람들은 의무감에서 지도자를 따른다.

내 영향력은 내 지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이 단계에 머물수록 실패의 가능성은 높아지고 사기는 저하된다.



2. 리더십의 열쇠: 우선순위


만약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프로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아마추어라 한다면, 프로와 아마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어떤 일을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느냐의 차이이다.


경영학에서는 라는 것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우선이 되는 일이 1순위부터 10순위까지 있다고 가정하자. 이 원리에 따르면, 우선순위 1위와 2위의 일이, 즉 우선순위 20%의 일이 성과의 80%를 차지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20/80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프로는 이 우선순위 20%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인생에서 최하 80%이상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아마추어는 인생에서 덜 중요한 것에 매달리기 때문에, 암만 잘해도 20%의 성취밖에는 못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알고, 그것에 투자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4배의 효율성이 높은 것이다.그러므로 삶의 우선순위 1․2위에 투자하라! 그러면 아무리 시간이 없는 인생도, 아무리 바쁜 일정에 쫓기는 인생도, 최소한 80%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선순위

 

 

 

 

 

 

 

 

성취도

1

1

2

2

3

3

4

4

5

5

6

6

7

7

8

8

9

9

10

10


그러면 내가 하루의 일과 가운데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한 번 열 가지를 적어보고, 그 우선순위를 정해보라! 하지만 그 순위는 자꾸 바뀐다. 결코 일정한 것이 아니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매겨라!


Estimate. 3R을 평가하라:

requirement: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

result: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낼 것인지

reward: 그 일을 하고나면 어떤 보상이 뒤따를 것인지를 평가해 보라.

Eliminate. 중복성을 제거하라: 남도 할 수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을 구지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라.

Expect. 비용을 예상하라: 그 일에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과 자원이 들어야 하는지를 미리 계산해 보라.


Anthony Campolo 박사는 95세 이상의 노인 50명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만약 당신이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시겠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그 대답은 세 가지로 압축이 되었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좀 더 심사숙고하는 삶을 살겠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좀 더 모험하는 삶을 살겠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될 일들을 하겠다.


이 설문조사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찮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일생을 허비해 왔다고 하는 것이다. 즉, 삶의 1순위, 2순위가 되는 일에 매달렸으면, 틀림없이 성공했을 텐데, 그 밖의 순위에 마음과 시간을 빼앗겨, 후회를 남기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한 violinist가 젊은 나이에 꽤 성공을 했다. “그래서 당신이 성공한 비결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저는 성격이 좀 꼼꼼한 편이라, 기숙사에 들어가면, 온통 방안을 청소했고,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랬더니 violin 실력에는 진전이 없더군요. 그래서 연습시간이 끝날 때가지는 나머지 일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자!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오늘날의 내가 되었습니다.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되는 것에 전념했을 때에, 성공적인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우선순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선순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동물조련사는 사자 굴에 들어갈 때, 의자를 들고 간다. 물론 회초리도 있고, 옆구리에 권총도 찼다. 그러나 의자는 조련사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의자 다리를 사자한테 들이밀면, 사자가 네 개의 다리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려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이 되어서, 결국 무기력해지고, 온순하고 유약한 사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최선의 것에는 yes, 차선의 것에는 no할 수 있어야 한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바위 위에 등대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그곳을 지키는 등대지기가 있었다. 그는 등대 불을 밝히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기름을 공급받았다. 그곳은 해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방문객이 자주 찾아들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난로에 불을 지펴야 한다며 기름을 좀 달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등불에 필요한 기름을 조금만 줄 수 없겠냐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자동차 바퀴에 바를 기름만 좀 얻어가자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등대지기는 그때그때마다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달 기름이 공급되는 날 하루 전, 그만 기름이 다 똑 떨어져버렸다. 등대의 불도 꺼져버렸다. 그 날따라 날씨도 흐리고, 달도 없어서, 해안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그날 밤 해안으로 들어오던 배들이 부딪혀서, 배들은 침몰하고, 선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등대지기는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날 밤 왜 등대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지요?” 그는 사람들의 딱한 처지들을 열거하며, 그때마다, 그저 조금씩 많지도 않은 기름을 나누어주었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당국자는 말하였다. “우리가 당신에게 기름을 준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등대에 불을 밝히기 위해서였던 것이오!”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대한 일들은 숱하게 많이 있다. 그것이 한 두 개일 수도 있지만, 한꺼번에 여러 가지가 몰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아무리 중요해도,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할 수는 없다. 오직 한 번에 하나씩만 처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중요한 일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No할 수 있어야 한다.


Robert J. McKain은, “사람들이 왜 성공하지 못하냐?”하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최선책에 집중하지 않고, 차선책에 몰두하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한다.


여러 해 전에, killer whale로 불리는 거대한 식인 고래 300마리가 해안으로 떼거리로 밀려와 죽어버렸다. 그 고래들은 정어리 떼를 쫓다가 어느 만에 갇혀 버렸고, 썰물이 되자 모래 바닥에서 죽게 된 것이다. 그 거대한 바다의 거인들이 하찮은 목표를 좇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Eastern 점보 여객기 401편은 휴일을 맞아 여행객들을 가득 싣고, 뉴욕을 떠나 마이애미로 가고 있었다. 비행기가 마이애미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선회하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landing gear의 작동여부를 알려주는 전광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비행기의 부조종사는 정말로 landing gear가 이상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전구가 나간 것인지 확인하게 되었다. 그 동안 비행기는 공항 주변을 계속 선회하고 있었다. 마침내 landing gear는 아무 문제없고, 전구만 나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구를 빼내려고 하는데, 이 전구가 전광판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는 것이었다. 급기야 옆에 있는 기장도 달려들어서 전구와 씨름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고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비행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늪 속으로 곤두박질쳤고, 수 십 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비행 경험이 많은 그 숙련된 조종사들이, 겨우 75센트짜리 전구 하나에 매달리는 바람에, 귀중한 인명 피해를 낸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하지 않은 것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에 가장 우선되는 일이 완수될 때까지,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상황에 따라 삶의 우선순위가 바뀔 때가 있다. 긴급 상황이 되면, 우선순위는 평상시와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평상시 같으면, 편지 한 통을 쓰려 해도, 며칠이 걸린다. 그러나 휴가를 가야 한다면, 하루만에 20통도 쓸 수 있다. 학생이 평소에 공부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공부하면, 하루에 책 반 권도 읽기 힘들다. 하지만 시험 때가 되면, 책 몇 권도 소화해내게 된다. 사람은 위기상황이 되면, 집중력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서, 파킨슨의 법칙 (Parkinson's Law)이라 한다. 평소에는 능률이 오르지 않던 일들이 어떤 긴급한 상황 속에서는 효과적으로 처리되는 것, 그 집중력의 원리를 가리켜서, 파킨슨의 법칙이라 부르는 것이다.


1912년 4월 14일 밤, 호화여객선 Titanic호는 대서양을 지나다 빙산에 부딪혀 가라앉고 있었다. 사고 당시 한 여인은 특실에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3분 안에 돌아오라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면서, 승객들이 버린 돈과 보석들을 밟게 되었다. 복도를 지나 자신이 머물렀던 특실에 들어서자, 미처 챙기지 못한 보석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오렌지 세 개만 거머쥐고, 그 외의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급히 구명보트로 되돌아 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를 오렌지 몇 개와 바꾼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이 배 위에 있던 모든 물건의 가치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상황에 따라 가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고의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3.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 통전성 (integrity)


통전성 (integrity)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그래서 통전성은 리더의 신뢰감을 좌우하는 요소가 된다. 이 통전성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배우는 것들의 89$는 시각적인 자극을 통해서, 10%는 청각적인 자극을 통해서, 단 1%만이 다른 감각 기관을 통해서 습득된다. 즉, 사람은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보여주는 리더십이 얼마나 큰 것인가? 겉과 속이 같은, 변함없고, 일관된 사람을 우리는 신뢰한다. 통전성이 보여주는 리더십의 가장 큰 파우워인 것이다. R. C. Sroul이 쓴 『반대의견의 극복』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한 신실한 독일계 유대인이 있었다. 그는 항상 회당일에 열심이었다. 그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신앙에 항상 존경심을 가져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시골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회당도 없었고 작은 루터교회 하나만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 우리 가족은 유대교인이 아니라 루터교인이다.”라고 선언했다. “왜 그래요?”하고 어린 아들이 묻자, “그게 사업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지!”하고 대답했다 한다. 그때부터 아들은 종교에 대해 큰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고, 깊은 사색에 빠졌다. 마침내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묘사했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그리고 한때 이 지구상의 절반의 인구가 그의 사상을 따르게 되었다. 그가 누구냐? 바로 Karl Marx이다.


겉과 속이 같을 때, 가장 바른 교육이 되고, 90%의 사람들은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옛날 중국은 북쪽 오랑캐들의 공격을 자주 받게 되자, 든든한 외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그 성이 세워진 후로 큰 공격만 세 번이나 받았다. 오랑캐는 단 한 번도 성을 부수거나 넘지 않았다. 관리들을 매수해서, 매 번 당당하게 성문을 통과해서 넘어왔던 것이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견고한 성을 의지한 나머지, 자녀들에게 통전성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통전성을 보여주는 리더십이다. 즉, 내가 먼저 그렇게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기도가 중요하다면, 내가 먼저 기도해야 한다. 만약 봉사가 중요하다면, 내가 먼저 봉사해야 한다. 만약 전도가 중요하다면, 내가 먼저 전도해야 한다. 통전성에 관한한 결코 지름길은 없다. 오히려 무식할 정도로 고지식한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인 것이다. 왜? 가장 잘 통하니까.


Peter Drucker는,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가장 좋은 리더십이란 유능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실함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실한 지도자는 떠벌일 필요가 없다. 행하는 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사람들은 90%가 보고 따르기 때문이다.


통전성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하고, 나를 최고로 만들어줄 좋은 mentor를 만나야 한다. 가장 좋은 선생은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좋은 mentor들이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4. 리더십의 최후의 시금석: 긍정적인 변화를 시도하기


어떤 리더들은 종종 자기 회중이 안 바뀐다고 푸념을 한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슈피지아드는 젊을 때, “하나님 나에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장년이 되었을 때, 그는 다시 “하나님 나에게 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노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나 자신이 먼저 변화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Howard Hendricks는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연구 (Teaching to Change Lives)』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효과적인 가르침은 변화된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당신이 변화되면 변화될수록, 당신은 다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누군가를 진정 변화시키길 원한다면, 당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지도자란, 자기 스스로 계속 변화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이 안 바뀌는 이유는, 내가 안 바뀌기 때문이다.


Deere and Co.의 회장 William A. Hewitt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평생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리더십을 크게 발휘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항상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변할 때, 조직이 변한다. 조직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다른 무엇에 손을 대는 것보다도 리더에게 손을 대야 한다. 그것 빼놓고 다른 것에만 손을 대면, 헛공사인 것이다. 조직의 성장은 리더의 자기 성장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리더의 성장만큼 조직의 성장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결코 조직은 리더를 앞설 수 없다!


그렇다면 변화란 쉬운가? 매우 어렵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보편적인 감정이다. 누구나 변화를 두려워한다. 변화란 불안정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갖춘 사람일수록 그 불안감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변화에 대해 매우 소극적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다 믿음까지 가세하면, 변화는 더욱 어렵다.


1589년, 갈릴레오는 이름난 학자들을 죄다 피사의 사탑 아래로 모아놓고, 10파운드짜리 물체와 1파운드짜리 물체를 떨어뜨렸다. 두 물체는 동시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에이 뭔가 잘못됐겠지!”하며, 눈앞에 벌어진 명백한 사실을 부인했다.


또 갈릴레오는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가지고,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와 혹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그랬다가 교황 앞에서 “나는 이단사설인 지동설을 미워하고 저주한다”고 선언해야 했다. 그리고 평생 가택에 연금된 채 살아야 했다. 죽어서도 가족묘에 묻힐 수 없었다.


때론 믿음이, 종교적 관행이, 바른 변화를 혹독하게 가로막는다. 그럼 사람들은 왜 이토록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변화를 다른 사람한테 조종당하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익숙한 생활 습관에 방해를 받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변화의 목적이 분명치 않아서.

실패를 두려워해서.

변화에 대한 보상이 투자한 노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현재의 일에 안주하고 싶어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리더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리더 자신이 개인적 비판에 감정이 상해서.

변화가 나한테는 개인적으로 큰 손해가 되기 때문에.

변화가 더 큰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마음이 좁아 터져서 도저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전통을 옹호하는 입장이라서.


이와 같이 변화할 수 없는 이유들은 변할 수 있는 이유들보다 엄청나게 많아 보인다. 그만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리더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서 변화를 많이 이끌어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때문에 변한다.


변화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타격/손실을 입었을 때,

변화를 갈급할 만큼 충분히 배우고, 감동받고, 자극받았을 때,

변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받았을 때,


리더는 이 셋 중의 어느 하나가 반드시 발생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5. 리더십을 인정받는 비결: 문제 해결


F. F. Fournies는 『작업의 효능을 높이기 위한 지침 (Coaching for Improved Work Performance』라고 하는 책에서, 사람들이 일을 잘 못하는 일반적인 이유를 네 가지로 지적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what)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how)

왜 하는지 모른다. (why)

눈앞에 벌어진 장애를 통제하지 못한다. (failure)


사람들이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지도자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는,


무엇을 할 것인지 (what)

어떻게 해야 할지 (how)

왜 하는지 (why)

그래서 일의 75%는 되게 만든다. (success)


당신은 어떠한 지도자인가?


독수리는 빠르게 날면서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공기다. 그러나 공기가 없다면, 독수리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도 전에 뚝 떨어지고 말 것이다. 독수리가 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바로 그 요소가, 동시에 멋지게 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동력선이 극복해야 할 주된 장애물은 프로펠러에 저항하는 물이다. 그러나 이 물의 저항이 없다면, 배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장애물은 결코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공의 필연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장애와 문제가 없는 인생은 아무 긴장감도, 아무 의미있는 변화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목화가 매우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목화다래바구미라는 곤충이 멕시코에서 미국 남부로 넘어와 목화밭을 망쳐 놓았다. 한 해 농사를 다 망친 농부들은 하는 수 없이 대체작물로, 콩, 땅콩 등을 재배했다. 또 소, 돼지, 닭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이 목화만 재배할 때보다 2.5배 더 높아졌다. Alabama주의 Enterprise 사람들은 거대한 목화다래바구미 덕분에 부자가 된 것을 기념하여, 조각상을 세우고, 거기에다, “목화다래바구미에게 그리고 그 벌레가 가져다 준 번영에 진심으로 감사하며”라고 썼다.


우리는 삶 가운데 문제와 책임을 제거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에게 물어보라!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짊어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많은 시편들이 역경 속에서 기록되엇다. 대부분의 서신들은 감옥에서 씌여졌다. 번연 (John Bunyun)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썼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은 자기 침대를 옮기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아픈 가운데 영국 병원을 새롭게 재건하였다. 파스퇴르는 이미 반신불수의 마비가 오고 중풍으로 전신이 마비될 위험 속에서 질병 퇴치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돌리 파톤 (Dolly Parton)의 말처럼, “무지개를 보길 원하면, 먼저 비가 쏟아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장애를 긍정하라! 거기에 문제도 있지만, 해답도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더 큰 문제다. 나는 얼마든지 문제를 더 큰 문제로 만들 수도 있고, 아주 작게 축소할 수도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에게 (to me)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in me)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하는 것이다.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나의 반응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 때문에 눌려지낸다. 그러나 루즈벨트, 헬렌 켈러, 윈스턴 처칠, 알버트 슈바이처, 마하트마 간디 같은 성공적인 300명의 인물 가운데 1/4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3/4이 가난했거나 깨어진 가정 출신이었거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장애를 성공의 디딤돌로 삼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환경을 바꿀 수는 없었으나 그 환경에 대한 자기들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랬더니 성공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프레드 스미스 (Fred Smith)는 말한다. “만약 내가 어떤 문제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것 때문에 땀낼 필요 전혀 없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는 곳에서는 문제가 결코 심각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파악하고 처리해버리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그가 해결하는 문제의 크기에 따라 평가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을 키우는 일에 더 투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나중에 커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하라!: 사람들을 개발하는 데에 전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사람은, 온통 그 사람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남을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말라!: 그 사람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라!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함께 그와 시간을 보내라!


문제 해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려면,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노만 빈센트 필 (Norman Vincent Peale)이 말하는 적극적인/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을 바꾸도록 돕는다. 타겟 (G. W. Target)이 쓴 『창문 (The Windows)』이라는 수필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한 병실에 두 환자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심하게 아팠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전부였다. 창가의 사람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세계에 대해 옆 사람에게 설명해 주었다. 공원이며, 호수며, 그 흥미로운 광경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옆 사람은 그 얘기를 듣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 침대에 눕지 못한 것이 매우 불공평하게 생각되었다. 원망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창가의 친구가 호흡에 곤란을 느끼며 기침을 해댔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옆 사람은 천장만 응시한 채 간호사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창가의 친구는 시체가 되어 나갔다. 그러자 그는 간호사에게 그토록 옮기고 싶었던 창가 침대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밖을 보았을 때, 그의 눈앞에는 밋밋한 벽뿐이었다. 두 사람 다 바깥 세상의 경치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상상으로 둘 다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없어지고나자 남은 사람도 행복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곧잘 문제 해결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증상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리차드 슬로마 (Richard Sloma)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들지 말고, 하나씩 순서를 정해서 하라고 한다.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다 해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6. 리더십의 특별한 장점: 태도


한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의 특징 25가지를 적게 했다. 그리고 태도에 해당되는 것은 attitude의 “A”를 쓰게 했고, 기술에 해당되는 것은 skills의 “S”를 쓰게 했다. 그랬더니 95%가 태도와 관한 것임이 밝혀졌다. 척 스윈돌 (Chuck Swindoll)은 말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태도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뼈저리게 절감한다.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태도는 외모보다, 재능보다,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 태도는 돈보다, 환경보다,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 내 인생에서 10%는 나한테 (to me) 벌어진 일이고, 90%는 그것에 대해 내가 반응한 결과들이다. 태도가 내 삶의 90%를 결정한다.


지도자의 태도는 더 중요하다. 피지도자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모든 일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나의 태도이다. 미국 경제계에 대한 1983년도 코스 보고서 (Cos Report)에 의하면, 『포춘』지에 선정된 미국 500대기업의 임원들 94%가, “태도”를 성공의 첫 번째 요인으로 꼽았다고 한다. 카네기재단에서 최근 10만 명의 인사 기록을 분석한 결과, 성공 요인의 15%가 기술적인 훈련이었고, 나머지 85%는 성품과 태도였다.


우리는 우리가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은 봐도 스쳐지나가게 된다. 태도가 시야까지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넬 모니 (Nell Mohney)는 『신념은 태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Beliefs Can Influence Attitude)』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실례를 소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한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 세 명의 교사를 불러다 놓고 말했다. “당신들 세 분은 이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교사들이고, 가장 우수한 교육 전문가들입니다. 그래서 세 분께 IQ가 가장 높은 우수학생 90명을 맡기려 합니다. 내년 한 해 동안 학생들의 성적을 높일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는 재량을 마음껏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이듬해, 교사와 학생들은 모두 가르침과 학업을 즐길 수 있었다. 교사들은 가장 명석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학생들은 가장 숙련된 교사들의 친절한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타 지역 학생들에 비해 230% 이상의 진보를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 교사들은 교사들 가운데서 임의로 추출된 평범한 교사들이었고, 아이들도 그냥 보통 아이들이었다.


왜 이런 차이을 낳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기대감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 것이다. 태도가 결과를 바꾸게 한다.


우리 인생에 나쁜 일이 벌어지면, 감정이 나빠진다. 그 일어난 감정 자체를 중단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를 중단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 자기를 망치도록 내버려둔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감정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은 감정적으로 안정된 사람에 비해 교통사고를 낼 확률이 144%더 높다. 또 교통사고 사망자 중 20%가 사고 6시간 전에 누군가와 다투었다고 한다.


염세주의자는 바람에 대해 불평한다.

낙관주의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대한다.

지도자는 배의 닻을 조절한다.


나의 태도는 그냥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만 한다. 그 선택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위대한 날은, 내가 나의 태도에 대해 책임지기로 한 날이다. 불행은 선택이다 (Misery is an option). 내가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태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불행에 대해 나는 상당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사는 동안 얼마나 보람있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은 얼굴의 아름다움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은 통제할 수 있다.

당신은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운 순간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인생을 덜 힘들도록 선택할 수는 있다.

당신은 세상의 부정적인 분위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 마음의 분위기는 통제할 수 있다.

당신은 곧잘 당신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 든다. 그러나 당신의 태도를 통제하려는 노력은 거의하지 않는다.


휴 다운스 (Hugh Downs)는, “행복한 사람은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조건에 좌우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이 조금만 잘못돼도 당황해하고, 속상해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불행에 빠진다.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 결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고통들을 극복해야 할 올바른 태도를 즉시 선택해야만 한다.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을 너무너무 괴롭히는 간수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나한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갈 수는 있지만, 단 한 가지, 내가 당신의 행동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지는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유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면, 분노와 비통에 빠지고, 강퍅해진다. 태도가 점점 부정적으로 된다. 그리고 결국 어떤 사건들이 자신들을 망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망친 주범은 악재보다는 악재들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마치 감기에 걸린 사람과 같이 있으면 감기에 옮는 것처럼, 나의 태도는 사람들에게서 옮는다. 동시에 나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내가 미소를 보내면, 사람들도 미소를 띄게 된다. 반면에 어떤 사람에 대한 절제되지 못한 분노를 표시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사게 된다. 너그러운 자가 이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심리신경면역학 (psychoneuroimmunolog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소망이 건강 (면역체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런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 (King's College) 암연구소에서는 유방절제 수술을 받은 57명의 환자들을 상대로 연구를 했다. 이들 가운데서 소망을 잃은 사람은 5명중 4명이 10년내에 사망했고, 반면에 소망을 가진 사람은 10명 7명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생존했다.


태도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 다음 바꾸어진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좋은 습관은 좋은 태도를 길러낸다. 모내기를 하면, 가을이면 추수를 한다. 사과묘목을 심으면, 수년 내에 사과열매를 거둔다. 당신은 어떤 행동, 어떤 습관, 어떤 태도를 심을 것인가? 그것이 1년 후, 2년 후, 10년 후의 당신을 결정한다.


7. 가장 귀중한 자산의 개발: 사람들


지도자로서 당신의 꿈을 성취하려면, 당신과 함께 일하고 당신을 도울 사람들을 개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그들을 개발하면 할수록 당신의 꿈은 더욱 확장된다. 다음을 생각하라!


사람들의 가치: 이것은 나의 태도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에 대한 헌신: 이것은 나의 시간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에 대한 신실함: 이것은 나의 인격의 문제다.

사람들을 위한 기준: 이것은 나의 비전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 이것은 나의 리더십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을 잘 개발하는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공적인 지도자는 어떤 면이 다른가?


1. 사람들에 대해 올바른 가정을 한다.

2. 사람들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진다.

3. 사람들에게 올바른 도움을 준다.


성공적인 지도자는 올바른 가정을 한다.


지도자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실패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내가 열매를 주고, 뿌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정 (假定)을 하고 산다. 가정이란 “미리 정해 놓은 어떤 의견”이다. 이 가정에 따라 나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찾는다. 내가 사람들에 대해 가정하고 있는 것이 곧 내가 그들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찾은 것은 내가 반응하는 일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좋은 가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좋은 가정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가정: 모든 사람들은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주려 있다. 그것이 일이든, 동료애든, 사랑이든, 사람들은 그 멋인가에 목말라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주길 원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Nepoleon Bonaparte)은 자기 휘하의 장교 이름을 다 외우고 있었다. 막사를 돌다가 장교들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불러가며 인사를 했고, 참가했던 전투나 작전에 대해 얘기했다. 또 그들의 고향과 아내와 가족에 대한 안부를 묻는 일도 잊지 않았다. 자기에 대해 그렇게 소상하게 기억해주는 리더에게 장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번째 가정: 모든 사람들은 격려가 필요하고, 격려에 대해 반응한다. 비판은 그것이 비록 마땅하다 할지라도, 나쁜 결과를 낳는다. 프랭클 (Voctor Frankl)은 말한다. “만약 사람들을 그대가 꿈꾸는 인물로 대우해주며 칭찬해주면, 그 사람들은 진짜 그러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우해주는 것은 그들을 더 나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상주의야말로 참된 현실주의인 것이다.” “무엇이 위대한 야구 감독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레기 잭슨 (Reggie Jackson)은, “선수 각자가 자기 생각보다 자기를 더 훌륭한 선수로 믿게 만드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든 (Henry Ford)는, “내 안에서 최상의 것을 끌어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가정: 사람들은 지도자의 리더십을 “믿기” 전에 먼저 그 지도자를 “믿는다.”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대모험에 다섯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① 대서양 항해에 대한 수요가 전혀 없었다. ② 콜럼버스는 한 번도 선장역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③ 콜럼버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외국인 (이탈리아인)이었다. ④ 콜럼버스는 대모험을 수행할 만한 재력이 없었다. ⑤ 콜럼버스는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모든 나라들의 거래에서 10%의 수수료, “대양의 제독”이라는 직함, 발견되는 모든 새로운 영토들에 대해 영구적인 총독 지위, 자녀들에게 상속될 모든 존칭과 권리) 이렇게 콜럼버스는 위험한 항해보다 더 넘기 어려운 장애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의 존 (John) 왕에게 필요한 자금을 후원해 달라고, 무려 7년간 설득을 했다. 또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Ferdinand) 왕 이사벨라 (Isabella) 여왕에게 최종적인 승낙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그 결과 콜럼버스는 후원을 승낙받았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요구조건대로. 어떻게 이처럼 허황된 여행을 승낙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막대한 자금을 후원하고, 더구나 그가 요구하는 조건을 다 수락하면서까지? 성공적인 지도자들은 다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 꿈으로 설득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 꿈으로 설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네 번째 가정: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하는 비결을 모른다. 사람들은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운이 좋아서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생 복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성공은 철저히 계획의 결과다! 준비된 계획과 기회가 만날 때, 성공은 찾아오는 것이다.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는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은 과정이다. 성공은 성장이고 발전이다. 사람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공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진짜 성공은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실패는 다시 한 번 지혜롭게 시작할 기회다. 실패했는가? 툭툭 털고 일어나라! 이제 성공을 위해 새롭게 시작할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실패를 감추려하거나,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실패는 정말 실패가 된다.


다섯 번째 가정: 사람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 취학전 아동들은 학교에 무척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좀 지나다보면, 서서히 싫증을 낸다. “배가 아프다”든지, 뭐, 다른 핑계로 학교에 가려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재동기부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기부여도 재충전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은 교회를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가?


성공적인 지도자는 올바른 가정을 한다. 뿐만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질문: “나는 사람들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꿈만 세우고 그 꿈을 세우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man power”다. 사람 있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Federal Express社의 회장 Fred Smith는 창업 초기부터 사람을 중시해왔다. 그래서 회사의 경영이념을, “사람, 봉사, 이익.”으로 정한 결과,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사람을 조종하려 들면 (manipulate), 그 사람은 최소로 움직이려 들지만, 그 사람에게 동기부여를 해 주면, 그 사람은 최대한으로 기여하려 든다.



둘째 질문: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사랑으로 충고할’ 수 있는가?” 다음은 사랑으로 하는 충고의 십계이다. ① 충고는 비공개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라! ② 가능한 한 신속히 하라! ③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말하라! ④ 완전히 납득하면 재차 언급하지 말라! ⑤ 그가 바꿀 수 있는 것만 취급하라! ⑥ 빈정거리지 말라! ⑦ “항상”이나 “절대로”라는 말은 피하라! ⑧ 가능하다면, 비판보다는 제안이나 질문을 던지라! ⑨ 이렇게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사과하지 말라! ⑩ 칭찬을 잊지 말라!


셋째 질문: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듣고 있는가?” 나는 잘 들어주는 사람인가? 다음의 check list를 보고, “항상”은 4점, “거의”는 3점, “가끔”은 2점, “전혀”는 1점을 주라!


__________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막지 않고 끝까지 말하게 한다.

__________ 상대방의 말에서 그 숨은 의도를 듣는다.

__________ 대화에서 중요한 내용을 기록한다.

__________ 상대방이 한 말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질문한다.

__________ 상대방과 의견이 다를 때, 적대감을 표시하거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__________ 듣는 동안 주의를 산만케 하는 일이 일어나도 집중한다.

__________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평가:


26점 이상: 최고로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22-25점: 잘 들어주는 편이다.

18-21점: 듣는 일에 약간의 개선이 필요하다.

17점이하: 즉시 듣는 자세를 뜯어고쳐라!


펜실배니아대학 교수이자 정신과 박사인 David Burns는 말한다. “먼저 자기 견해와 자기 감정에 충실해서는, 성공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먼저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존중해주며, 이해해줄 때에, 그는 마음을 열고, 당신의 견해와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


지도자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지금 이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럼 당신의 사람들이 열매맺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당신을 주어라!


당신의 사람들과 최소한 일주일에 30분 이상 보내라!

그들과 일하라!

그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게끔 도와주는 모임을 가져라!

그들은 영향력 있는 상위 20%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둘째, 그들이 주인의식을 갖게 하라!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라!

목적으로 취급된다는 느낌을 갖게 하라!

다른 이들의 공명심을 위해 수단으로 전락되는 일이 없게 하라!

헛된 시간낭비가 없게 하라!


셋째,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라!


일하기 가장 좋은 분위기를 만들라! (긍정적, 포용적)

일을 잘 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를 제공하라!

지속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라! (성장하는 사원들이 성장하는 회사를 만든다.)

협력하여 일할 수 있는 팀을 구성해 줘라! (함께 일할 수 있다면, 큰 성공이다.)

보다 위대한 비전을 제시하라!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일을 위해 헌신하도록 유도하라!)


카네기 (Andrew Carnegie)는 미국 최고의 거부였다. 한 때 그를 돕는 백만장자만 해도 43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한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백만장자를 고용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이 처음 일할 때는 백만장자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하고 함께 일하다보니까, 다 백만장자가 되었지요.” 그래서 또 물었다. “어떻게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급료를 줄 수가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사람을 개발하는 것은 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금광산에 가면, 1온스의 금을 캐기 위해, 어마어마한 흙더미를 파낸다. 아무도 흙을 얻기 위해 그 많은 흙을 파낸 것이 아니다. 금을 얻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혼자 열 사람 몫을 감당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열 사람을 훈련시키는 일은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인물을 기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 가는 사람은 바로 그날 시작할 수 있다면, 여럿이서 같이 가려면 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사장들에게, “중견 간부급 이상의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대부분, “함께 일하는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세계적인 거부 록펠러 (John Rockefeller)는, “그 어떠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사람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보수를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성공의 필수요소인 것이다.


사람들은 논쟁보다는 관찰을 통해서 더 많이 변화된다. 동기부여를 가장 빠르게, 가장 확실하게 하는 비결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쉽게 따라하게 된다. 지도자의 속도가 피지도자의 속도를 결정한다. 피지도자는 결코 지도자보다 더 멀리 갈 수 없다.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모델이 되라! 그리고 그들이 성장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모델이 된다면, 그 조직은 폭발적 성장이 있게 된다.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들판에 뿌려진 회반죽이 식물들을 더 잘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이웃에게 말했지만, 믿으려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잔디밭에 글자 모양으로 회반죽을 뿌렸다. 한두 주가 지나자 회반죽이 뿌려진 곳은 더 빨리 푸르게 성장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것은 회반죽을 준 것이다.”라고 하는 글자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회반죽에 대해 논쟁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지식을, 정보를 이해 못하는가? 보여주라! 그리고 더 이상 불필요한 논쟁을 그치게 하라!


나에 대한 평가를 놓고 말하다보면, “나와 상대방의 생각이 왜 이렇게 다른가?”하는 것에 깜짝 놀라게 된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 자신을 평가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미 성취해 놓은 것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롱펠로우 (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말이다. 나는 나의 가능성만 가지고도, 나의 잠재성만 가지고도, 나를 평가하며, 나를 대단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현실적으로 이룬 것만 가지고, 즉 눈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평가하는 법이다. 사람들에겐 이런 착각이 있다.


나의 문제는 가장 큰 것이다.

내 자녀는 가장 똑똑하다.

내 농담은 가장 재미있다.

내 허물과 잘못은 그냥 넘어가야 한다.


한 장군과 부관인 젊은 중위가 영국에서 기차를 탔다. 맞은 편에는 할머니와 아름다운 여인이 타고 있었다. 기차는 어느덧 긴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한 10초 동안 기차 안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 칸에서는 키스소리와 뺨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터널을 벗어나자, 사람들은 각자 추리하기 시작했다.


젊은 여인: 젊은 중위가 내게 키스한 건 좋았는데, 할머니가 왜 그의 뺨을 치셨지?

할머니: 감히 내 손녀에게 키스를 하다니, 무례한 양키놈 같으니라구. 그래도 그의 뺨을 칠 수 있다니, 내 손녀 하나는 잘 뒀어!

장군: 아니 키스는 내 옆에 있는 중위가 했는데, 왜 내 뺨을 때려?


기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중위뿐이었다. 그는 그 짧은 순간, 아름다운 여인에게 키스도 하고, 장군의 뺨을 치는 기회를 누렸던 것이다.


당신의 착각은 무엇인가? 착각과 현실 사이의 갭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에는 넘기 힘든 벽이 놓이게 될 것이다. 그 벽을 좁혀야 피지도자는 더 효과적인 성장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도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나를 볼 것이 아니라, 피지도자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16,000명의 사장들 가운데 성공적인 13%는 회사의 이익뿐만 아니라, 직원들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도자는 사람에 대해 관심해야 한다. 그 관심은, 그들의 형편을 헤아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성공적인 지도자는 피지도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했고, 반면에 그렇지 못한 지도자들은 대화를 피했고, 지시하고 명령하기만 했다. 사람을 개발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관심하라!


미국 전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근로자의 85%가, “더 일하려면 얼마든지 더 일할 수도 있었다.”고 대답했다. 절반이 넘는 근로자가, “만약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일의 효율성을 두 배로 늘릴 수도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많은 회사들이 사람들을 진짜로 써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계의 리더십 부문 연구에 따르면, 사장들은 업무의 3/4을 사람 다루는 일에 쓰고 있다고 한다.


윌리엄 보에커 (William Boetcker)는 사람들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보다 항상 적게 하는 사람.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사람.

자기만 일할 뿐 아니라, 남들도 일하도록 자극을 주는 사람.


당신의 조직에는 어떤 사람들이 많은가? 이제 모든 변화가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8. 리더십의 필수 자질: 비전


모든 유능한 지도자들은 반드시 성취해야 할 비전을 가지고 있다. 그 비전은 그들을 움직여나간 원동력이었으며, 문제해결을 위한 열쇠였다. 비전이 없다고 가정해보라! 에너지는 감소되고, 생산성은 떨어지고, 사람들은 시들해진다. 헬렌 켈러는 말했다. “장님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무엇이냐? 그것은, 시력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이다.” 지도자는 선견자 (foreseer)이다. 먼저 보는 사람인 것이다.


조직에 있어서 목적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이 곧 구심점이 되며, 추진력이 되며, 성취동기와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비전이 먼저일까? 지도자가 먼저일까? 처음 비전을 만드는 것은 지도자이지만, 한 번 만들어진 다음에는 그 비전이 지도자를 이끈다. 릭 워렌 (Rick Warren)이,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주장한 것처럼, 비전이 삶을 이끄는 것이다.


이토록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을 본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지 않은 것은, 눈으로 봐도 스쳐지나가게 된다.


자동차의 천재 헨리 포드는 V-8 엔진을 생각해냈다. 그 당시 엔지니어들은 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연구팀을 구성하고, 1년 후에 V-8 엔진을 생산해냈다. 헨리 포드와 엔지니어들은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지만, 보는 것은 달랐다.


윌리엄 바커 (William Barker)의 『사계절 구주 (A Saviour for All Seasons』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미국 동부 감독이 중서부의 한 대학을 방문했다. 저녁 식사 후 감독은, “발명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거의 발명되었고, 이제 천년왕국도 머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젊은 총장은 그의 주장에 정중하게 반대했다. “아마 50년 안에 사람이 하늘을 날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말도 안돼요! 그건 오직 천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라고 감독은 화를 냈다. 그 감독의 이름은 라이트 (Wright). 잠시 후 그의 두 아들 오빌 (Orville)과 윌버 (Wilbur)는 비행기로 하늘을 나는 일에 성공한다.


이들은 한 지붕 아래 살았지만, 같은 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바로 사람은 자기가 보기로 미리 준비한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사람들의 눈을 바꾸어주어야 한다.


디즈니 월드를 개장할 때, 월트 디즈니 (Walt Disney)는 이미 죽고 없었다. 사회자는 그의 아내를 소개하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디즈니씨가 살아서 이 개막식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자 디즈니 여사는 말했다. “그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모이세 로즌 (Moishe Rosen)은 비전을 키우기 위한 훈련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완성하게 한다.


“만약 내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갖는다면,

나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을 하겠다.”


만약 내가 무제한의 시간, 무제한의 자금, 무제한의 정보, 무제한의 스탭진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아마 가장 가치 있는 비전을 말하게 될 것이다.


릭 워렌은 말한다. “만약 조직의 온도를 알고 싶으면, 지도자의 입속에 온도를 넣어보면 됩니다.” 지도자는 결코 자기가 본 길보다 더 멀리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비전의 중심은 철저히 지도자에게 있다.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피지도자는 지도자를 먼저 찾은 후에, 그 다음에 비전을 찾는다. 그러나 지도자는 비전을 먼저 찾은 후에, 피지도자를 찾는다. 비전이 없다면, 당신은 명목상의 지도자에 불과하다.


리더십의 본질은 비전을 갖는 데에 있다. 그 비전을 당신은 명백하고 강력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비전을 세우는 자 (visioneer)와 몽상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비전을 세우는 자 (visioneer)

몽상가

말은 적으며 행동은 많이 한다.

말은 많으나 행동은 적게 한다.

자기 내면에서 힘을 얻는다.

외부 환경에서 힘을 찾는다.

문제가 생겨도 전진한다.

힘들면 그만 둔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주 가난하고 비천한 집에서 태어나, 거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매우 불우하게 자라났다. 토머스 에디슨 (Thomas Edison)은 기차에서 신문 파는 소년이었다. 앤드류 카네기 (Andrew Carnegie)는 한 달에 4달러씩 받고 일했다. 존 록펠러 (John D. Rockefeller)는 주당 6달러씩 받고 일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은 통나무 집에서 태어났다. 고대의 가장 위대한 연설가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는 원래 말더듬이었다. 쥴리어스 시저는 간질병환자였다. 나폴레옹은 사관학교 시절 46/65등이었다. 베토벤은 듣지 못했다. 찰스 디킨스와 헨델은 다리를 절었다. 호머는 장님이었다. 플라톤은 곱추였다. 월터 스캇 경은 반신불수였다. 그럼 어떻게 이들이 장애를 딛고 위대한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 바로 위대한 비전을 그들 내면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변덕스럽다. 비전은 깨지기 쉽다. 사람은 비전을 따르기 전에 먼저 지도자를 따른다. 그런 다음에나 비전을 배우고 받아들이며 따르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연주회장에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멋진 연주를 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심벌즈를 연주했다. 그것도 어쩌다 연주되었고, 그 영광스러운 시간도 매우 짧았다. 연주가 끝나자 한 소년이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심벌지를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배우셨나요?” 그가 말했다. “심벌즈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어. 단지 언제 쳐야 하는지만 알면 돼!”


좋은 아이디어, 위대한 비전은, 사람들이 준비되었을 때만 위대한 것이 된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너무 앞서 가고 있다면,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상실하게 된다. 그저 한 발짝, 두 발짝만 앞서 가라!


존 F. 케네디는 1960년대 안에 인간이 달에 착륙할 것이라고 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그의 꿈에 매료되었고, 그 꿈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당신의 비전이 이루어지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그 꿈에 매료되게 하라!


그러나 사실 비전을 전달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리더십 전문지 『Leadership』에 따르면, 조직을 이끄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비전을 전달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럼 비전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성공적인 지도자는 3단계를 본다.


1단계: 현실의 안목으로 현재를 본다.

2단계: 분별력있는 안목으로 가까운 장래를 본다.

3단계: 비전의 안목으로 성취될 가능성을 본다.


성공적인 지도자는 결코 3단계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1단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2단계가 먹혀들어가면, 그 다음에 3단계에 대해 말하게 된다.


독단적인 사람들은 곧잘 비전 파괴의 주범이다. 그러나 비전은 결국 그 파괴를 넘어선다. 미국의 특허국장 챨스 듀엘 (Charles H. Duell)은 “이제 발명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명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새로운 발명품이 쏟아지면서, 그의 발언은 망언이 되고 말았다. 1905년에 그로버 클리블랜드 (Grover Cleveland) 대통령은, “지혜롭고 상식 있는 여성이라면 투표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20년에 상원과 하원의원은 여성참정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192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밀리켄 (Robert Miliken)은 1885년도에,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물체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비전을 안 받아들이는 이유는,

사고가 꽉 막혔기 때문에

눈 앞의 현실만 보기 때문에

독단적이기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만족하고 안주하기 때문에

전통을 숭상하기 때문에

다수가 결정내릴 때까지 눈치보기 때문에

문제를 찾아내려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실패를 미리 단정하기 때문에 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비전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단계: 그들 곁에 가라! 그들의 승리와 당신의 승리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게 하라!

2단계: 그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라! 비전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을 보면, 비전이 그려지게 하라! 그 그림을 개인화할 수 있게 해 주어라!


2차대전 당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낙하산을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하루에 8-10시간씩 그들은 색깔 없는 천을 하염없이 꿰매면서, 피로와 졸음과 권태와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바느질이 생명을 구하는 작전의 일부라는 말을 들었다. 내 남편, 내 형제, 내 아들이 사용하게 될 거라는 마음으로 이 바느질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항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3단계: 가능성에 눈뜨게 하라! 먼저 승리자를 찾아내라. 그들을 팀에 가담시켜라. 이 승리자들이 스승이 되어 이끌어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라.


승리자는 비난이나 거절에 덜 민감하다.

승리자는 문제의 핵심을 생각한다.

승리자는 당면 과제에 초점을 맞춘다.

승리자는 현실적으로 냉철하다.

승리자는 실패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승리자는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는다.

승리자는 전체 그림을 볼 줄 안다.

승리자는 도전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인다.

승리자는 비생산적인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Viktor Frankl은 포로수용소에서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서 오늘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 앞에서 말하는 그런 꿈을 포로수용소에서 꾸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이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을 만난 일도 없습니다. 이런 강연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나누었던 강연과 똑같은 무수한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비전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도자는 꿈꾸는 자이다. 그 꿈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자이다. 꿈에서 자극을 받고, 영감을 받고, 추진력을 받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승리한다. 지도자는 꿈으로 자기를 형성하고, 그 꿈으로 남들의 자아실현을 도와준다. 꿈에서 무한한 열정과 생명력과 창의성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뽑아내라!




9. 지도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 자기 훈련


위인들의 전기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최대의 승리를 맛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최초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자기 훈련”이란 말은 희랍어 “붙잡다, 꼭 쥐다”란 어원에서 파생했다. “자기 훈련”이란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를 통제받도록 자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기 훈련”이란 내 인생에서 진정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원치 않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치 않는 걸 해야, 선택의 여지가 넓어진다. 마침내 즐기게 되고, 더 자유케 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은, 자기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성장시킨다. 만약 자기가 자기를 이끌지 못한다면, 남도 이끌 수 없다. 지도자는 자기가 가 본 길보다 더 멀리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다. 자기 훈련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때만, 자기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하루는 프러시아의 왕 Frederick이 베를린 외각을 걷고 있었다. 한 노인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왕입니다.” “왕이라고요? 허허...무슨 왕국을 통치하시오?” “나 자신이라고 하는 왕국입니다.” 남을 지도하고 싶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만 한다!


그럼 “자기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당신 자신 안에서부터 시작하라!


한 신문기자가 위대한 전도자 무디에게 물었다. “누가 당신을 가장 괴롭게 합니까?” 그러자 무디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무디라는 작자 때문에 가장 골치를 썩고 있소.” 사무엘 호펜슈타인 (Samuel Hoffenstein)은 말한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는 늘 같이 간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만다.” 잭 파 (Jack Parr)는, “내 일생을 돌이켜보니, 실로 많은 장애물을 만났다. 그 중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었다.”


수많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지고 실패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제 때문이다.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자기 길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 나한테는 불운이 겹쳤다고, 희대의 악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축복과 번영을 차 버린 것, 불운과 악재가 아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의 경쟁자”


내게는 적이 한 사람 있었다.

나는 그를 알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는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의 발길을 피해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번번히 나의 계획을 방해했고,

나의 목표를 좌절시켰으며,

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할 때,

그는 을씨년스럽게 내게 말했다.

“No! 안돼!”

어느 날 밤 나는 그를 잡았다.

그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베일을 벗겼다.

나는 드디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 그 얼굴은 바로 나였다.


당신은 어리석을 때, 세상을 정복하기 원한다. 그러나 지혜로와지면, 나 자신을 정복하기를 원하게 된다.


둘째, 일찍 시작하라!


힘든 일이 왜 생기나? 당신이 마땅히 했어야 했던 쉬운 일들을 하지 않아서 쌓이고 쌓인 그 결과이다. 예를 들어, 시험이 왜 힘드냐? 평소에 꾸준히 준비했더라면,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


작은 성공을 할 줄 알아야 큰 성공에 도전할 수 있다.


넷째, 지금 시작하라!


존 필드 (John Hancock Field)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은 좋은 생각, 좋은 아이디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극소수다.” 링컨은 말했다. “내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내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부터 나를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갈 때, 기회도 내게 찾아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준비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다.


다섯째, 당신의 삶을 조직하라!


쓸 데 없는 시간낭비를 하지 않으려면, 당신의 삶을 조직해야 한다. 그래야 삶에 추진력이 생긴다. 만화영화 “위니 더 푸 (Winnie the Pooh)”에서 크리스토퍼 로빈 (Christiopher Robin)은 말한다. “조직이란,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조직화가 잘 되면, 효율 (efficiency)이 높아지고, 효과 (effectiveness)가 극대화 된다. 그럼 어떻게 삶을 조직하는 게 가장 좋을까? “80-15-5”의 원리를 따르라!


삶을 조직화 하는 3단계.


당신이 가장 자신 있는 일에 80%를 투자하라!

당신이 배워야 하는 일에 15%를 투자하라!

당신이 가장 약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5%를 투자하라!


여섯째, 통전성을 개발하라!


통전성을 가진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누구와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한결 같은 사람이다. 내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일거리”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통전성을 다음과 같이 개발하라!


통전성 개발 7 단계.


내가 가르치는 대로 행한라!

내가 말한 약속을 지키라!

다른 사람에게 정직히 행하라!

나보다 남이 얻을 수 최상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

솔직담백하게 살라!

고통을 먼저 선택하고, 즐거움을 나중에 누리라! (인생은 투자한 만큼 얻는 것이다.)

감정으로 일하지 말고, 인격으로 일하라!

 

10. 지도자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후진 양성


지도자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지도자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마키아벨리 (Niccolo Machiavelli)는, “지도자의 능력을 측정하려면, 그 주변 사람들을 보면 된다.”고 했다. 중국 속담에, “일 년을 내다본다면, 곡식을 심어라! 이십 년을 내다본다면, 나무를 심어라! 만약 100년을 내다본다면, 사람을 키워라!”하는 말이 있다. 주위 사람들을 계속 키워나갈 때, 사역이 지속적으로 증대되는 것이다.


승리하는 팀 (winning team)을 그려보면 이렇다.


탁월한 지도자: 동기부여 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좋은 팀멤버: 일을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은 좋은 팀멤버를 구성하는 일이다.

승리를 위한 일치단결: 모두 승리를 위해 싸운다.

팀웍: 멤버들끼리 서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계속적인 진보: 한 번 성공한 것에 안주하지 않는다.


첫째, 탁월한 지도자


탁월한 지도자는 반드시 세 분야를 통제해야 한다.


재정분야: 지도자는 조직의 가장 큰 실권자여야 한다.

인사분야: 인재의 선택이 조직의 내용을 결정한다.

기획분야: 어떤 기획을 만드느냐에 따라 조직의 미래가 결정된다.


이 세 가지를 다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독재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지도자는 모든 분야의 모든 일에 항상 접근 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조직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 좋은 팀멤버


작은 조직체일수록 좋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조직이 작기 때문에, 열등한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다. 100명 중 1명이 열등하다면, 1%에 불과하지만, 2명 중 1명이 열등하다면, 50%나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재 1명을 등용하는 것은, 100명을 조직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그리고 무슨 일을 맡길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할 때, 당신의 직감을 믿으라! 만약 최선의 인물을 쓸 수 없다면, 최선의 가능성을 지닌 사람을 택하는 것이 좋다.


셋째, 승리를 위한 일치단결


승리하는 팀이 항상 강하기 때문에 이기는 것은 아니다. 승리하는 팀은 더승리를 갈망하고, 더 헌신되어 있으며, 더 많은 값을 기꺼이 지불한 것이다. 승리를 위해 모두가 일치단결할 때, 강한 팀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넷째, 팀웍


미국 NBA 농구팀 보스톤 셀틱스 (Boston Celtics)는 16번이나 우승을 했지만, 시즌 중 최다 득점이나 개인 성적에 따라 연봉을 지불하지 않았다. 팀웍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지급했다. 서로 돕는 협동정신이 개인의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팀웍이 유지되려면,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주요 멤버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와 직접 관련되지 않으면, 덜 관심하고 덜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계속적 진보


어느 조직제든 성장이 멈추면, 그 조직의 생명력은 끝난다. 성장을 위해서는 칭찬이 중요하다. 그러나 1년에 한 번 종합적으로 칭찬하기보다는, 단계별로 조금씩 칭찬하는 것이 실력향상에 더 효과적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산 2007-01-2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정리자료에 감사를 드립니다.
구독하겠습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9가지 습관 - 교회의 갱신과 성장을 위한 체질개선전략
조지 바너 지음, 조계광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교회


어떻게 하면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진지한 질문에 매우 효과적으로 답하고 있는 책이 있다.


책제목: 성장하는 교회의 9가지 습관

원제목: The Habits of Highly Effective Churches

저  자: 조지 바너 (George Barna)

역  자: 조계광

출판사: 생명의 말씀사, 2001년

서평자: 이강훈


서평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 (譯者)는 영어의 “하일리 이펙티브 (Highly Effective)”라는 말을 “성장하는”이란 말로 옮겼다. 그런데 이런 번역은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는 저술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본서는 한편으론 교회 성장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본서의 관심은 교인수의 증가보다는 교회와 신자 개인의 영적 성장에 있다. 또한 교회의 영적 건강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의 전반적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삶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논하는 것이 본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p. 12).


여기서 저자는 이 책의 저술 목적을 <건강한 교회 성장>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성장은 개인의 변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해 볼 때, “성장하는”이라는 말 앞에 “건강하게”라는 수식어를 더 첨가해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의 습관들」이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원제목에 나타난 “이펙티브 (Effective)"라는 말은 ”성장“이 아니라, ”효율성“을 뜻하는 말이다. “하일리 이펙티브 (Highly Effective)”이라 했으니까, “효율성이 아주 높은”이란 뜻한다.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가 「자연적 교회 성장 (Natural Church Development) 」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교회는 성장을 위한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다. 원척적으로 모든 교회는 성장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왜 모든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효율성 때문이다. 효율성이 낮은 교회는 침체하는 것이고, 효율성이 높은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효율성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다 좋은 교회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 높은 효율성으로 성장하는 교회들 가운데는 건강한 성장을 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성장을 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효율성과 건강한 성장 사이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조지 바너는 교회의 “사역 습관”이라 부른다 (p. 17). 그러므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높은 효율성으로 건강한 성장을 하는 교회들의 사역 습관>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 특징을 아홉 가지로 열거한다. ① 유능한 지도자. ② 효과적인 조직. ③ 의미 있는 성도의 교제. ④ 참된 예배. ⑤ 전략적인 복음 전도. ⑥ 조직적인 신학 교육. ⑦ 청지기 정신. ⑧ 사회봉사. ⑨ 가정 사역.


1. 유능한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는 목회자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1998년에 바너 리서치 그룹이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목회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로 이해한다는 대답이 69%로 가장 많았고, ‘지도자’로 이해한다는 대답은 불과 5%에 지나지 않았다 (p. 31). 이것은 95%의 교회가 지도력의 공백상태에 놓여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면 목회자만 잘하면 되는 것인가?


1998년에 바너 리서치 그룹이 평신도를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단순히 참석만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66%나 차지하고 있었다 (p. 47). 교계 전체로 볼 때, 66%의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지도력의 공백은 신자의 삶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지도력의 공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바너는 교회의 후원과 목회자 자신의 변화, 이 둘을 동시에 강조한다.


먼저 교회는, 목회자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pp. 36, 37), 목회자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하며 (pp. 37-40), 목회자를 평가할 때는 지도력과 관련된 요소들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pp. 42-44).


반면에 목회자는, 중요한 결정에만 개입해야 하고 (pp. 40-42), 능력 있는 평신도 지도자를 발굴 육성해야 하며 (pp. 42-54), 팀사역을 통하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 (pp. 54-56).


2. 효과적인 교회 조직


교회 사역의 효율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나쁘면, 인적/물적 자원을 낭비하게 되고, 심한 경우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건 공장의 경우나 교회의 경우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교회의 조직을 어떻게 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바너는 효과적인 교회 조직을 위해 다섯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로, 참여를 유발하라는 것이다 (pp. 58-60). 여기서 저자는 강압적이거나 통제적인 방식보다는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로, 유급 교역자를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pp. 60-64). 바너는, 교회가 전문 목회자들의 사역에 의존하면 할수록, 평신도의 지도력은 자라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빈 공간을 평신도 지도자들이 메워나갈 때 교회의 효율성이 더 극대화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셋째로, 교회조직을 변화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탄력적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pp. 67). 사역을 위해 필요 없는 조직은 없애고, 필요한데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요점이다.


넷째로, 합리적인 성장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다 (pp. 67-71). 여기서 바너는 매우 독특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건강한 성장을 하기 위해선, 연간 수적 성장률을 15% 이내로 유지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p. 68). 그 이유는 새 신자를 충분히 양육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지는 교회가 되고, 이것은 장차 건강한 성장에 위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부분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다섯째로, 철저한 책임감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pp. 71-74). 여기서 저자는 책임감을 정신자세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지도자 스스로가 자기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어떤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하며, 문제 발견 시 이를 시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목회도 과학인 것이다.


3. 의미 있는 성도의 교제


바너는 관계가 교회 성장의 가장 좋은 방법만이 아니라, 영적 생활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pp. 76-77). 이를 위해서 그는 관계의 우선순위가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요,


둘째는 가족과의 관계요,


셋째는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요,


넷째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다 (p. 79).


이런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이유는, 제이, 제삼, 제사의 관계를 모두 배제하자는 게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적절한 균형을 잡자는 것이다 (p. 81).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이거나 사역 중심적이어서 가정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성공적인 사역자들은 “매우 ‘가정적인 사람들’”임을 강조한다 (p. 84). 즉, 관계의 가치와 효율성을 함께 높이자는 것이다.


4. 참된 예배


1998년도에 바너 리서치 그룹이 교회 정기 출석자를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횟수가 매우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p. 88).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로, 회중에게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르쳐야 한다 (pp. 91-97).


줄째로, 참 예배를 드리겠다는 열정을 갖게 해야 한다 (pp. 97-101).


셋째로, 예배 자원-설교, 음악, 예배 순서...등-의 효율성을 높여 좋은 예배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pp. 102-120).


넷째로, 예배와 관련된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문제들을 평가하고, 변화를 모색한다 (p. 120).


예배의 승리가 곧 인생의 승리인 것이다.


5. 전략적인 복음 전도


저자는 전도 숫자를 할당해 주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것은 달성했을 때 교만한 마음을 갖게 하고, 미달했을 때 죄책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여섯 가지로 답한다. ① 연구, ② 분석과 비교, ③기도, ④ 결정, ⑤ 전도 훈련, ⑥ 계획 실천 (p. 122). 전도도 과학적/전략적으로 하자는 얘기다.


바너는 전도의 효과적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로, 크리스천들이 의도적으로 불신자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라 (pp. 124, 125).


둘째로, 각 사람에게 맞는 전도 방법을 장려하여 전도의 효율성을 높여라 (pp. 126-128).


셋째로, 어린이를 집중 공략하라. 1998년 바너 리서치 그룹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언제 예수를 영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18세 이전이라고 답한 자가 63%였고, 18~25세 가 18%, 26세 이상이 20%였다. 이것은 어린이가 전도의 주된 전략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넷째로, 피전도인이 예수 믿기로 결심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회심하고 양육되어 참 제자로 자라도록 체계화 된 제자훈련을 제공하라 (pp. 130-133).


다섯째로, 선교를 통해서 전도하라. 선교를 잘하면, 교회는 성도에게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자긍심을 높여주며, 개인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이들의 뜨거워진 가슴은 다시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피드백 (feedback)된다.


6. 조직적인 신학 교육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신학”은 “교육철학”에 더 가깝다. 제목의 배경에는 건강한 교육철학을 가진 교회가 건강한 성장을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개체교회는 어떤 교육철학을 가져야 할까? 바너는 “묵상하는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 혹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육성하는 것”이라 답한다 (p. 146, 154). 이것은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을 써먹기 위해서 교육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먼저 무엇이 되고 볼 일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자는 학습자에게 동기 부여를 해 주고, 배우는 자는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야 한다 (p. 147).


바너에 따르면, 건강한 성장을 거듭하는 교회의 교육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한다.


① 절대로 시간 낭비가 없게끔 한다 (p. 148).


② 높은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한다 (p. 148).


③ 가르치는 자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배우는 자의 의견을 존중한다 (pp. 150, 151).


④ “강도 높은 긴 교육 과정에 참여케 한다” (p. 152)


⑤ 단순히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주어진 지식을 피동적으로 습득하기보다는, 체계적인 성경 지식과 확고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갖추어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 (pp. 153-154).


이러한 교회의 교육은 목회자에게 종속된 일꾼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된다. 교회의 교육은 전문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성도 가운데 교사를 발굴 육성할 것을 제안한다 (p. 158).


7. 청지기 정신


“청지기 정신”이 영어로는 “stewardship"이다. 이 말은 물질 사용에 대한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이지만, 저자는 다차원적-물질적,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내용을 포괄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헌금에 관해 언급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좋은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물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교회의 재정이 증가될까? 바너의 대답은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비전으로 무장된 강력한 지도자이어야 한다 (p. 164).


둘째로, 목회자는 성도로 하여금 헌금을 할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시켜 주어야 한다 (p. 164).


셋째로, 목회자는 청지기적 삶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p. 165).


넷째로, 목회자는 헌금 내라는 말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p. 166).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그만큼 자신 있고, 당당하고, 모범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8. 사회봉사


몇 년 전에 바너 리서치 그룹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떤 교회가 가장 마음에 드냐?”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교회를 선택하겠다고 대답했다” (p. 169). 한국과 똑같은 정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비신자에게 물으면, 아마 같은 답을 할 것이다. 사회봉사는 예배, 교육, 친교와 함께 교회의 4대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실제로 미국에선 거의 문 닫게 된 교회들이 교회 내의 사역보다도 사회봉사에 힘쓰면서 오히려 부흥이 된 경우가 많다 (p. 173). 교회가 교회다워지니까 생명력을 얻게 되고, 힘차게 약동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봉사는,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회가 상당히 실패를 많이 하는 영역이다. 왜 그럴까? 바너는, “평신도 훈련의 부족, 지도력의 부재, 무계획, 기금 부족, 비현실적 기대”를 꼽는다 (p. 177).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로,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 (p. 180).


둘째로, 관심하는 분야에 이미 앞선 교회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p. 180).


셋째로, 일단 사역에 성공했을지라도, 겸손히 배우며 다른 교회나 단체들과 협력한다 (p. 181).


넷째로, 협력관계에 있는 교회나 단체에게 우리 식으로 똑같이 하라고 주문하기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며 그들의 방식을 존중한다 (p. 181).


9. 가정 사역


현대의 가정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 성장에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교인들은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교회는 크리스천 가정에 대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바너는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답한다.


첫째로, 스스로 성장해 나가는 가정을 육성하라 (p. 192). 건강한 가정을 육성하려면, 교회는 가정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기보다는 가정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p. 193).


둘째로, “가정에 관해 구체적이고 분명한 성경적 기준을 제시하라” (p. 194). 왜냐하면 “성경적 가정관에 충실할 경우, 문화적 규범이나 일시적인 유행, 또는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가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p. 194).


셋째로, “각 가정으로 하여금 목적과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그것들을 실천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p. 195). 즉, 가정이 영적 성장의 기본 단위 (a basic unit)가 되는 것이다.


넷째로, 교회는 가족 하나하나의 필요를 채워주기보다는 전 가족의 필요가 함께 채워지도록 지도하라 (pp. 196-197).


다섯째로, 가정 사역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를 발굴 육성하라 (p. 199).


여섯째로, 각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이 되게 하라 (p. 201).


일곱째로, “가정의 영적, 정서적 건강 상태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고” 정기적으로 진단하여, 민첩하게 대응하라 (p. 201).


이렇게 교회가 각 가정에 도움을 주면, 결국 가정은 교회의 사역에 더 큰 동량이 된다. 가정을 살리는 길이 곧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비결인 셈이다.


이상과 같이 조지 바너가 제시하는 높은 효율성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들의 아홉 가지 습관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주장은 과학적 데이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고, 그의 통찰력은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고 있다.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성장을 구가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