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전쟁 -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 세미나리움 총서 20
라즈 파텔 지음, 유지훈 옮김 / 영림카디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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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먹거리가 우리들의 삶의 한 축이면서 화두가 되어진지 오래다. 먹거리의 안정성은 어떤 것들이어야할까? 단순히 농약의 피해로부터 우리의 음식문화를 지키는 일은 이제 너무나 버거운 싸움으로 인지된다. 돌아보면 세상은 더 없이 풍족해 졌지만 우리들의 행복지수는 날로 급하강하고 있다. 나는 시골로 내려가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만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막상 두려운 건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현실을 보다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지금 나는 그 현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샀다. 그러나 내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은 냉혹하고 무서운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욕구(내가 고향으로 낙향학자 하는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더욱 더 그 욕구가 샘솟는다. 그리고 그 욕구를 보다 현실화하기 위해서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이런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다. 위기상황에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가 쿠바가 아닐까? 미국의 경제적 제재와 소련의 원조로 부터 자생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의 식량은 보다 체계화 되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어떤 곳에든지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과학과 교통 그리고 식량의 질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수확량은 엄청나게 늘고 있지만 여전히 배고픈 사람은 배가 고프고 배 부른 자들은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고 있다. 세상은 무서운 전투이다. 책 문구에 이런 글귀 비슷한 것이 있다. 일단 빵을 먹인다. 빵을 먹고 난 후 사람들은 그 빵을 만들고 그 빵에 들어가는 재료를 구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농산물의 거래는 이루어진다는 다국적 기업들의 경제논리가 감추어져 있다. 그게 선의의 호의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것이 독이 되어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줄 모르는 배신감... 하지만 이미 그것에 길들어진 사람들은 그 틀에 맞추어 살아야만 하게끔 되어있다. 

  교통이 발달하고 대형수퍼마켓이 생겨났으면 식품의 원거리 수송이 가능하게되었다. 물론 계절의 제약을 받는 과일도 드물게 되었다. 우리가 원한다면 어떤 날 어떤 때라도 맛 볼 수 있는 과일과 음식은 구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게 되었다. 식품의 장거리 운송과 대량구매와 대형수퍼에서의 판매는 제품의 질적인 면을 간과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종국에는 보다 양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유전자변형식물을 식품의 원료에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인체의 미치는 영향은 시각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만 이 또한 거대한 힘에 의해서 진실이 왜곡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산하고 스스로 구매해 나가야 하는 현실 앞에 놓여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현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현재 그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 있고 그 길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유기농 생산물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이지만 불과 70년도만 해도 우리 농촌에서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어귀 냇가에는 물고기, 우렁, 미꾸라지 등등의 생명체가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사이 우리의 농촌의 현실은 어떤가? 화학물질에 찌들어 있는 토양, 생산량은 늘었지만 여전히 가난한 농촌의 현실. 이런한 현상은 무엇으로 대변할 수 있을까? 그러다 사람들은 현실을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내면에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세상에서 공짜는 없다. 가난한 나라의 원조도 결국은 순수하지 못한 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가난이 멈추지 않는 이유를 이제 세상사람들은 너무나 잘알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이제 먹거리가 전쟁이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먹거리를 사수하는 일조차 우리는 점차 힘의 논리 앞에서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전쟁은 머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안정성보다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디에 살든 경제적 활동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생산된 상품의 유통구조이면서 가격의 결정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더 필요한 것이 도.농간의 유기적이면서 탄단한 네트워크가 가장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쉽지않다. 그렇지만 그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고 세상의 시선도 점차 변화되고 있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너무나 많은 먹거리 생산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울 뿐이다. 그렇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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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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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글러의 양심의 갈채를 보낸다. 아버지는 평생을 농삿일로 인생을 살아가시고 계신다. 한 번도 만족할 만큼의 쌀 값을 받아 보지 못하신 인생 그리고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가격을 볼 때마다 난 삶에서 적어도 농수산물만큼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소비하고 있다. 누군가?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애덤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다분히 경제적 순기능을 말한 것 아닌가?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조정되는지 깨닫게 된다. 장기적 안목으로 세상을 서서히 착취하고 사람들을  굶주림으로 몰고가는 그들 다국적 기업들의 착취는 집요하고 철저하게 사람들의 삶을 철저하게 짓밟고 있다. 제도화 되어버린 착취의 도구, 금융시스템의 무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왜? 선진국이 한 나라를 후원하고 또, 한나라를 지원하는지 그 원이을 알 듯 하다. 에디오피아의 경우를 되짚어 본다. 쿠테타를 지원하고 군비를 팔고 내부의 적을 만들어 대립하게 하는 선진국의 정책들을 보면 차라리 구역질이 난다. 그리고 군비를 끊임없이 팔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금리의 5~7배 가까이 받으면서 영원히 돈의 노예로 전락시켜버리는 정책, 흡혈귀처럼 한 나라의 경제를 송두리째 좌지우지하는 다국적기업들의 횡포를 보면 경제의 순기능에서 찾는 사회적 통합과 전체이익을 대변하는 선한 기업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에디오피아는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인데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의 곡물가격을 결정짓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으로 볼 수 있다. 생산자는 매년 턱없이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생산한 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한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이 가공하는 가공품은 한번도 내려간 적이 없다. 아러니컬하게도 세상의 논리와 경제적 논리와는 상반되는 현실이 유독 1차 생산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현재 다국적 기업들을 GMO-즉 유전자 변형식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식물을 통해서 식량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씨앗을 통해서 농업기반을 완전히 뒤흔들고 있다. 물론 인체에 미치는 영향보다는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시 하고 있는 이들은 양심과 인간의 건강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가장 우선히 한다. 

  경제적 가치를 위해서 노조를 탄압하고, 위협하면 직장을 폐쇄하여 새로운 곳으로 진출하여 사업장은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매번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나라에서 대물림되는 현상은 해가 지날 수록 감당할 수 없는 이자부담이 나라와 사회와 개인의 삶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 몽고나 에디오피아, 동남아의 여러나라들은 식수문제하나 해결하기에도 무기력하다. 매번 환경과 싸워야하고, 그 환경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지어지면 이자의 노예가 되어서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벼랑으로 몰아넣고 있을까?  

  세계는 빈부의 격차가 격심해지고 있다. 개인, 사회단체가 나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그 문제와 반대로 착취를 악랄하게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식량이 무기가 되고 날씨와 환경에 따라서 계속되는 구제금융을 받아야하며 그 이자부담으로 인해서 삶의 질은 개선되어지지 않고 있다. 개인이 그렇고 나라가 그렇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자원대국이며 식량대국이지만 한편으로 굶주림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들이 많다. 그 원인은 군부의 정권유지에서 이루어진 이자가 매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국적기업들의 착취는 흡혈귀처럼 더 악랄해져가고 브라질 국민의 대다수는 빚을 같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하는 것이다.  

  자유무역이 세상을 보다 풍성하게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 기업들의 사냥터가 되어버린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질은 향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열악해져가고 있다. 깨끗한 물, 비상용 약, 약간의 끼니가 없어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어디에 있을까? 그 착취는 계속될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무역11위 나라가 금융대란과 경제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자체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 된지 오래다. 자세히 들어다 보면 우리의 산업 전반에 걸쳐 우리의 경제가 누군가에 의해서 예속되어진 것은 광복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그 돈은 누군가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긴다는 말의 뜻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아직도 우린 재주를 부리고 있을 뿐이고, 돈은 안타깝게도 외국인들 이른바 큰손들이 다 챙겨가는 형국이다. 한번 예속되기 시작한 순간 그 틀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세상은 철저하게 양육강식의 논리만 있을 뿐이다.  

   지구 어느 편에서 누가 굶주려 죽든 누가 더러운 물을 마시다 죽어가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상은 경제적 이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영기업을 민영화 시킬 것을 요구하고, 민영화 된 기업의 지분을 취득하므로써 기업에서 발생되는 이익을 본국의 본사로 환송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후진국을 찾아다니면서 행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이다. 압박을 통해서 자본의 폭력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회유책으로 때로는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말이다. 양심보다는 그 뒤에 이리의 탈을 쓴 기업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라든 사회든 개인이든 누구나 누군가에 의해서 돈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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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광인일기 외 하서명작선 64
루쉰 지음, 김석준 옮김 / (주)하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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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기 어리석은 화자를 통해 세상을 읽다.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어떤 역사의 함점에 빠진 사람들을 보았는가
결코 몸부림쳐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내
혁명이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혁명 안에서 또다시 희생하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의 끝없는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어떤 혁명도 스스로 죄를 만들어 내고 사람을 희생하고
새로운 질서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아주 낯설지 않은 풍경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우리의 삶을 그리고
한때나마 세계인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있었다.

어떤 이데올르기도 옳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은 항상 그 안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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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름들 - 세계현대작가선 11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문학세계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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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름은 기록으로 기억된다.
삶과 죽음의 차이가 체크항목하나 수록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되어어 구분되어지는 것처럼 기록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죽음과 삶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삶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고 있다. 수 십년간 등기소 보조로 살고 있는 중년 사내의 삶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형언할 수 없는 기록물 안에서 얼마나 많은 기록들이 기억될까?

단순한 시작에서 여행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항상 죽음 앞에 있으면서 그 죽음의 의문을 풀지 못하고 죽는다.
의문사도 아닌 한 여자의 삶을 찾아나선 사내- 대중 안에서 사람은 어떻게 규정해야할까?
여기에서처럼 산자와 죽은자 그리고 죽은자와 산자로 구분되어지는 걸까?
사내가 왜 그렇게 찾아나서야하며, 또 소장이 왜 그걸 은밀하게 옹호해야하는지 우리의 삶이 익명성 앞에서 참 무의미한 존재임에도 우리는 날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함부로 화를 내지도 말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언제나 경건하게 살아야하는데 말이다. 웃기는 일이지만 신의 인간을 착각하면서 살게 만들어 놓았다. 두려움이 지나치지도 않고 자주 망각할 수 있는 두뇌를 주셨으니 말이다. 모든 이름은 익명 속에 나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단지 산자와 죽은자로 구분되어지면 우습지 않을까? 모든 이름은 존재하는 곳에서 불러지기 편하게 구분된다. 12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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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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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가면 아주 혼란스러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터키에 다녀온 친구의 말이 그렇다.
터키는 동,서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라는 말
그리고 오랫동안의 부흥기를 걸쳐서 신비함이 가득한 나라
문화의 점이지대에 살아야했던 예술가들의 고통을
아니면 변화에 대한 문물의 썰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대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이 책의 주제는 아닐까 생각한다. 초창기의 변화의 선두에 섰던 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과 좌절, 혹은 죽음, 시대적 사명감에 묻혀 살아가는 시대정신의 진실한 추종자들, 세상은 자꾸만 변화를 주문하지만 변혁의 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신은 인간에게 재능과 호기심을 함께줬다.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고 자신이 담아 온 세상을 자신이 바라 본 세상을 스스로의 이름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은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더이상 신이 아닌 개인, 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을 그려내야할 사명감, 그리고 그런 놀라운 사실 앞에서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두려운 변화인가? 그래서 신구의 갈등의 표면화 되어진다. 제국이 멸망하고, 스스로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 제국은 멸망을 하게된다. 인간의 욕망이 늘어난다. 부정해서 안되는 것을 부정하지만 새로움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가? 몸부림치며 부인하지만 새로운 시대정신은 자꾸 거대한 파도가 되어서 삶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한다. 변화란 그런 것이다. 항상 문화는 충돌을 통해서 성장한다. 지금 수구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건의 발생하게 된다. 그 시대적 배경이 오스만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문화의 한 단면이 세밀화와 세밀화가들의 삶, 그리고 세밀화가들 사이에 불어 온 변화의 거센 밀물,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갈등을 통해 사건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진행되어진다. 이것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떨림으로 가슴설레이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길들여진 영혼, 하지만 세상은 은밀하게 변화가 시작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둘다에게 사활을 건 은밀한 전쟁이 시작된다. 그건 통과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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