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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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중 연합군은 하루라도 더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도쿄 중심부로부터 41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불에 탔고 1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단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바로 이 비극적 장면에 숨은 진실을 파헤쳤고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에 담았다. 인문학책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과 꿈, 도덕과 양심 사이의 어떤 지점을 짚어냈다.




도쿄 대공습이 목적이 더 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함이었다면 수긍할 수 있겠는가? 말콤 글래드웰은 인문학책 추천 <어떤 선택의 재검토>를 통해 더 나은 결말을 꿈꾸었으나 최악의 결말로 치달은 도쿄 대공습,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재검토해나간다. 당시의 미군 지휘부가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결정을 내린 후 그들이 마주하게 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낱낱이 파헤친다. '폭격기 마피아'라고 불리던 미 육군 항공대 지휘관들이 당초 추구했던 것은 도쿄 전역을 불태우고 민간인 대학살이 아니었다! 그들의 원 의도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의도했던 것은 민간인을 비롯한 불필요한 인명 손실을 줄이고 산업 시설을 파괴해 일본의 전쟁 야욕을 뿌리뽑는 거였다. 



 


내가 만났던 여러 역사학자는 공군 조종사 출신이었다. 그들은 발달된 전투기와 스텔스 폭격기,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수송기를 직접 조종했었다. 그래서 공군력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경험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폭격기 마피아들은 이론적인 것,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p.51



"그가 인류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폭격조준기를 개발해 폭탄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을 도운 이유가 뭘까 궁금할 겁니다. 그는 폭격을 더욱 정확하게 만듦으로써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진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피아 폭격기'라고 불렸던 당시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지휘관들은 혁신적이고 진보한 전쟁관을 주장해 다른 군인들 사이에서 괴짜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진보한다"라는 그들의 모토처럼 적군의 시야가 가려지는 한밤중에 낮은 고도에서 가능한 많은 폭탄을 떨어뜨려 민간인 사상자에 전혀 개의치 않았던 과거와 달리 최고 기술을 탑재한 폭격기 B-29 슈퍼포트리스로 일본의 산업 및 군수 시설만을 정밀하게 조준해 폭격하고 일본의 전쟁 의지, 수행 능력 등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들이 이러한 새로운 전쟁 방식을 추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뒷받침이 되었다. 네덜란드 출신 공학자 노든이 개발한 '노든 폭격조준기'는 혁신적으로 정밀한 조준이 가능했고 B-29 슈퍼포트리스는 적군의 대공포화가 닿지 않는 높은 고도에서 작전이 가능했다. 



이렇듯 기술적 진보가 뒷받침되었지만 그들의 이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바로 기상 악화, 제트기류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미군이 목표한 폭격은 당초 목표치의 단 1%에 그쳤고 연이은 실패에 미군 지휘부는 전쟁 방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폭격기 마피아의 정밀 폭격 방침을 철회하고 이전의 무차별 폭격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이렇게 전쟁 방식을 뒤바꿔버리는 과정에서 충분한 숙고와 검토가 없었음을 지적한다.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했지만 각기 다른 전쟁 방식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미군의 목적대로 전쟁은 끝이 났지만 과연 그들의 선택이 옳았는지 재고의 여지가 존재한다.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 그것들은 대단히 어려운 종류의 문제이다. 반면 인간의 독창성을 적용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있다. 폭격기 마피아의 천재성은 그 차이를 이해한 것이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p.233



도쿄 대공습으로 하룻밤 사이 도쿄 도시 전체가 불탔고 1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쟁을 빨리 종식시켜 사망자를 줄이기 위한 미군의 선택이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늘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어떤 선택을 포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한 르메이는 전쟁의 승리자로 기억되고 전쟁의 부조리를 막기 위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귀를 기울인 헨셀이 맞은 쓸쓸한 결말에 입안이 쓰다. 살아가는 동안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을 맞게 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도덕의 소리에 맞는 옳은 결정을 내리고 있을까?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 내가 행하고 있는 모든 선택들을 다시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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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 - 실재에 이르는 10가지 근본
프랭크 윌첵 지음, 김희봉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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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만 보고 선택한 책이다. 심오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담긴 철학책 정도로만 생각했다. 나에게 하나하나 분해되고, 다시 내 나름의 질서로 조합되어, 내 마음속에 흡수되기를 기다리는 문장들만 기대하며 펼쳤다가 아주 조금 놀랐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랭크 윌첵은 "원자핵의 강력 이론에서 점근적 자유성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몇 번을 읽어도 그의 공로가 무엇인지 내겐 알 도리가 없었다ㅠㅠ). 





어쩌면 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이라는 이력이 주는 편견은 그의 책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자신의 모국어라 할 수 있을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은 무자비한(!!) 책이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빛나는 <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는 예상대로 굉장히 아름답고도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는 저자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 물리적 세계를 연구하면서 배울 수 있는 근본적인 큰 원리 열 가지를 담은, 대중들을 위한 물리학책이다. 우주와 인간 존재에 대한 사색,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이론물리학과 천문학 우주론 생물학, 기술의 미래와 예술, 인간의 도덕성까지 다방면에 걸친 지식이 담겼다. 



저자는 우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몸에 익혔던 것을 버리고, 과학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받아들여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들은 우리의 오감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통합한 결과이지 우주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가치로운 일이다.



우리는 빅뱅 이후에 빛이 여행한 거리 이상을 볼 수 없다. 이것이 우주의 지평선을 이룬다. 그러나 하루가 지날 때마다 빅뱅은 점점 더 과거로 물러선다. 어제는 지평선 밖에 있던 것이 오늘은 지평선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루, 심지어 수천 년을 보탠다고 해도 우주의 나이가 늘어나는 비율은 아주 미미하고, 관측 가능한 우주에서 늘어나는 공간은 인간의 시간 척도로는 거의 알아볼 수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의 먼 후손이 보는 우주는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며, 지평선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는 것은 정신의 훈련이 된다. 

 p.68~69



우주라고 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불확실성 투성이로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우주의 본질이 불확정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주는 놀랍도록 균일하다고 한다. 우주 전체는 같은 물질로 채워져 있으며 전자는 모두 동일하다. 거대한 우주의 세밀한 부분까지 심오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이런 단순하고 평범한 원리들이라고 하니 더욱 놀랍다.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짜릿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선물을 가져다준다. 과학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 세계는 신선하고, 명쾌하고, 놀랍도록 풍부해 보인다

 p.19



과학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보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지각과 환경이라는 한계 내에서 경험을 통해 세워온 '모형'을 깨뜨려버리는 것, 그것은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첫 발걸음이 된다. 불완전하지만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그 첫걸음을 <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와 함께 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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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메이커스, 인공지능 전쟁의 최전선
케이드 메츠 지음, 노보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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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카카오! 헬로 카봇 노래를 틀어 줘!" 아침이면 인공지능 스피커에 말을 건네는 우리 아이들, 맨 처음 AI 음성인식 스피커가 나왔을 때만 해도 왠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위적인 목소리가 좀 불편했는데 지금은 내가 손으로 검색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다. 어느새 우리의 삶 곳곳을 파고든 인공지능 기술, 그 인공지능을 만든 미친 천재들의 이야기가 담긴 <AI 메이커스, 인공지능 전쟁의 최전선>을 만나보자. 인공지능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그 기술로 인한 경제 전망은 어떤지 궁금한 분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제프리 힌턴의 연구는 그가 몸담은 대학에서조차 기괴하다고 여겨져 외면받았고, 대학 측은 스스로 학습하는 머신 개발을 향한 힘겨운 연구에 동참할 교수를 충원해달라는 힌턴의 요청을 수년간 묵살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연구에 목매는 미치광이는 저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겠지요."

p.16



"당신은 악마입니까?" 세즈노스키가 질문했다. 민스키는 그 질문은 일축해버리고, 신경망의 한계를 설명하며 약속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세즈노스키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악마입니까?" 마침내 화가 잔뜩 난 민스키가 대답했다. "그래요, 전 악마입니다."

p.112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AI 기술이 막 신문에 등장하던 6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인공지능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적대적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바이드가 수천만 달러를 제시하면서까지 모셔갈 정도로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인공지능 기술자들은 과거에는 이상한 연구에 목을 매는 미치광이, 심지어는 악마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상용화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AI는 새로운 문명으로 일컬어지기까지 한다. 





맨 처음 AI라는 문명은 인간 두뇌의 미스터리를 탐구하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할까? 당시에는 하나의 망상처럼 취급받았다. 그러나 2016년 3월 9일,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는 바둑계의 최고 실력자로 손꼽히는 이세돌을 상대로 승리했다. 나도 그 세기의 바둑 시합을 텔레비전으로 관전했다.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했지만 그 1패는 프로그램 오류로 기인한 것이라고 하니,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인공지능 기술이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모두 파악하고 나면, 인간의 모든 사고하는 능력과 지적 능력을 따라잡고 나면 그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AI는 인류 문명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온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또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SF 소설 속 종종 등장하곤 하는 것처럼 정말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고 멸종시킬 수도 있다. 그전에, 우리는 AI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관계의 통제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AI의 맨 처음부터 현재를 제대로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AI가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던 시절부터 인류의 삶을 침투해버린 지금까지, AI 기술에 대한 모든 것이 담긴 과학도서 <AI 메이커스, 인공지능 전쟁의 최전선>는 AI 시대를 맞아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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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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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어보려고 한다는 건 아마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일 테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누군가에게 다정한 척해야하는 것, 누군가가 듣기 싫어할 말을 참아내고 자신의 입안에 쓰디쓴 그 말을 머금고 견디는 것. 그리하면 0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소설 <영의 자리>는 무엇이 되어보려고 한 적 없는 누군가, 수험생이어야 하니까 수험생으로 살았고 취준생이어야 하니까 취준생으로 살았던(p.10)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무엇이 되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랬던 삶이 결코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입사한 지 2년 만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이직한 새 회사는 경영 악화로 폐업을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백수가 되었고, 자취집을 곧 비워달라는 통보도 받는다.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하자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몰려와 밤에는 이력서를 쓰고 낮에는 집을 보러 다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분투하는 삶 속에서 갑자기 넌더리가 났다.





하루는 계단 꼭대기에 있는 집을 보고 와서 뻐근한 다리를 쭉 펴고 라면을 먹었다. 바닥이 드러난 냄비에 달라붙은 파를 젓가락으로 집으려다가 번번이 실패하자 갑자기 넌더리가 났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p.12



무엇을 해도, 무슨 노력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자 '나'는 여기저기 곰팡이가 핀 낡은 집을 계약하고 자신의 경력과 상관없이 약국에 전산원으로 취직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면접 보기 위해 찾은 약국에서 약사는 '유령이 또 왔네.'라며 알 수 없는 말을 꺼낸다. 자신이 언제 유령이 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주 납득이 가지 않는 말도 아니었다. 약국에서의 일상은 견딜만한 비극으로 흘러간다. 처방전을 등록하고 처방 내용대로 약을 지어 약을 건네준다. 그 사이 잔돈을 잘못 거슬러주거나 하는 자잘한 실수도 하며 약국에서의 두 달여 시간은 더디게도, 또 빠르게도 흘렀다.




최저 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 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p.92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p.146



자취집을 옮기면서 부모님께 보증금 만큼의 돈을 빌렸지만 자신이 약국에 취업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약국에서 받는 최저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렵고, 인생의 끝자락처럼 느껴지는 서른을 살아내는 것은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듯하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기분을 부모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처한 일이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는 자신의 무너뜨렸던 것들을 다시 쌓아올리려 의지를 다잡거나 분투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흘러간다.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는 소설 속 어느 문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 수많은 1들이 존재하는 만큼 수없이 많은 0들이 존재한다. 1이 되지 못한 0은 과연 무용한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0이 언제까지고 0이도록 내버려 두자. 우연을 가장한 필연, 필연처럼 찾아온 우연 속에 0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성장할 것이고 언젠가는 자신이 0이 될 것인지 1이 될 것인지 설레면서 우울한 과정을 거치며 알게 될 것이므로. 이 세상의 수많은 0들에게, 20대들에게 추천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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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 암을 지나며 배운 삶과 사랑의 방식
양선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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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암입니다." 평소 '에너자이저'로 불릴 만큼 활기와 긍정이 넘쳤던 저자는 활짝 열려 있던 세상의 문이 바로 눈앞에서 철거덕 닫히는 듯했다고 기억한다. 암 진단을 받던 날, 암 선고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고. 암 때문에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빼앗기고 영영 무채색으로 살 줄 알았던 그녀는 암을 부정하고 원망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수용하기로 했다. 치열하고, 열정적이었고, 사랑으로 가득 찼던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기로 마음먹자, 무채색일 줄로만 알았던 삶은 여전히 무지갯빛으로 빛났고, 끝장날 줄 알았던 인생은 계속됐다. 에세이 추천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는 한겨레 기자로 20여 년간 열정적으로 삶을 꾸려온 저자가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치료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담긴 투병기이자 투병의 시간도 떨쳐내야 할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생이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가는 여정이 담긴 책이다.

🔖그날 나는 비로소 유방암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 질병이 부정하고 원망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 또한 내 삶이고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제야 암을 진단받기 전 내가 살아온 40여 년의 삶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치열했고 열정적이었고 내 삶을 사랑했다.
p.34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 몸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은 걸 확실히 느낀다. 가끔 이유 없는 복통을 느낄 때면 그 순간부터 이 증상이 암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떠오른다. 암이 내 삶에 침범해도 전혀 이상한 나이가 아니니까, 원인 모를 통증은 조건반사처럼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불청객에 대한 공포심을 소환한다. 그래서인지 암 진단을 확정하는 의사의 말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는 문장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에세이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는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암'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암을 진단받은 그날부터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해나갔는지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환자복이 스님 옷 색깔과 비슷해서인지, 영락없이 비구니 같다. 얼굴도 동글동글, 머리 모양도 동글동글. 사진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보기 흉하지 않다. 사진을 보고 있는데 친정어머니 카톡이 온다. “오메~이쁘다(역시 엄마의 사랑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다).” 머리카락 빠진다고 울고불고하던 내가 불과 며칠 만에 또 머리카락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내 두상을 보며 웃고 있었다.
p.75

첫 항암의 경험을 해본 나는 2차 항암 주사를 맞을 때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주사를 맞을 수 있을까 궁리했다. 어차피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고, 삶이 내게 쓴 레몬을 준다면 가만히 앉아 쓴 레몬을 먹기보다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만들라고 했다. 어차피 항암 주사는 맞아야 하지만, 아픔, 고통, 두려움, 외로움 등을 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찾아야 했다.
p.97

항암 치료를 받을 때 구토나 오심을 막아주는 캔디나 얼음, 그리고 주사액이 들어가는 동안 볼 만한 재미있는 영상을 준비하라는 구체적인 조언과 암 투병 환자들에게 유용한 앱을 깨알같이 소개하고 있어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큰 도움을 받을 것 같아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진다. 얼굴색이 달라질 정도로 극심한 변비에 시달리다 쾌변한 날의 통쾌함, 항암으로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기 시작하자 속상한 마음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던 저자의 아들이 결국 머리를 빡빡 민 저자에게 "엄마, 도라에몽 같아요!"라며 좋아했다는 이야기까지 남의 일 같지 않아 눈물 찍어내며 읽다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는 암 선고를 받고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에세이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연대하는 법, 나 스스로를 보살피는 법이 담긴 다정한 암 투병 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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