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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 어슬렁어슬렁 누비고 다닌 미술 여행기
류동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3월
평점 :

매료의 순간은 마법적이다.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단 1초, 굉장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사랑은 영겁의 시간을 살기도 한다. 찰나의 순간이 가져오는 영원의 마법이라니! 사로잡힌다는 것,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마법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여기, 한 소년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와 <시네마 천국>에 매료된 그 순간은 그로 하여금 고고 미술사학을 전공하게 했고, 미술 저널리스트가 되게 했으며, 베네치아에서 시칠리아에 이르기까지 35개 도시의 삶, 역사, 예술, 문화가 담긴 이탈리아 그 자체인 이 책을 쓰는 마법을 부려놓았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덕분에 나는 활자 속을 거닐며 이탈리아가 선사하는 광활한 인문학적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
포토에세이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로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하기 앞서 먼저 책에 실린 사진들을 쭉 훑어보는 걸 추천한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사진들을 덕분에 정말 가슴에 설렘이 가득 차오른다.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조치로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는가. 이제 굳게 질러두었던 빗장을 뽑아버리고 봉쇄 해제를 선언하는 나라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보다 본격적인 엔데믹, 완벽한 엔데믹을 꿈꾸며 먼저 포토에세이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를 펼치며 여행에 갈급한 마음을 달래본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자주 간 곳을 꼽으라면 베네치아지만,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을 꼽으라면 피렌체일 정도로 피렌체는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최애'하는 도시다. 사실 피렌체에 대한 첫 관심은 이런 그림과 서양미술의 보고로서가 아니라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면서 피렌체의 풍경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119
나도 한때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 아주 깊이 빠졌던 적이 있다. 그 소설을 너무 애정하는 마음에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아주 명확하게 자리 잡은 아오이와 쥰세이의 모습에 다른 색을 덧칠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영화를 20대 때 보았다면 나도 피렌체를 열렬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 위해 전 세계의 연인들이 찾는다는 피렌체의 두오모를 비롯해 과거 르네상스시대의 분위기를 오롯이 품은 아카데메이아 미술관, 산 마르코 미술관, 베키오 다리와 피티 궁전까지, 20대의 내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보았을 때 받았을 느낌이 궁금해졌다.
이탈리아의 많은 곳도 영화 때문에 찾아갔다. 아레초라는 도시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때문이었다. 1997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이탈리아 아레초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인공 귀도와 도라는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중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가족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진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암흑기. 결국 귀도는 어린 아들을 위해 독일군 앞에서 장난스럽게 행동하고 죽는다.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런 만남과 헤어짐, 재회를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는 장소가 아레초의 광장이다. 아름다운 아치와 계단을 배경으로 경사진 광장이 여러 번 등장하는 데 꽤 인상적이다. 영화 때문일까. 아레초는 나에게 아름답지만 슬픈 도시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219
나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이 영화의 배경이 아레초라는 것도 몰랐고 자연스럽게 아레초를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주인공 귀도와 도라가 유태인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아레초의 광장이라고 한다. 아레초는 주말이 되면 도시 전체가 벼룩시장으로 변해 생동감과 역동성이 가득 찬 도시로서의 매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여행 에세이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를 읽으며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다시 한번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아름다운 아치와 계단이 인상적이라는 아레초 광장과 그란데 광장이 보일까?
여행이 단순히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는 점은 많은 사람이 이야기했다. 이른바 오감을 통해 오장육부에 절절히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 은행에서 통장을 통해 돈을 찾듯이 당시 먹었던 음식이나 들었던 음악, 보았던 그림, 영화는 나중 어디서든 다시 접하는 순간 당시의 여행을 소환하는 동인이 된다.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429
여행의 기분이란, 은행에서 돈을 찾듯이 당시의 여행을 소환하는 것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 무더운 여름, 얼른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 그 기분을 잘 기억해뒀다가 추울 때 다시 써먹자고, 무더운 여름의 기분을 잘 충전해뒀다가 겨울에 다시 꺼내 쓰자고. 끝날 것 같지 않던 팬데믹 시대, 떠날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그래도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충전해둔 여행의 기분 덕분이었을 것이다. 모아둔 기억을 다 써버리고 더 이상 꺼내 쓸 기억이나 추억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또 견딜 수 없이 여행이 갈급해졌을 땐 여행의 기분이 고스란히 담긴 포토에세이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를 펼치자. 이렇게 여행이 사라진 시절을 견디고 나면 언젠가 또다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